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에서 압도적인 암울함 본문
[1944년, 폴란드, 바르샤바. 파쇼주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한다면, 이런 상황은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SF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아주 용감하고 똑똑한 '남자' 발명가가 있습니다. 똑똑한 남자 발명가에게는 아름답고 선한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맙소사! 어느 날, 못된 화성인은 여자 친구를 납치합니다. 화성 외계인은 아주 못생겼고, 야만적이고, 시뻘겋습니다. 화성이 붉은 행성이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못된 화성인을 빨갱이라고 부릅니다. 여자 친구를 구하고 사악한 빨갱이 외계인을 물리치기 위해 아주 용감하고 똑똑한 발명가는 로봇 부대를 만듭니다. 발명가와 로봇 부대는 화성으로 날아가고, 빨갱이 외계인을 물리치고, 여자 친구를 구합니다.
보상으로서 여자는 남자 발명가에게 뽀뽀합니다. 이렇게 소설은 마무리를 짓습니다. 모든 것은 행복하게 끝납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분명히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분명히 외계인과 로봇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위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 'SF' 소설이 그저 공주를 구하는 왕자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또 다른 독자들은 SF 소설이 전복적이어야 함에도 이 'SF' 소설이 수구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이런 사례에서 소재는 장르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소재보다 다른 것들을 이용해 창작물들을 분류하기 원합니다.
비디오 게임 <바르샤바 Warsaw>는 전술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분위기, 그림체, 화면 구성, 진행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바르샤바>가 <다키스트 던전>을 모방했다고 평가합니다. 이건 <바르샤바>가 <다키스트 던전>을 표절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분위기, 그림체, 화면 구성, 진행 방식이 비슷하다고 해도, 이런 유사성들은 반드시 표절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것들이 반드시 표절이라고 판단한다면, 장르 창작물들은 성장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처럼, 소설 <붉은 화성>은 평등한 사회 혁명과 자연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해. 소설 <붉은 화성>은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를 표절했을 거야."
이건 너무 무리한 주장입니다. 비디오 게임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화성 테라포밍을 묘사하나, 그렇다고 해도 <서바이빙 마스>는 <붉은 화성>을 표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붉은 화성>이 가장 유명한 화성 테라포밍 소설이라고 해도, 킴 스탠리 로빈슨은 <서바이빙 마스>를 고소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표절보다 모방, 계승입니다. 소설 <허랜드>와 소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는 똑같이 여자들의 공동체와 세 남자 방문자들이 있습니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가 <허랜드>를 표절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모방, 계승입니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허랜드>를 계승합니다. <붉은 화성>은 <에코토피아 뉴스>를 계승합니다.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붉은 화성>을 계승합니다. 이런 모방들, 계승들처럼, <바르샤바>는 <다키스트 던전>을 모방하고 계승합니다.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 사이에 유사성들이 있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표절보다 모방과 계승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장르 창작물들 안에 많은 모방들과 계승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장르 창작물들이 비슷한 소재들을 다르게 가공하고 이용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시선들과 다양한 사고 방식들과 다양한 세계관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비슷한 소재들을 다르게 가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방들과 계승들을 이용해 얼마나 이 세상에 다양한 사고 방식들이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이 비슷하다고 해도, <다키스트 던전>은 우주적 공포, 고딕 호러입니다. 위대한 악마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고 온갖 괴물들과 악마들을 양성합니다. 모험가 일행은 던전들을 탐험하고, 악마들을 물리치고, 보물들을 찾고, 영지를 확장해야 합니다. 반면, <바르샤바>는 2차 세계 대전과 동구권 레지스탕스를 이야기합니다. 1944년 폴란드 도시에서 레지스탕스는 보급품들을 찾고, 파쇼주의 군대를 물리치고, 안전 가옥을 운영해야 합니다.
