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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빈티>와 보편자로서 SF 작가 의도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빈티>와 보편자로서 SF 작가 의도

OneTiger 2021. 2. 26. 20:00



김용택은 시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건 김용택이 시를 쓴다는 뜻입니다. 김용택 시인이 쓰기 때문에, 독자는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김용택 시인이 쓰지 않는다면, 독자는 시를 읽지 못할 겁니다. 독자가 시를 읽기 전에, 김용택 시인은 씁니다. 독자보다 김용택 시인은 우선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은 주관적인 의도를 집어넣습니다. 시는 시인 의도를 포함하고 시인을 반영합니다. 독자보다 시인이 우선하고, 시가 시인을 반영하기 때문에, 독자가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시인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독자가 시를 해석하는 동안, 다른 무엇보다 시인 의도는 중요합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환한 달이 떠오릅니다." 이 시구들에서 김용택 시인 의도가 무엇인가요? 이 시는 설레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 화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 화자는 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시 화자가 이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밤은 신나고 근사합니다. 시 화자는 마음에서 환한 달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어떻게 인간 마음 속에서 위성이 공전할 수 있나요? 인간 마음이 우주 공간인가요? 만약 마음이 우주 공간이라면, 마음 속에서 위성 이외에 다른 천체들이 공전하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만약 인간 마음이 우주 공간이라면, 소설 <빈티>에서 거대 갑각류 우주선이 항해하는 것처럼, 인간 마음 속에서 생체 우주선이 항해할 수 있나요? 은네디 오코라포르처럼, 김용택 시인이 사이언스 픽션을 추구하나요? 김용택 시인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원하나요? 아니, 인간 마음 속에서 생체 우주선은 항해하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왜 시 화자가 불가능을 말하나요? 이건 과장입니다. 시 화자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행복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는 마음 속에서 환한 달이 떠오른다고 비유합니다. 행복은 추상적인 감정이고, 추상적인 감정은 시각적이지 않으나, 인간은 시각적입니다.

 

인간이 시각적이기 때문에, 시 화자는 추상적인 감정보다 시각적인 장면(환한 달)을 제시합니다. 게다가 달은 천체입니다. 높은 곳에서 달은 존재합니다. 달은 높습니다. 높은 곳에서 달이 존재하고, 시 화자가 달을 비유하기 때문에, 행복은 훨씬 높이 올라갑니다. 독자는 인간 마음에서 생체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시 화자가 행복을 환한 달에 비유한다고 해석합니다. 비록 독자가 김용택 시인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비유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독자가 시인 의도를 해석할 수 있나요? 이 해석이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과장, 비유는 관습적입니다.



"오오~, 그대는 붉은 장미입니다." 이 문구는 인간이 꽃송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정열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구는 인간을 장미에 비유합니다. "나는 네 수호 천사가 되기 원해." 이 문구는 인간이 천사로 승화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구는 인간을 천사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천 년을 지난다고 해도, 나는 천 년을 뛰어넘고 너를 사랑할 거야." 이 문구는 인간이 시간 여행자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구는 인간을 시간 여행자에 비유합니다. 환한 달이 비유인 것처럼, 붉은 장미와 수호 천사와 시간 여행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장미와 수호 천사와 시간 여행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에서 과장과 비유가 관습이기 때문에, 비록 독자가 김용택 시인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관습을 적용하고 시인 의도를 파악합니다. 이건 언제나 시간 여행자가 필연적인 비유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들에서 시간 여행자는 비유가 아닙니다. SF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비유가 아닙니다. 소설 모음집 <시간 여행 걸작선>이 여러 로맨스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SF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오랜 세월을 건너뛰고 연인을 찾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용택 시인은 SF 작가가 아닙니다. 높고 환한 달은 SF 설정이 아닙니다.



독자는 관습을 적용하고 시인 의도를 파악합니다. 현실에서 문학 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에, 김용택 시인은 행복을 환한 달에 비유했습니다. 만약 현실에서 문학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김용택 시인은 행복을 환한 달에 비유하지 못했을 겁니다. 김용택 시인보다 문학 관습은 훨씬 우선합니다. 현실 속에서 김용택 시인은 문학 관습을 적용했고 환한 달을 비유했습니다.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인은 시를 씁니다. 시인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가 시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현실을 적용합니다. 해석에서 시인 의도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시인 의도는 전부가 아닙니다.

