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파격, 일탈로서 바나나 껍질과 천국과 사회주의 본문
여기는 미국 대도시입니다. 미국 대도시로서 거리에는 북적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집니다. 남자가 미끄러지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은 남자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많이 다치셨나요? 저는 변호사입니다! 저에게 고소를 위임하세요! 누가 바나나 껍질을 버렸든, 저는 아주 두둑하게 합의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고 대답합니다. "이런, 젠장, 다들 돌아가세요. 저 역시 변호사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진부한 변호사 농담에 속합니다. 미국 대도시에는 수두룩한 변호사들이 있고, 그들은 약삭빠릅니다. 변호사들은 약삭빠르게 법망을 이용해 돈을 뜯어냅니다.
이건 대중적인 편견이고, 전형적인 변호사 농담들은 대중적인 편견을 이용해 변호사들을 조롱합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적인 편견이 변호사가 탐욕스럽고 약삭빠르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바나나 껍질 농담은 변호사를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농담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 속에서 변호사는 곤경에 처합니다. 변호사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변호사는 엉덩이가 너무 얼얼하다고 느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변호사를 둘러싸나, 그들은 변호사 안부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수많은 변호사들은 그저 두둑한 수수료를 챙기기 원할 뿐입니다.
변호사들에게 또 다른 변호사는 그저 수수료를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변호사는 인간이 그저 수수료를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은 변호사를 곤경에 빠뜨리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농담이 부족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엉덩방아와 수수료 소동은 가벼운 일탈입니다. 엉덩방아와 수수료 소동은 현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호사를 훨씬 조롱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만약 농담이 변호사를 훨씬 조롱하기 원한다면, 농담은 일상에서 훨씬 벗어나야 합니다. 만약 농담이 비일상적인 영역에 들어간다면, 이런 농담은 훨씬 웃길 겁니다. 그래서 농담은 천국을 이용합니다.
어떤 기술자는 고인이 되고 천국에 갑니다. 천국 입구에서 천사는 고개를 흔듭니다. "당신은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천사는 기술자를 지옥으로 보냅니다. 얼마 동안 지옥에서 기술자는 시간을 보냅니다. 지옥은 너무 불편합니다. 기술자는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기 시작하고, 지옥은 온갖 첨단 설비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첨단 지옥을 자랑하고, 야훼는 깜짝 놀랍니다. 야훼는 행정 오류 때문에 기술자가 지옥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야훼는 기술자를 천국으로 보내라고 명령하나, 사탄은 거절합니다. 야훼는 사탄을 위협합니다. "만약 네가 그 여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고소할 거야!" 사탄은 반문합니다. "웃기시네. 천국에 변호사가 있나?"
바나나 껍질 농담보다 천국 농담은 훨씬 웃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은 무거운 주제입니다. "지옥에나 가라!" 이건 심각한 저주, 모욕, 욕설입니다. 하지만 천국 농담은 변호사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천국 농담에서 심각한 저주, 모욕, 욕설은 조롱과 해학과 풍자로 승화합니다. 천국 농담에서 모든 변호사는 지옥으로 갑니다. 야훼가 사탄을 고소하기 원한다고 해도, 지옥에서 수두룩한 변호사들은 사탄을 변호할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야훼를 맞고소할지 모릅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보다 천국 농담에는 훨씬 비일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천국 농담은 삶과 죽음을 가로지릅니다.
심지어 천국 농담은 야훼와 사탄 관계를 뒤집습니다.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야훼를 숭배하고 사탄을 부정합니다. 일상 속에서 야훼는 승리자이고, 사탄은 패배자입니다. 하지만 천국 농담 속에서 사탄은 첨단 설비 지옥을 자랑하고, 야훼는 사탄을 질투합니다. 아무리 야훼가 "빛이 있으라!"라고 말한다고 해도, 천국 농담 속에서 야훼는 첨단 설비 천국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야훼가 사탄을 질투한다고 해도, 야훼는 사탄을 고소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옥 로펌은 야훼를 맞고소할지 모릅니다. 사탄은 야훼를 이기고, 이건 비일상적입니다. 이런 관계는 일상을 뒤집습니다. 이건 일탈입니다.
