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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미래를 이야기함에도 SF 소설은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미래를 이야기함에도 SF 소설은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OneTiger 2018. 11. 14. 17:31

가끔 SF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제목에 연도를 집어넣습니다. 가령, 소설 <뒤돌아보며>는 '2000년에서 1887년을 뒤돌아보며'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19세기 사람이나, 주된 시간적인 배경은 2000년이죠. 소설 <2001 우주 대장정>은 2001년 미래 우주 항해를 이야기합니다. <2020 우주의 원더 키디> 같은 애니메이션 역시 제목에 연도를 집어넣었습니다. 이런 미래적인 제목들과 달리, 비디오 게임 <오더 1886>은 과거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오더 1886>이 가리키는 1886년은 우리가 아는 구닥다리 과거가 아닙니다. <오더 1886>은 스팀펑크 장르이고 거대한 비행선과 각종 첨단 무기들을 자랑합니다. 1886년이라는 연도는 과거를 가리키는 동시에 이 과거가 미래적이라고 이야기하죠.


SF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이 연도를 집어넣는 이유는 시대상이 중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시대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중세, 현대가 서로 다른 것처럼, 미래는 다를 겁니다. 미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으나, 분명히 미래는 현재와 다를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제까지 시대가 바뀐 것처럼 미래가 바뀐다고 전망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어떻게 미래가 바뀌는지 묘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래 시점을 포착해야 합니다.



<뒤돌아보며>는 1888년 소설입니다. 에드워드 벨라미는 19세기 작가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에드워드 벨라미는 19세기가 아니라 2000년 21세기를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에드워드 벨라미는 제목에 2000년이라는 연도를 집어넣었겠죠. <2001 우주 대장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68년에 아서 클라크는 이 소설을 출판했습니다. 에드워드 벨라미는 2000년이 사회주의 유토피아라고 묘사했고, 아서 클라크는 2001년이 우주 항해 시대라고 묘사했죠.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2000년과 2001년은 모두 과거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작가 에드워드 벨라미에게 2000년은 정체 불명의 미래였습니다. 1968년에 소설을 출판했을 때, 아서 클라크에게 2001년은 정체 불명의 미래였습니다.


에드워드 벨라미와 아서 클라크는 미래를 알지 못했으나, 분명히 미래가 바뀌기 때문에 두 작가는 미래를 상정해야 했습니다. 비록 2000년에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나타나지 않았고, 2001년에 우주 항해 시대는 개막하지 않았으나, 다행히 사이언스 픽션들은 점쟁이들이 아닙니다. 미래가 바뀔 때, 그런 변화는 격차를 낳을 테고, 그런 격차를 목격할 때, SF 독자들은 아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죠. 미래가 틀리다고 해도, 2001년이 우주 항해 시대를 개막하지 않는다고 해도, 1968년 독자들은 <우주 대장정>에게서 아찔함을 느꼈을 겁니다. 2001년이라는 제목은 예언이 아닙니다. 2001년이라는 제목은 아찔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1886이라는 제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더 1886>은 진짜 1886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진짜 1886년 유럽에 거대하고 호화로운 비행선과 첨단 광학 소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더 1886>은 1886년이라는 연도를 이용해 진짜 1886년과 격차를 낳습니다. 스팀펑크 1886년과 진짜 1886년은 격차를 낳습니다. 1886년은 한창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였고, 과학과 종교가 부딪히는 시기였고, 논리적인 철학과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교차하는 시기였습니다. 전반적으로 19세기 후반 유럽은 꽤나 과도기적이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과학적인 추론과 셜록 홈즈를 이야기했으나 동시에 요정들과 강령술을 믿었습니다. 이건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 설계를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죠.


19세기 후반 유럽에는 이런 과도기적인 것들이 존재했고, <오더 1886>은 스팀펑크를 이용해 그걸 과장합니다. 사실 <오더 1886> 이외에 숱한 스팀펑크들은 과도기에서 재미를 뽑아내죠. 과도기는 뭔가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종교가 과학으로 바뀌는 것처럼, 과학이 종교를 밀어내는 것처럼, 과도기는 뭔가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뭔가가 바뀔 때, 우리는 격차를 목격하고 아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왕성한 산업 문명이었고, <오더 1886>은 그런 왕성한 산업 문명이 거대하고 호화로운 비행선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비록 진짜 거대한 비행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왕성한 산업 문명이 있었기 때문에, <오더 1886>은 격차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2001 우주 대장정>과 <오더 1886>이 똑같이 격차를 만든다고 해도, <2001 우주 대장정>은 훨씬 미래 지향적입니다. <오더 1886>은 어떻게 산업 문명이 시작했는지 보여줍니다. 이 게임은 한창 유럽 산업 문명이 발달하는 시기를 뒤돌아보고 과장합니다. 이런 과장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산업 문명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죠. 거대한 비행선과 첨단 장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1886년과 21세기를 서로 연결하고 어떻게 산업 문명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과 산업은 19세기 유럽 산업 문명에서 비롯했죠. 그걸 강조하기 위해 <오더 1886>은 19세기(과학과 산업이 비롯하는 시대)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오더 1886>은 그저 과거로 돌아갈 뿐이고 미래로 나가지 않습니다. <오더 1886>은 미래가 바뀐다고 전망하지 않아요. 이 게임은 또 다른 과거를 보여주고 미래적인 거울을 이용해 시대적인 변화를 가늠합니다. 그래서 <오더 1886>은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오더 1886>은 직접 미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반면,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2001 우주 대장정>은 2001년 우주 항해를 보여주죠. 다른 수많은 하드 SF 소설들처럼 <우주 대장정>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한 가지를 주의해야 할 겁니다. <우주 대장정>이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서술 시제 역시 미래일까요.



