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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본셰이커>, 채식주의, 동물 관점 본문

생태/동물들을 향하는 관점

<본셰이커>, 채식주의, 동물 관점

OneTiger 2023. 1. 13. 12:20

[SF 평론이 스팀펑크들을 분류하는 것처럼, 채식주의는 모순이 아닙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소설가입니다. 이 소설가는 에르큘 포와로를 창조했습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소설 등장인물(캐릭터)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역시 소설가입니다. 이 소설가는 수잔 캘빈을 창조했습니다. 수잔 캘빈 역시 소설 등장인물(캐릭터)입니다. 에르큘 포와로, 수잔 캘빈에게 소설 등장인물은 커다란 교집합입니다. 이 교집합 때문에,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은 비슷합니다. 현실에서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소설 독자들은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직 허구적인 소설 세계에서만 에르큘 포와로, 수잔 캘빈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에르큘 포와로, 수잔 캘빈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이 비슷하다고 해도, 둘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다른 세계'입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사립) 탐정입니다. 현실에서 (사립) 탐정은 존재합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현실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수잔 캘빈은 로봇 심리학자입니다. 현실에서 로봇 심리학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양전자 두뇌 로봇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인공 지능은 기술적인 특이점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수잔 캘빈은 <아이 로봇>의 등장인물입니다. <아이 로봇>은 양전자 두뇌 로봇을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양전자 두뇌 로봇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 로봇> 세계에서 양전자 두뇌 로봇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과 <아이 로봇> 세계는 다릅니다. <아이 로봇>은 '다른 세계'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수잔 캘빈을 창조했을 때, 아이작 아시모프는 다른 세계를 의도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달리, 애거사 크리스티가 에르큘 포와로를 창조했을 때, 애거사 크리스티는 다른 세계를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세계'는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을 분리합니다. 아무리 소설 등장인물이 커다란 교집합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현실에 속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현실에 속합니다. 아무리 아이작 아시모프가 사이언스 픽션(SF)을 썼다고 해도, 현실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사이언스 픽션을 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사이언스 픽션을 쓰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근본적인 분류 기준일 수 있습니다. 소설 등장인물보다 현실은 훨씬 근본적인 기준입니다. 현실이 훨씬 근본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 등장인물이 커다란 교집합이라고 해도, 이 근본적인 기준은 에르큘 포와로와 수잔 캘빈을 분리합니다. 에르큘 포와로와 달리, 수잔 캘빈은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비단 에르큘 포와로, 수잔 캘빈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례들 역시 똑같습니다. 최영희 작가는 <꽃 달고 살아남기>를 썼습니다. 앤 레키는 <사소한 정의>를 썼습니다. 셰리 프리스트는 <본셰이커>를 썼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는 소설(책)들입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에게 소설(책)들은 커다란 교집합입니다. 도서관 사서는 <꽃 달고 살아남기>,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를 소설들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는 가까울 겁니다. <사소한 정의>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다른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처럼, <사소한 정의>는 우주 문명을 묘사합니다. 이 우주 문명은 은하 제국입니다. 현실에서 은하 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현실에서 우주 문명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2023년 오늘날, 심지어 인류 문명은 외계 개척 기지조차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은하 제국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사소한 정의>는 다릅니다. <아이 로봇>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사소한 정의>는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본셰이커>는 스팀펑크입니다. 다른 스팀펑크들처럼, <본셰이커>는 증기 기관 기술을 과장합니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 좀비들조차 존재합니다.



<본셰이커>가 증기 기관 기술을 과장하기 때문에, 심지어 좀비들조차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과 <본셰이커>는 다릅니다. <아이 로봇>처럼, <본셰이커>는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는 어떤가요?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와 달리, <꽃 달고 살아남기>는 현실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최영희 작가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최영희 작가는 다른 세계를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영희 작가와 달리, 앤 레키는 다른 세계,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를 의도했을 겁니다. 최영희 작가와 달리, 셰리 프리스트는 다른 세계, 스팀펑크 세계를 의도했을 겁니다.

 

다른 세계 때문에,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는 가까울 겁니다. 아무리 소설(책)이 커다란 교집합이라고 해도, 다른 세계 때문에, <꽃 달고 살아남기>와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는 다릅니다.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비단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만 아니라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들, 다른 스팀펑크들 역시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와 사이언스 픽션은 다릅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가 증명하는 것처럼, 근본적인 기준은 훨씬 중요한 기준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기준(동물)은 인간과 염소를 분류하고 채식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기준이 훨씬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채식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는 인간이 동물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동물인 것처럼, 닭, 거위, 돼지, 염소, 소는 동물들입니다. 인간부터 염소까지, 모두 동물들입니다. 염소가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염소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염소가 고통을 느낀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과 염소가 다르다고 해도, 인간과 염소는 근본적인 교집합(동물)을 형성합니다. 인간과 염소가 근본적인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과 염소는 비슷한 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염소를 죽인다면, 이건 비극적인 사건일 겁니다.