아무리 전쟁이 끔찍하다고 해도, 우주적 공포와 2차 세계 대전은 다릅니다. 아무리 2차 세계 대전이 20세기 최대 비극이었다고 해도, 파쇼주의 군대는 악마들이 아닙니다. 파쇼주의 군대가 동구권을 침략했다고 해도, 폴란드 도시는 위험한 던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르샤바>는 <다키스트 던전>을 모방하고 폴란드 도시를 위험한 던전으로 바꿉니다. <바르샤바>는 어떻게 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가 우주적 공포와 던전 모험가 일행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키스트 던전>(과 이 게임의 형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압도적인 암울함은 우주적 공포가 되나, 누군가에게 이건 파쇼주의 점령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악한 악마들이 영지를 위협하고 파쇼주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한다면, 양쪽은 똑같이 비극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길 겁니다. 외계 악마보다 파쇼주의와 네오콘이 훨씬 현실적인 위험이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다키스트 던전>보다 <바르샤바>가 훨씬 암울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현실에는 외계 악마들이 없습니다. 어쩌면 언젠가 인류 문명은 차원 관문을 열고 외계 존재들을 부를지 모릅니다. 차원 관문 너머에서 악마들은 지구를 침략할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을 구하기 위해 둠가이는 활약해야 할지 모르나, 아직 인류 문명은 외계 악마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둠가이와 존나게 커다란 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딕 호러 판타지 게임에는 악마들과 언데드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우주 항해 시대로 이어질 수 있나요?]
하지만 현실에는 파쇼주의와 네오콘이 있습니다. 이미 20세기에서 파쇼주의는 가장 거대한 비극을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네오콘은 21세기 최대 비극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20세기 중반 병기들보다 21세기 초반 병기들이 훨씬 파괴적이기 때문에, 네오콘이 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다면, 2차 세계 대전보다 3차 세계 대전은 훨씬 어마어마한 악몽이 될 겁니다. 어쩌면 3차 세계 대전은 정말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미 20세기는 서구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이어지고 파쇼주의에 들러붙는다고 보여줬습니다. 네오콘은 똑같은 전철을 밟을지 모릅니다. 현실에 외계 악마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둠가이와 존나게 커다란 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둠가이가 존나게 커다란 총을 빵빵 쏜다고 해도, 둠가이는 미쳐버린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치지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는 존나게 커다란 총보다 해방과 저항 철학들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와 여러 해방 철학들은 목소리들을 높여야 할 겁니다. 이렇게 파쇼주의와 네오콘이 현실적인 위험이기 때문에, 비록 <바르샤바>가 <다키스트 던전>을 모방했다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키스트 던전>보다 <바르샤바>가 훨씬 무섭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쇼주의 침략을 무서운 악마들에 비유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건 아주 고전적인 비유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무서운 침략자를 악마화했습니다.
침략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침략자는 악마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침략자가 인간보다 악마라고 과장했습니다. 남한 사회 역시 북한을 악마화합니다. 남한 사회가 북한이 침략자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북한에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남한 사회는 미국을 악마화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식민지 수탈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북한보다 미국 자본주의는 훨씬 위험한 악마일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침략자를 악마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배경 무대가 2차 세계 대전과 위험한 악마 소굴임에도,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은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겁니다.
만약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이 이런 분위기와 형식을 이용한다면, 이건 다소 어색할지 모릅니다. 이게 어색하지 않다고 해도, <바르샤바>와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형식이 똑같다고 해도, 분위기는 다를 겁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가 지옥 악마들과 무서운 언데드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과 <다키스트 던전>이 똑같이 '판타지' 게임이라고 해도, <다키스트 던전>은 '2차 세계 대전' 게임 <바르샤바>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여기에서 지옥 악마와 언데드라는 소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재는 분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소재와 형식과 장르가 똑같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분류 기준으로 장르 창작물들을 묶을 수 있습니다.
<아이스윈드 데일>은 판타지 게임입니다. <아이스윈드 데일>에는 드워프, 엘프, 하플링, 마법사, 드루이드, 드래곤, 언데드 같은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에는 중세 판타지 요소들이 없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가 아닙니다. <다키스트 던전>이 완전한 근대가 아니라고 해도, 가끔 여기에는 (장원과 부들 수풀 속의 악어처럼) 어느 정도 근대적인 풍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스윈드 데일>과 <다키스트 던전>은 모두 판타지입니다. 양쪽 모두 신화, 전설, 민담을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아이스윈드 데일>과 <다키스트 던전>에는 똑같이 무시무시한 언데드들이 있습니다.