 

많은 독자들은 시인 의도가 가장 중요하거나 전부라고 생각하나, 시인 의도보다 현실 속의 문학 관습은 우선합니다. 분명히 시인 의도는 중요하나,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는 시인 의도보다 현실을 중시합니다. 환한 달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김용택 시인 의도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비록 김용택 시인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비유를 얼마든지 해석합니다. 시인 의도보다 현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시인은 흐릿해집니다. 비록 독자가 김용택 시인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는 얼마든지 해석합니다. 심지어 김용택 시인은 시를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환한 달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김용택 시인이 썼기 때문에, 독자는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김용택 시인이 쓰지 않았다면, 독자는 읽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김용택 시인이 관습적인 비유를 직접 만들었나요? 아니, 이미 현실에서 관습적인 비유는 존재합니다. 김용택 시인이 쓰기 전에, 현실에서 관습은 존재합니다. 김용택 시인은 관습적인 비유를 빌렸습니다. 김용택 시인보다 관습적인 비유가 우선하기 때문에, 심지어 문학 평론가는 관습적인 비유가 김용택 시인을 사용했다고 분석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김용택 시인이 시구를 썼다고 해도, 김용택 시인이 비유를 직접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김용택 시인이 관습을 빌렸기 때문에, 김용택 시인은 시를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저자(author)가 되지 못합니다. 저자가 소유 개념을 가리키기 때문에, 김용택 시인은 저자가 되지 못합니다. 시인은 그저 작가(writer)에 불과합니다. 작가와 저자는 다릅니다. 시인이 쓰기 전에, 독자가 시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시인은 작가입니다. 시인이 시를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인은 저자가 아닙니다. 비단 김용택 시인만 아니라 다른 많은 문학 작가들 역시 저자가 아닙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빈티>를 썼습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빈티> 작가입니다. 하지만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빈티> 저자가 아닙니다. 작가는 존재하나, 저자는 다소 흐릿합니다. 독자가 <빈티>를 해석하는 동안, 아무리 은네디 오코라포르 의도가 중요하다고 해도, 독자가 소설 작가 의도보다 현실을 훨씬 중요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빈티>를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 상황에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작가 의도를 직접 설명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모든 소설 독자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직접 설명하지 못합니다.

 

많고 많은 소설 독자들은 <빈티>를 읽습니다. 남한 독자들 역시 <빈티>를 읽습니다. 만약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작가 의도를 직접 설명하기 원한다면,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남한을 방문하고 소설 독자들을 직접 만나야 합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고인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이 고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자들이 에밀리 디킨슨에게 직접 묻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독자들은 에밀리 디킨슨 의도를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남한 독자들을 만나지 못하고, 독자들이 고인 에밀리 디킨슨을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와 독자는 만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독자에게 작가보다 주관적인 경험은 훨씬 친숙합니다. 독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독자는 많은 것들을 겪습니다. 많은 것들은 주관적인 경험을 형성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남한 독자를 직접 만나지 못하나, 남한 사회에서 독자는 주관적인 경험을 형성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보다 남한 독자와 주관적인 경험은 훨씬 가깝습니다. 소설 작가보다 독자와 주관적인 경험이 훨씬 가깝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소설 작가는 다소 흐릿해지고, 소설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주관적인 경험을 적용합니다. 소설 작가는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남한 사회를 파악하나요?

 

얼마나 구체적으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남한 사회를 파악하나요? 만약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남한 사회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빈티>를 해석하기 위해 남한 독자가 주관적인 경험을 적용한다고 해도,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개입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소설 작가 의도는 훨씬 흐릿해질지 모릅니다. <빈티>가 개별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빈티>는 장르에 속합니다. 이 장르는 사이언스 픽션(SF)입니다. 주류 문학에서 시간 여행자는 비유이나, SF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비유보다 설정입니다. 주류 문학과 SF 소설은 다릅니다. SF 소설은 고유한 테두리를 형성합니다.



<빈티>는 개별적인 소설이 아닙니다. <빈티>는 장르 소설입니다. 이 장르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빈티>를 쓰기 전에, 이미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보다 SF 장르는 우선합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SF 장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이 장르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장르 소설로서) <빈티>를 해석하는 동안, 은네디 오코라포르 의도보다 SF 장르 전형은 훨씬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SF 장르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가 (장르 소설로서) <빈티>를 해석하는 동안,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왈가왈부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건 훨씬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보편자(universal)로서 'SF'가 존재하나요? 만약 보편자로서 SF 장르가 존재한다면, 누가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빈티> 작가인 것처럼, 누가 'SF' 작가인가요? 독자는 은네디 오코라포르를 SF 작가라고 부를 수 있으나, 여기에서 SF는 '보편자로서 SF'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이 장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SF'를 만들었나요? 메리 셸리? 허버트 웰즈?