 

인간과 염소가 근본적인 교집합(동물)을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과 염소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한 위상이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염소를 죽인다면, 이건 비극일 겁니다. 채식주의는 이 비극에 반대합니다. 염소 고기를 얻기 위해 인간은 염소를 죽여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염소 고기를 얻기 원한다면, 인간은 염소를 죽여야 합니다. 적어도 인간은 염소를 잘라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자른다면, 염소는 커다란 고통을 느낄 겁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한 위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염소가 고통을 느낀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고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소 고기는 옳지 않을 겁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하기 때문에, 염소 고기는 옳지 않을 겁니다. 비단 염소만 아니라 닭, 거위, 돼지, 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염소 고기가 옳지 않은 것처럼, 닭 고기, 거위 고기, 돼지 고기, 소 고기 역시 옳지 않습니다. 채식주의는 이 고기들이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비단 이 고기들만 아니라 다른 동물 고기들 역시 옳지 않을 겁니다. 동물 고기가 옳지 않기 때문에, 채식주의는 식물들, 버섯들을 권유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들, 버섯들이 생명체들이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식물들, 버섯들이 생명체들인 것처럼, 인간들은 생명체들입니다. 인간들, 식물들, 버섯들은 커다란 교집합(생명체)을 형성합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커다란 교집합(생명체) 때문에, 인간들, 식물들, 버섯들은 비슷한 위상입니다. 인간들, 식물들, 버섯들이 비슷한 위상이기 때문에, 만약 인간들이 식물들, 버섯들을 죽인다면, 이건 비극적인 사건일 겁니다. 하지만 채식주의는 식물들, 버섯들을 먹자고 권유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채식주의가 모순이라고 지적할 겁니다. 어떻게 채식주의가 반박할 수 있나요? 훨씬 근본적인 기준은 대답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체입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명체보다 동물입니다. 이것 역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염소는 생명체보다 동물입니다. 포도 나무는 동물이 아닙니다. 팽이 버섯 역시 동물이 아닙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는 소설(책)들입니다. 소설(책)은 커다란 교집합입니다. 하지만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는 가깝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는 사이언스 픽션(SF)입니다. 훨씬 근본적인 기준은 <꽃 달고 살아남기>와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를 분리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가 가까운 것처럼, 훨씬 근본적인 기준은 포도 나무,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염소가 가깝다고 분류합니다. 인간이 생명체보다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은 훨씬 근본적인 기준입니다. 포도 나무와 달리, 인간은 뿌리를 뻗지 않습니다. 인간은 광합성하지 않습니다.

 

팽이 버섯과 달리, 인간은 균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팽이 버섯은 커다란 곰팡이입니다. 팽이 버섯과 달리, 인간은 곰팡이가 아닙니다. 인간은 포도 나무, 팽이 버섯과 다릅니다. 인간은 비단 포도 나무, 팽이 버섯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 다른 균들과도 다릅니다. 동물이 훨씬 근본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이 기준은 포도 나무,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염소가 가깝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가 가까운 것처럼, 포도 나무,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염소는 가깝습니다. 인간과 포도 나무가 가깝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포도를 먹는다고 해도, 염소 고기와 달리, 이건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겁니다.



인간과 팽이 버섯이 가깝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팽이 버섯을 먹는다고 해도, 염소 고기와 달리, 이건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채식주의는 타당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 훨씬 근본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채식주의는 모순이 아닙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 <사소한 정의>, <본셰이커>가 소설(책)들인 것처럼, 인간, 염소, 포도 나무, 팽이 버섯은 생명체들입니다. 하지만,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사소한 정의>와 <본셰이커>가 가까운 것처럼, 포도 나무,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염소는 가깝습니다. 소설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근본적인 기준일 수 있는 것처럼, 생명체보다 동물은 훨씬 근본적인 기준일 수 있습니다.