아니,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2001 우주 대장정>은 미래 서술 시제를 쓰지 않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데이빗 보우먼이 뭔가를 '했다'고 말합니다. 아서 클라크는 데이빗 보우먼이 뭔가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했다'와 '한다'는 다릅니다. '했다'는 과거 서술 시제이고, '한다'는 현재 서술 시제입니다. 하지만 <2001 우주 대장정>은 미래 이야기입니다. 1968년 아서 클라크에게 2001년은 미래였습니다. 왜 미래를 이야기했음에도, 아서 클라크가 미래 서술 시제가 아니라 과거 서술 시제를 썼을까요? 2001년이 미래라면, 아서 클라크는 데이빗 보우먼이 뭔가를 '할 것이다'라고 썼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런 미래 서술 시제들은 많지 않습니다. 과거 서술 시제들은 대부분 서술 문장들을 차지하죠.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왜 미래를 이야기했음에도, 아서 클라크가 과거 서술 시제를 썼을까요? 이건 SF 소설이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SF 소설은 '근대적인 소설'입니다. 그리고 근대적인 소설들은 과거 서술 시제를 씁니다. 이건 보편적인 원칙이고, SF 작가들은 그런 원칙을 따릅니다. 아서 클라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2001년 미래를 이야기했음에도, (다른 근대적인 소설 작가들처럼) 아서 클라크는 과거 서술 시제를 썼습니다.



대부분 (근대적인) 소설들은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넵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과거입니다. 작가는 그걸 독자에게 건넵니다. 작가는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목격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미 이야기를 압니다. 작가는 그걸 주관적으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1인칭 화자 소설들은 훨씬 그렇습니다. 수필들 역시 비슷해요. 윤오영이 쓴 <방망이 깎던 노인>에서 1인칭 화자는 과거 시제를 서술하죠. 아예 첫문장은 "벌써 40여 년 전이다."입니다. <은전 한 닢>에서 피천득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나, 나중에 대놓고 과거 시제를 섞죠.


다른 문학들은 다릅니다. 희곡에서 지문들은 현재 시제입니다.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마리우스는 로봇 숫자들을 고민하는 도민에게 명함을 건넵니다. 그때 지문 서술은 현재 시제입니다. 카렐 차페크는 마리우스가 도민에게 명함을 '건넸다'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카렐 차페크는 마리우스가 도민에게 명함을 '건넨다'라고 썼죠. 노래 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 2016년에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노래 가사 역시 문학이 될 수 있겠죠. 트와이스 노래 <Dance with the night away>에서 도입부를 열 때, 사나는 우아하게 이런 가사를 부릅니다. "파도 소리를 틀고 춤을 추는 이 순간 이 느낌 정말 딱이야." 이 순간. 이 느낌. 정말 딱이야. 어디를 본다고 해도, 이건 과거 시제가 아니죠. 우아한 사나 파트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Dance with the night away>는 현재 시제를 서술합니다. 소설은 이런 노래와 달라요.



이건 소설에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설명은 서술 시제를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들이 과거 서술 시제를 쓸 때, 거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작가들은 현재 서술 시제를 씁니다. <와인드업 걸>이나 <인간 종말 리포트>처럼 어떤 소설들은 현재 서술 시제를 사용하죠. 중요한 것은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과거 서술 시제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SF 소설들 역시 과거 서술 시제에서 자유롭지 않죠. SF 연극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아요. 연극은 과거나 미래를 공연하지 않습니다. 연극은 현재 진행형 순간을 공연합니다.


사실 연극은 과거를 공연하지 못합니다. <로섬의 만능 로봇>처럼 무대 위에서 배우는 오직 현재 순간을 연기할 뿐이고 시제를 옮기지 못하죠. 연극은 '했다'와 '한다'와 '할 것이다'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반면, 소설은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미래를 이야기함에도 SF 소설들은 과거 서술 시제를 버리지 못하죠. 시점은 미래이나, 이야기는 과거입니다. 이건 모순이죠. 하지만 SF 소설들은 이런 모순을 허용해야 합니다. 어쩌면 어떤 SF 작가는 미래에 알맞는 미래 서술 시제로 소설을 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무슨 형태일지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그런 소설을 읽기는 절대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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