메리 셸리와 허버트 웰즈가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클라크와 로버트 하인라인이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로저 젤라즈니와 어슐라 르 귄과 필립 딕이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누가 SF 장르를 만들었나요? 누가 '보편자로서 SF 작가'인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개별적인 '보편자로서 SF 작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SF 작가'는 거대한 흐름, 거대한 문화 현상입니다. 보편자로서 SF 장르가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소설 독자가 (장르 소설로서) <빈티>를 해석하는 동안,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개입하지 못합니다.

 

어슐라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을 썼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상흔>을 썼습니다. 두 소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두 소설은 다릅니다. <어둠의 왼손>보다 <상흔>은 훨씬 거대한 비(非)현실 설정들을 제시합니다. <상흔>은 다른 차원에서 초초초초초거대 바다 괴수 아방이 나타난다고 묘사합니다. 썰매견들이 썰매를 끄는 것처럼, 아방은 선단 도시를 끌고 금지된 바다를 향합니다. 금지된 바다에서 선단 도시는 엄청난 사건을 겪습니다. <상흔>과 달리, <어둠의 왼손>은 소박한 비현실 설정들을 제시합니다. 초거대 바다 괴수와 달리, 양성 전환 외계인은 대규모 비현실 설정이 아닙니다.



"SF 장르는 대규모 설정을 보여줘야 해! <어둠의 왼손>은 너무 시시해!" 이렇게 어떤 소설 독자는 <어둠의 왼손>보다 <상흔>이 낫다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왜 SF 장르에서 대규모 설정이 필수적이지? 모든 SF 소설이 대규모 설정을 필연적으로 제시해야 하나? 아니, 소박한 비현실 설정은 좋은 설정이 얼마든지 될 수 있어. 만약 SF 소설 작가가 대규모 설정을 무리하게 전개한다면, 규모가 너무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SF 작가는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많은 SF 소설들은 그저 규모만 키울 뿐이고 떡밥들을 회수하지 못해." 이렇게 어떤 독자는 <어둠의 왼손>을 변호할지 모릅니다.

 

두 독자 중에서 누가 옳은가요? SF 소설이 대규모 설정을 보여줘야 하나요? 만약 SF 소설이 대규모 설정을 보여준다면, 이건 훨씬 전복적이고 파격적일 겁니다. 하지만 만약 소설 작가가 대규모 설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건 그저 용두사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많은 SF 소설들은 용두사미가 되고 떡밥들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합니다. 오직 대규모 설정만 위해 SF 장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에서 대규모 설정은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SF 소설에서 소박한 설정은 좋거나 시시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인가요? 어슐라 르 귄과 차이나 미에빌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슐라 르 귄과 차이나 미에빌은 무엇이 정답인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두 소설 작가가 정답을 선택한다고 해도, 두 소설 작가가 SF 장르를 직접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두 소설 작가는 SF 장르를 고정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이미 어슐라 르 귄이 고인이기 때문에, 소설 독자는 직접 묻지 못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영국 작가이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차이나 미에빌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묻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독자는 스스로 해석하고, 소설 작가는 흐릿해집니다. 김용택 시인부터 초거대 바다 괴수 아방까지, 이 사례들은 흐릿한 작가가 저자가 아니라고 증명합니다.

 

비단 이 사례들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례들 역시 작가가 흐릿하다고 증명합니다. 작가가 흐릿하기 때문에, 작가는 작품을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저자가 아닙니다. 특히, 68 혁명 이후, 문학 분야에서 이 사고 방식은 훨씬 짙어졌습니다. 68 혁명은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68 혁명 덕분에, 사람들은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68 혁명이 권위를 의심하는 것처럼, 문학 평론은 작가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동안, 작가 의도는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이게 권위가 아닌가요? 만약 독자가 작가 의도를 중시한다면, 독자가 작가 권위에 충성충성~하지 않나요?



68 혁명 동안, 공권력은 급진적인 학생들을 두들겨팼습니다. 공권력이 급진적인 학생들을 두들겨팼던 것처럼, 작가 권위는 독자를 억압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 의도를 중시한다면, 작가 권위는 독자를 억압하고, 작가 권위에서 독자는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문학 평론들은 작가가 저자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작가 의도를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문학 평론가가 68 혁명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는 작가가 저자가 아니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김용택 시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68 혁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68 혁명과 상관없이, 작가는 흐릿합니다.