이런 일탈 때문에, 사탄이 야훼를 이기기 때문에, 천국 농담은 변호사를 훨씬 조롱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사탄이 야훼를 이긴다면, 일상 속에서 이건 심각한 불경(不敬)이 될 겁니다. 상황이 심각한 불경에 이르는 것처럼, 변호사들은 악독합니다. 심지어 야훼조차 사탄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변호사들은 악랄합니다. 그래서 여러 농담들 속에서 변호사들은 남자들인지 모릅니다. 대중적인 편견은 남자가 탐욕스럽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편견은 여자가 자애롭고 모성적이고 방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와 변호사는 잘 어울리고, 여자와 변호사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러 농담들 속에서 변호사들은 남자들입니다. 여자와 변호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설 <의뢰인>에서 레지나 러브는 여자 변호사인지 모릅니다. 레지나 러브는 전형적인 변호사가 아닙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에서 남자 변호사들은 수수료를 탐욕스럽게 뜯어내기 원하나, <의뢰인>에서 레지나 러브는 오직 1달러만 받습니다. 오직 1달러만으로 레지나 러브는 소년을 보호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것처럼, 레지나는 어린 소년을 보호합니다. <의뢰인>에서 레지나는 변호사보다 자애로운 엄마에 가깝습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과 달리, <의뢰인>은 농담이 아닙니다.
남자, 변호사, 지옥, 사탄은 잘 어울립니다. 천국 농담은 남자 변호사들을 비일상적인 요소(사탄)에 대입하고 남자 변호사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비약인지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은 너무 비일상적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너무 일상에서 벗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이 현실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농담과 현실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기 원할 겁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농담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농담과 현실이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나요? 만약 변호사가 시간 여행 장치에 탑승한다면, 이건 가능할지 모릅니다. 시간 여행 농담에서 변호사는 미래 문명으로 날아갑니다.
미래 문명은 이상적인 사회주의 문명입니다. 더 이상 커다란 싸움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 인류 문명은 밝고 건강하고 활기찹니다. 사람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돈만 노리지 않습니다. 악덕 사장, 비참하고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 성 폭행과 인종 차별, 이혼과 불화, 장애인 차별, 극심한 환경 오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밤길에 여자들은 안전하게 놀러다닐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는다고 해도, 아무도 짧은 치마가 성 폭행을 유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게 살아갑니다. 반면, 변호사는 얼굴을 찡그립니다. "이제 나는 실업자야!"
시간 여행 농담 속에서 미래 사회주의 문명은 천국 같습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살아가기 때문에, 여기에 아무 싸움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화목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주의 문명은 문자 그대로 천국입니다. 천국 농담이 증명하는 것처럼, 변호사와 천국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다투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는 직업을 잃을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호사들은 약삭빠르게 법망을 이용하고 두둑한 위자료를 뜯어낼 수 있으나, 이상적인 사회주의 문명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얼굴을 찡그립니다. 천국 농담과 시간 여행 농담은 똑같은 주제를 보여줍니다. 평화로운 세상과 변호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 농담과 시간 여행 농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은 천국을 만듭니다. 천국 농담에서 "빛이 있으라!"는 첨단 설비 천국을 만들지 못하나, 일반적으로 신은 천국을 만듭니다. 인간은 천국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오직 심판의 날만 기다립니다. 만약 언젠가 도적처럼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면, 인간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을 겁니다. 천상 왕국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에, 천국행 열차가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자매들과 형제들은 신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자매들과 형제들은 신의 이름으로 천국에 갑니다. 신의 이름 없이, 자매들과 형제들은 오직 인간의 능력만 이용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인간들은 미래 사회주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인간들은 사회주의 문명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천국과 사회주의가 비슷하다고 해도, 천국과 사회주의가 변호사와 똑같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천국과 달리, 인간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사회주의 문명은 똑같이 비일상적입니다. 천국 및 사회주의 문명과 달리, 바나나 껍질은 현실입니다. 대도시에서 변호사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역시 바나나 껍질을 얼마든지 밟을 수 있습니다. 반면, 천상 왕국은 현실이 아니고, 미래 사회주의 문명은 현실이 아닙니다. 양쪽은 비일상적입니다.