 

<본셰이커>와 달리, <데이 아 빌리언즈>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소설과 비디오 게임은 다릅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는 소설입니다. <본셰이커>는 소설입니다. <데이 아 빌리언즈>는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본셰이커>와 <데이 아 빌리언즈>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소설보다 소설과 비디오 게임이 가까울 수 있나요? 소설이 근본적인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이 아 빌리언즈>는 스팀펑크입니다. 이 스팀펑크는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데이 아 빌리언즈>는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다른 세계, 이 근본적인 기준은 <본셰이커>와 <데이 아 빌리언즈>를 분류합니다.



아무리 소설이 커다란 교집합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세계는 훨씬 근본적인 기준일 수 있습니다. <본셰이커>가 스팀펑크 판타지이기 때문에, 이 소설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 셰릴 프리스트가 이 소설을 썼나요? 그건 아닙니다. 현실에서 셰릴 프리스트는 이 소설을 썼습니다. 아무리 셰릴 프리스트가 스팀펑크 판타지를 쓴다고 해도, 현실에서 셰릴 프리스트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세계는 스팀펑크 판타지가 훨씬 근본적인 기준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는 스팀펑크 판타지,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와 달리, <본셰이커>, <데이 아 빌리언즈>는 다른 세계, 스팀펑크 판타지 세계를 보여줍니다. 소설과 상관없이, <꽃 달고 살아남기>보다 <본셰이커>와 <데이 아 빌리언즈>는 가깝습니다. <본셰이커>, <데이 아 빌리언즈>는 근본적인 기준이 우선한다고 증명합니다. 생명체보다 동물이 우선하기 때문에, 포도 나무,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염소는 가깝습니다. 인간과 염소가 가깝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염소를 죽인다면, 이건 비극일 겁니다. 인간과 포도 나무, 팽이 버섯이 가깝지 않기 때문에, 비록 인간이 포도를 먹고 팽이 버섯을 먹는다고 해도, 이건 비극이 아닙니다. 채식주의는 타당합니다.



[팽이 버섯보다 인간과 소는 가깝습니다. <본셰이커>와 <데이 아 빌리언즈>처럼.]



채식주의는 모순이 아닙니다. 분명히 인간은 인간과 동물이 비슷한 위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염소를 찌를 때, 염소는 고통을 느낄 겁니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염소는 고통을 느낄 겁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한 위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염소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비단 염소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물들 역시 똑같습니다. 이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포도 나무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이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팽이 버섯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가 다른 것처럼, 인간과 포도 나무, 팽이 버섯이 비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과 염소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셰릴 프리스트는 인간입니다. 셰릴 프리스트는 스팀펑크 판타지를 썼습니다. 최영희 작가는 인간입니다. 비록 <꽃 달고 살아남기>가 스팀펑크 판타지가 아니라고 해도, 최영희 작가는 이 소설을 썼습니다. 인간은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인간과 달리, 염소는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비단 염소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물들 역시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 소설을 씁니다. 오직 인간만 소설을 쓰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인간과 염소를 분리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근본적인 기준이 아닐 겁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동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대사(신진대사)입니다. 왜 동물에게 물질대사가 가장 중요한가요? 동물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다소 거친 설명이나, 엔트로피는 무한한 평형을 추구합니다. 만약 동물이 육체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엔트로피는 동물을 파괴할 겁니다. 엔트로피에게 저항하기 위해 동물은 육체를 유지해야 합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동물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대사는 가장 중요합니다. 생물학자들이 생명 현상을 정의할 때, 생물학자들은 물질대사, 육체가 가장 첫째 조건이라고 선택할 겁니다. 소설보다 육체는 근본적입니다.

 

비록 염소가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염소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염소에게 육체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 이 근본적인 기준 때문에, 인간과 염소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하기 때문에, 염소 고기는 비극일 수 있습니다. 비록 염소가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염소 고기는 비극일 수 있습니다. 비단 염소 고기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물 고기들 역시 비극일 겁니다. 그래서 채식주의는 모순이 아닙니다. 채식주의는 엉터리 헛소리가 아닙니다. 채식주의는 타당합니다. 스팀펑크부터 물질대사까지, 여러 근거들은 채식주의가 타당하다고 뒷받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들이 고통,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타당한가요? 아무리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도,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가 비슷한 위상이 아닌 것처럼, 인간과 포도 나무는 비슷한 위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가 소설이라고 해도, 다른 세계가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를 분리하는 것처럼, 아무리 인간과 포도 나무가 생명체라고 해도, 동물은 인간과 포도 나무를 분리합니다. 인간과 포도 나무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포도 나무가 고통, 공포를 느낀다고 해도, 인간은 포도 나무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인간과 염소가 비슷하기 때문에, 동물 권리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동물 권리가 다소 어색한 단어라고 느낍니다. 비록 동물 권리가 다소 어색하다고 해도) 동물 권리는 성립합니다. 동물 권리와 달리, 인간과 포도 나무가 다르기 때문에, 식물 권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식물 권리처럼, 균류 권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가 비슷한 위상이 아닌 것처럼, 인간과 팽이 버섯이 비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채식주의는 델라웨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는 팽이 버섯을 먹을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는 모순이 아닙니다. 이건 헛소리가 아닙니다.



