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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에서 생태 공동체라는 공통점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에서 생태 공동체라는 공통점

OneTiger 2019. 9. 18. 20:04

영화 <스캔들: 조선 남녀 상열 지사>는 어떻게 조씨 부인, 조원, 숙부인 정씨가 복잡한 정사 관계들을 맺는지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내기이고,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순정이고,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질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랑은 장난이 되거나, 죽음이 되거나, 희생이 됩니다. 제목처럼, 영화 <스캔들>은 조선 시대 상류층을 이용해 위선과 가식, 순정, 정열, 시기, 질투, 희생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대 배경과 달리, <스캔들>은 18세기 서구 소설에 기반합니다. 1782년에 서구 작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는 소설 <위험한 관계>를 썼습니다.


소설 <위험한 관계>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여러 연극들, TV 드라마들, 영화들은 <위험한 관계>를 각색합니다. <스캔들: 조선 남녀 상열 지사> 역시 이런 각색에 속합니다. <스캔들>은 18세기 서구 상류층을 조선 시대 상류층으로 바꾸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는 소설 <위험한 관계>에 기반합니다. 18세기 서구 상류층과 조선 시대 상류층이 다름에도, 어떻게 <스캔들>이 <위험한 관계>에 기반할 수 있나요? 여기에는 몇몇 이유가 있을 겁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처럼, 21세기 남한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열심히 "대한~민국!"을 외치나, 사실 수많은 남한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처럼, 21세기 남한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에 기반합니다. 여기에서 서구 근대화는 자유주의 철학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가리킵니다. 아무리 18세기 유럽과 21세기 초반 남한이 다르다고 해도, 아주 커다란 공통점,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캔들>은 18세기 서구 상류층을 조선 시대 상류층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서구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이게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게다가 <위험한 관계>와 <스캔들>은 똑같이 계급 사회 속의 위선과 가식을 강조합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와 조선 시대가 다른 경제 현상, 다른 생산 관계에 기반한다고 해도, 양쪽 모두 똑같이 계급 사회입니다.


계급 사회에는 상류층이 있고, 상류층에게는 고유한 가식과 위선이 있습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와 조선 시대에서 상류층은 피지배 계급을 착취해야 합니다. 피지배 계급 착취 없이, 상류층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상류층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그들이 많은 잉여 생산물들을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피지배 계급은 이런 잉여 생산물들을 만듭니다. 상류층은 이런 착취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착취를 은폐하기 원합니다. 상류층은 입으로 좋은 말들을 떠드나, 그들은 뱀파이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피지배 계급의 고혈을 착취해야 합니다. 상류층은 모순적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상류층에게 가식과 위선은 빠지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자본가 계급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착취에 기반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잉여 노동 시간에서 이윤을 얻습니다. 임금보다 노동자가 훨씬 많이 일하는 동안, 이윤은 나타납니다. 자본가 계급은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들이 노동력들을 재생산함에도, 자본가 계급은 돌봄 노동들이 댓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폐기물 정화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건 행성급 환경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민중들이 자본주의에게 저항하기 원한다면,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들고, 전쟁을 일으키고, 저항 운동들을 고립시키고 탄압하고 학살할 겁니다.


이렇게 자본가 계급은 착취에 기반합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에게는 온갖 위선들과 가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위선들과 가식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 속의 자본가 계급에게 위선들과 가식들이 있는 것처럼, <위험한 관계>와 <스캔들> 속의 상류층들에게는 위선들과 가식들이 있습니다. 위선적인 상류층은 커다란 공통점이고, 그래서 <스캔들>은 18세기 서구 상류층을 조선 시대 상류층으로 각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러 <위험한 관계> 각색들은 밑바닥 계급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힘든 밑바닥 계급에게 화려한 가식과 위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화려한 상류층이 온갖 가식들을 부리는 동안, 밑바닥 계급은 굶어죽습니다. 밑바닥 계급이 굶어죽기 때문에, 상류층은 화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은 가식을 부리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적여야 한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식이고 위선이고 나발이고 없을 겁니다. 그래서 <위험한 관계>는 모순적인 지배 계급, 상류층과 떨어지지 못합니다. <위험한 관계>와 여러 각색들에게 상류층은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만약 어떤 SF 작가가 <위험한 관계>를 이용해 위선적인 미래 메트로폴리스 상류층을 풍자한다고 해도, 이런 각색은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시대와 배경이 바뀐다고 해도, 여러 창작물들 속에 근본적이거나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은 창작물들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만약 영화 <스캔들>이 소설 <위험한 관계>에 기반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스캔들>과 <위험한 관계>가 비슷한 부류라고 정리할지 모릅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지적합니다. 어라, 신데렐라 이야기? 어떻게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수 있나요?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왕자와 요정 대모와 호박 마차와 유리 구두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원은 유리 구두를 신지 않고, 호박 마차를 타지 않고, 샤랄랄라~ 변신하지 않습니다.