하지만 두 비일상적인 요소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은 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집니다. 천국은 초월적입니다. 감히 인간들은 천국을 만들지 못합니다. 반면, 인간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 미래 사회주의 문명은 당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사회주의 문명은 비일상적이나, 적어도 우리는 시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실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역사는 사회주의 문명을 향해 꾸준하게 전진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소설 <상흔>이 추정 악기(the perhapsadian)를 언급하는 것처럼, 미래는 특정하고 독립적이고 머나먼 공간보다 현실 속의 저항과 가능성인지 모릅니다.
물론 저항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간 여행 농담은 미래 사회주의 문명을 천국에 비유하나, 저항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가리키고 "사회주의는 억압적인 독재이다."라고 힐난합니다. 분명히 북한은 지독하게 썩은 물입니다. 문제는 북한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에는 북한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지독하고, 훨씬 폭력적인 억압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오직 북한만 지목한다면, 이건 그저 부분적인 시각에 불과할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보수적인 실증주의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는 총체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북한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19세기 후반에서 파리 코뮌은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파리 코뮌이 현실 속의 프롤레타리아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학살을 당했습니다. 자본가 지배 계급은 파리 코뮌을 악랄하게 학살했습니다. 비단 파리 코뮌만 아니라 수많은 사회주의 세력들은 학살을 당하고, 탄압을 받고, 고립됩니다. 결국 사회주의 세력들은 몰락하고, 탈선하고, 썩습니다. 북한은 이런 결과입니다. 사회주의가 나쁘기 때문에, 북한이 썩은 물이 되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학살하고 탄압하고 봉쇄하기 때문에, 북한은 썩은 물이 되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하고 성 폭행한다면, 나중에 아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요? 만약 아이가 자라고 범죄자가 된다고 해도, 이게 반드시 아이의 잘못인가요? 이게 순수하게 아이의 잘못인가요? 우리가 오직 아이에게만 죄를 물어야 하나요? 만약 풍족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아이가 자랐다면, 아이는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파리 코뮌부터 북한까지,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사회주의 세력들은 심각한 잘못들을 저질렀고,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사회주의만 문제라고 지목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게 보수적인 실증주의라고 지적할 겁니다.
저항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항이 낭만적이라고 꿈꾸나, 저항은 너무 처절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시도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사회주의 문명이 똑같이 비일상적이라고 해도, 천국과 달리, 우리는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농담과 시간 여행 농담은 다릅니다. 천국 농담과 시간 여행 농담에게 똑같은 주제가 있다고 해도, 천국 농담과 달리, 시간 여행 농담은 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지지 않습니다. 바나나 껍질 농담, 천국 농담, 시간 여행 농담은 어떻게 주류 문학과 사변 장르들이 다른지 보여줍니다. 만약 사람들이 현실을 너무 비약하지 않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시간 여행 농담을 좋아할 겁니다.
어떤 관점에서 바나나 껍질은 '일탈'입니다. 하루 종일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우리가 걷는다고 해도, 우리는 바나나 껍질을 쉽게 밟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도쿄 바나나가 유명하다고 해도, 아무리 도쿄 바나나가 달달하고 폭신폭신하다고 해도, 도쿄에서 사람들은 바나나 껍질을 쉽게 밟지 못할 겁니다. 남자 변호사가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질 때, 이건 일탈입니다. 미하일 바흐친은 이런 일탈, 카니발, 축제가 웃음을 자아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바나나 껍질 농담은 웃깁니다. 하지만 이런 일탈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카니발은 현실에 속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바닥에 던지고, (일부러) 밟고,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도, 당장 현실 속에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상적인 사회주의 문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바나나 껍질은 일탈이나, 천국과 사회주의 문명은 훨씬 파격적인 일탈입니다. 천국은 신화에서 비롯하는 파격입니다. 반면, 사회주의 문명은 변증법과 역사 유물론에서 비롯하는 파격입니다. 천국과 사회주의 문명이 똑같이 파격적인 일탈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파격을 이용해 농담하기 원할 때, 천국과 사회주의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