반면, <바르샤바>는 판타지가 아닙니다. 이 게임은 신화, 전설, 민담보다 2차 세계 대전을 이용합니다. 여기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없습니다. 많은 게임들이 '좀비 나치'를 이용하는 것처럼, <바르샤바>에 좀비 나치들이 있다고 해도, 이건 주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겁니다. <바르샤바>에 언데드가 없기 때문에, <다키스트 던전>은 <바르샤바>보다 <아이스윈드 데일>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아이스윈드 데일>은 암울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아이스윈드 데일>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다고 해도, 이건 압도적인 공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다키스트 던전>에는 압도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바르샤바>에도 압도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아이스윈드 데일>은 영웅들이 대륙을 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다키스트 던전>과 <바르샤바>는 화려하고 찬란한 영광을 떠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르샤바>에 언데드가 없다고 해도, 압도적인 공포가 분류 기준이 된다면, <다키스트 던전>은 <아이스윈드 데일>보다 <바르샤바>에 가까울 겁니다. 만약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압도적인 공포를 던전 탐험에 집어넣는다면, 이건 <다키스트 던전>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신나는 던전 탐험에 가깝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 역시 우주적인 공포 게임을 만들 수 있으나,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우주적인 공포보다 신나는 던전 탐험과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스윈드 데일>보다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은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이스윈드 데일>이 <다키스트 던전>과 똑같이 형식을 이용한다고 해도, 만약 분위기 묘사(압도적인 암울함)가 분류 기준이 된다면, <아이스윈드 데일>은 <바르샤바>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분류 기준이 장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사이언스 픽션 역시 <다키스트 던전> 및 <바르샤바>와 비슷해질 수 있을 겁니다. SF 게임이 지옥 악마와 언데드와 파쇼주의 군대를 떠들지 않는다고 해도, 핵심 소재가 비슷하지 않다고 해도, 만약 SF 게임이 압도적인 암울함을 강조한다면, 이런 SF 게임과 <바르샤바>와 <다키스트 던전>은 비슷해질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하위 장르로서 디스토피아 및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있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장르와 소재보다 분위기와 형식이 중요하다고 증명합니다. 소재는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우주적인 공포, 압도적인 암울함을 풍길 수 있습니다. 파멜라 사전트가 쓴 단편 소설 <공포>는 정말 공포를 말합니다. 소설 <시녀 이야기>에서 가부장적인 디스토피아는 압도적인 암울함입니다. 파쇼주의가 악마가 되고 네오콘이 악마가 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는 악마가 됩니다. 단편 소설 <공포>가 악마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공포>에서 가부장 문화와 악마는 다르지 않습니다.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처럼, 여자들에게 가부장적인 사회는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면 소설 <타임 머신>처럼, 계급 분화와 기이한 환경 역시 압도적인 암울함이 될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Deep Sky Derelicts>는 디스토피아 계급 분화를 우주 항해 시대에 집어넣고 우주적인 공포를 형성합니다. 미천한 계급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적인 공포에 직면해야 합니다.
<Deep Sky Derelicts>는 우주 항해와 외계 괴물들과 미래 계급 분화를 이야기하나, 전반적인 분위기와 형식은 <다키스트 던전>과 거의 똑같습니다. <Deep Sky Derelicts> 역시 모방과 계승 사례에 속합니다. 비록 <다키스트 던전>이 계급 분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Deep Sky Derelicts>와 <다키스트 던전>은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있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판타지, 고딕 호러이고, <Deep Sky Derelicts>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바르샤바>는 2차 세계 대전 시대극이나, 고딕 호러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과 2차 세계 대전 시대극은 비슷한 분위기와 형식을 이용합니다. 여기에서 소재들(우주선, 언데드, 계급 분화, 파쇼주의, 시가전, 기타 등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키스트 던전>과 <Deep Sky Derelicts>와 <바르샤바>는 어떻게 창작물이 장르를 벗어나고 모방하고 계승하는지 증명합니다.
아무리 '장르'가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분류 기준이 아닙니다. 장르를 구성하기 위한 중심 소재는 아주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분류 기준이나, 여러 상황들에서 사람들은 중심 소재보다 다른 것들을 이용해 창작물들을 묶기 원합니다. 아무리 <아이스윈드 데일>과 <다키스트 던전>에서 똑같이 언데드들이 우글거린다고 해도, <Deep Sky Derelicts>와 달리, <바르샤바>에서 미천한 계급이 위험한 우주선 속을 들락거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과 저것은 달라질 수 있고, 이것과 저것은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중심 소재는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