이건 채식주의가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채식보다 육식은 지배적입니다. 육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육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식주의가 논리적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채식주의를 이상하다고 느낄 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들을 이른바 불편러들이라고 오해할 수조차 있습니다. 육식남, 초식남처럼, 심지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조차 육식을 미화하고 채식을 비하합니다. 심지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조차 채식을 비하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100% 채식주의를 실천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부분적인 채식'은 어떤가요?

 

부분적으로 채식주의를 실천하기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늘리기는 쉬울 겁니다. 100% 채식주의보다 이건 훨씬 쉬울 겁니다. 뭐, 솔직히 부분적인 채식은 부분적인 육식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인 채식은 진짜 채식주의가 아닐 겁니다. 부분적인 채식은 그저 언어 유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부분적인 채식이 그저 언어 유희에 불과하다고 해도, 만약 육식이 줄어들고 채식이 늘어난다면, 이건 부정적인 상황보다 긍정적인 상황일 겁니다. 비록 부분적인 채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만약 100% 채식이 너무 어렵다면, 부분적인 채식은 대안일 수 있습니다.

 

 

[<꽃 달고 살아남기>와 <본셰이커>처럼, 포도와 인간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완벽한 채식주의는 개인적인 문제보다 사회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많은 이윤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포도보다 스테이크가 비싼 것처럼, 채식보다 육식이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육식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대규모 목장들이 위험한 온실 가스들을 배출한다고 해도, 비록 기후 변화가 위험한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대규모 목장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선택하기 때문에, 10년 이후, 지구 평균 기온은 1.5도 상승할 겁니다. 인류 문명은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1.5도 시나리오는 현실일 겁니다.

 

1.5도 상승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많은 이윤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채식보다 육식이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육식과 헤어지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육식을 강요할 겁니다. 비록 대규모 목장들이 위험한 온실 가스들을 배출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식 광고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햄버거 광고부터 고깃집 광고까지, 육식 광고들은 사람들을 둘러쌉니다. 육식 광고들이 사람들을 둘러싸기 때문에, 이 광고들이 육식을 강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채식을 실천하기는 훨씬 어려울 겁니다.



※ 2022년 11월 16일 게시글(링크)은 소설이 인간과 동물을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1월 16일 게시글은 소설에게 커다란 가치를 부여합니다. 소설은 커다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기준으로서 소설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이 타당하다고 해도, 아무리 소설이 커다란 가치를 얻는다고 해도, 소설보다 육체는 훨씬 근본적인 기준일 겁니다. 심지어 소설보다 육체는 훨씬 '원초적인 기준'일 수조차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은 원초적인 신화입니다. 생물 다양성은 어머니 자연에 속합니다. 인간 역시 어머니 자연에 속합니다. 물질대사는 어머니 자연을 뒷받침합니다.

 

풍요로운 자연이 먹거리들을 선사하기 때문에, 육체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연, 먹거리, 영양분, 육체처럼, 어머니 자연과 물질대사는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어머니 자연과 소설이 깊은 관계를 맺나요? 어머니 자연과 문화·예술이 깊은 관계를 맺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을 강조하기 위해 고대 인류는 어머니 자연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예술을 강조하기 위해 고대 인류는 어머니 자연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 먹거리, 영양분, 육체를 강조하기 위해 고대 인류는 어머니 자연을 상상했습니다. 소설은 커다란 가치를 얻을 수 있으나, 자연보다 소설은 원초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 사진 <… Mushroom Soup> 출처: Anna Pyshniuk,
https://www.pexels.com/photo/mushroom-soup-4103375/

※ 사진 <Assorted Vegetables> 출처: Viktoria Slowikowska,
https://www.pexels.com/photo/assorted-vegetables-5677794/

※ 사진 <Herd of Cattle …> 출처: Helena Lopes,
https://www.pexels.com/photo/herd-of-cattle-in-daytime-841303/

※ 사진 <… Grapes on Vine> 출처: Miriam Fischer,
https://www.pexels.com/photo/close-up-of-white-grapes-on-vine-993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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