 

이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문학 평론은 시, 소설, 각본, 수필 같은 것들을 해석합니다. 시, 소설, 각본, 수필 같은 것들은 언어 매체, 글자 매체입니다.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이렇게 김용택 시인은 언어를 동원합니다. <빈티>는 언어 매체입니다. <어둠의 왼손>과 <상흔>은 언어 매체입니다. 심지어 비디오 게임에서조차 언어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디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비디오이나, 게임 플레이어가 세계 설정을 해석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어떻게 거대 나무가 우주선으로 변신하지? 어떻게 살아있는 우주선이 항해하지?"



"우주에서 나무는 생존하지 못해! 거대 나무 우주선은 불가능해! 생체 우주선은 불가능해!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무 우주선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황당무계한 설정이야!"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가 SF 설정을 해석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언어를 사용하고 사고합니다. 사고 방식은 언어에게 기반합니다. SF 소설처럼, SF 게임에서 언어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문학 평론은 비단 소설만 아니라 게임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소통 역시 언어에게 기반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소통합니다. 우리가 소통하는 동안, 우리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소통은 언어에게 기반합니다.

 

문학과 일상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문학에서 언어가 중요한 것처럼, 소통에서 언어는 중요합니다.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는 내 정체성을 드러내기 원해. 나는 내 의도를 호소하기 원해." 이렇게 레즈비언이 의도를 호소할 때, 레즈비언은 언어를 동원합니다. 김용택 시인이 언어를 동원하는 것처럼, 레즈비언은 언어를 동원합니다. 이 상황에서 레즈비언은 작가가 됩니다. 레즈비언이 작가이기 때문에, 문학 평론은 레즈비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레즈비언)에게 이건 너무 불리한 상황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언어를 동원하고 작가가 되는 것처럼, 레즈비언은 언어를 동원하고 작가가 됩니다. 이 관점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동안, 그들은 작가들이 되고 독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작품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레즈비언이 어떤 의도를 호소한다고 해도, 작가가 작품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레즈비언은 이 호소를 소유하지 못할 겁니다. 작가 의도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레즈비언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레즈비언이 호소하든, 작가 의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청자(聽者)는 레즈비언을 무시할지 모릅니다. 청자는 레즈비언 의도를 지울지 모릅니다.

레즈비언이 소수이고, 작가 의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수자 의도를 너무 쉽게 묵살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가들은 '흐릿한 작가 평론'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흐릿한 작가 평론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레즈비언이 발언하기 때문입니다. 김용택 시인보다 이미 비유 관습이 존재하는 것처럼, 은네디 오코라포르보다 이미 SF 장르가 존재하는 것처럼, 레즈비언보다 이미 현실은 존재합니다. 이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레즈비언은 발언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오직 현실 속에서만 레즈비언은 발언하고 작가가 됩니다.



독자가 시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가 시인 의도보다 현실을 훨씬 중시하는 것처럼, 독자가 SF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가 작가 의도보다 장르 전형을 훨씬 중시하는 것처럼, 청자(독자)가 레즈비언 발언을 해석하는 동안, 청자는 레즈비언 의도보다 현실을 훨씬 중시합니다. 현실에서 가장 지배적인 사회 구조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자본주의입니다. 적어도 자본주의는 아주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엄청난 빈부 격차를 유발합니다. 엄청난 빈부 격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엄청난 빈부 격차 속에서 우리 인생은 너무 팍팍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무 팍팍하게 살아갑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합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필연적으로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차별과 편견, 비난을 조장합니다. 자본주의와 동정, 연민, 관용은 대립합니다. 아무리 중도 보수들이 약자들을 동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근본적인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중도 보수들의 동정은 그저 표면적인 가식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너무 팍팍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차별과 편견, 비난을 조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을 해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베네수엘라를 헐뜯고 미국을 찬양합니다. 서구 백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으나, 많은 남한 사람들은 끔찍한 인종 학살을 비판하기보다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식민지 피해자들을 헐뜯습니다. 이 남한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찬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일본 제국을 비판하기 위한 명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로막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레즈비언은 살아갑니다.

이 현실 속에서 레즈비언은 발언하고 작가가 됩니다. 만약 현실이 차별과 편견, 비난을 조장하기보다 동정과 연민, 관용을 보여준다면, 비록 레즈비언보다 현실이 우선한다고 해도, 이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현실이 팍팍하기보다 온건하고 평화롭다면, 비록 레즈비언이 저자보다 작가가 된다고 해도,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현실을 중시하고,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지배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자본주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비록 레즈비언 의도가 흐릿하다고 해도, 독자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 2> 스크린샷 출처: SB,

www.youtube.com/watch?v=52GPE1ch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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