<시크릿 가든>은 중세 유럽 판타지가 아닙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왕족은 결혼하기 위한 무도회를 열지 않습니다. <시크릿 가든>에 왕족이 없음에도, 왜 시청자들이 <시크릿 가든>을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지적하나요? 신데렐라 이야기는 장르입니다. 만약 어떤 창작물 속에서 가난한 주연 여자 등장인물이 부자 주연 남자 등장인물에게 의지하고 사랑에 빠진다면, 이런 창작물은 신데렐라 이야기(장르)가 됩니다. <시크릿 가든>은 이런 줄거리를 따릅니다. 주연 여자 등장인물 길라임은 초라하고 가난합니다. 주연 남자 등장인물 김주원은 재벌 2세이고, 멋지고, 매력을 풍깁니다. 길라임과 김주원은 사랑에 빠집니다. 이건 전형적인 신데렐라 장르입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와 <시크릿 가든>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스캔들>과 <위험한 관계>를 함께 묶는 것처럼, 시청자들은 신데렐라 이야기와 <시크릿 가든>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신데렐라 장르는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여자가 당차고 똑똑하다고 해도, 결국 여자는 잘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여자가 보조적이고 남자가 우월하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시청자들은 <시크릿 가든>이 신데렐라 이야기에 속하지 않거나 유사성들이 희미하다고 반박할 겁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장르들이 그러는 것처럼, 신데렐라 장르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장르 경계선이 흐릿하고 모호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여러 창작물들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되거나 되지 않습니다. 장르는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후천적으로 사람들이 논의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기 때문에, 장르는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르가 선험적이라고 착각하나, 이건 그저 결과 중심주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장르를 논의하는 동안, 사람들은 결과보다 과정과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장르가 나타나고 바뀌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시크릿 가든>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과 흐름입니다.



만약 <스캔들>과 <위험한 관계>가 비슷한 부류가 되고, 신데렐라 이야기와 <시크릿 가든>이 비슷한 부류가 된다면, 다른 창작물들 역시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두 창작물에서 시대와 배경이 다르다고 해도, 평론가들은 아주 커다란 공통점을 찾고 두 창작물을 함께 묶을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와 게임 <블록후드>는 어떤가요? <에코토피아 뉴스>는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판타지 로망스입니다. <블록후드>는 21세기 초반 건설 경영 게임입니다. 어떻게 19세기 후반 판타지 로망스와 21세기 초반 건설 게임이 한 묶음이 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물론 이건 가능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 사이에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는 모두 생태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생태 공동체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생태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니라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에서 생태 공동체는 아주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소설 주인공이 새로운 문명을 둘러본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SF 작가들은 이런 타임 슬립 이야기들을 씁니다. 하지만 이런 타임 슬립 이야기들이 생태 공동체를 보여주나요? 이런 이야기들이 울창한 야생 삼림을 예찬하고 지저분한 검은 매연을 혐오하나요?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소설 주인공은 혐오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지저분한 산업 자본주의를 정말 싫어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노골적으로 산업 자본주의가 추레하다고 비판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추잡합니다. 그래서 녹색 자본주의는 신발 개나리 같은 헛소리입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절대, 절대 기후 변화를 비롯해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가 19세기 후반 소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기후 변화, 쓰레기 섬, 핵 폐기물을 언급하지 않으나, 이 소설이 자본주의를 매섭게 비판하기 때문에, 21세기 독자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참고하고 기후 변화를 비롯해 21세기 자본주의 환경 오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생태 마을과 울창한 야생 삼림에게 온갖 미사여구들을 덧붙입니다.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시티>를 비롯해 건설 게임들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스팀 게임 목록에는 숱한 건설 게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건설 게임들이 생태 공동체를 중시하나요? <블록후드>는 산업 자본주의가 더럽고 파괴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블록후드>는 깨끗한 동력원들과 친환경 건축들을 제시합니다. 심지어 잠시 동안 <블록후드>는 건설 게임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수분 순환, 수분과 삼림 관계, 먹이 그물망, 야생 동물 생태를 고민하는 동안, <블록후드>는 <심파크>, <타이토 에콜로지>, <Equilinox>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됩니다.



그래서 스토리 모드에서 게임 주인공은 멧돼지입니다. 어머, 멧돼지? 멧돼지는 야생 동물이고 자연 생태계를 대표합니다. 왜 건설 게임에서 야생 동물이 게임 주인공이 되나요? <블록후드>가 생태 공동체, 삼림 도시, 울창한 야생 삼림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는 단아하고 깔끔한 그래픽, 평온하고 몽환적인 배경 음악, 생태적인 이야기, 에너지와 영양분과 폐기물 순환과 정화, 친환경 기술들, 멧돼지를 비롯해 각종 야생 동물들, 싱그러운 녹색 식물들을 제시합니다. <블록후드>는 평온하고 아늑한 삼림 건물과 싱그러운 야생 삼림을 향해 찬사를 보냅니다.


이렇게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윌리엄 모리스는 삼림 건물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SF 평론가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가 똑같이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간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류에 반박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에코토피아 뉴스>가 유토피아 문학이기 때문에 <에코토피아 뉴스>가 <블록후드>보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쓴 <허랜드>와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블록후드>가 건설 게임이기 때문에 <블록후드>가 <배니시드 Banished>와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사람들이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가 똑같이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간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를 함께 즐기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스캔들>과 <위험한 관계>가 비슷한 것처럼, <시크릿 가든>이 신데렐라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에코토피아 뉴스>와 <블록후드>는 비슷할 수 있으나, 장르 경계선은 절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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