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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와 SF 소설 비판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SF 소설 비판

OneTiger 2018. 12. 3. 17:29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이른바 참여 문학을 주장하는 서적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격렬하게 물었던 사람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작가를 지식인이라는 범주에 집어넣고 문학(소설)이 사회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참여 문학 이론은 많은 공격들을 받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순수한 문학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장하죠. 장 폴 사르트르는 거기에 반기를 들고 문학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왜 참여 문학이 논리적으로 중요한지 말하기 원했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그런 결과입니다. 이 책으로 장 폴 사르트르가 정말 참여 문학을 제대로 전개했는지 그건 다소 모호합니다. 이 책에는 모순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역시 그런 모순들을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시가 참여 문학이 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소설(산문)과 달리, 시에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운율이죠. 그래서 시는 단어들을 이용해 내용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운율을 살리기 위해 시는 단어 그 자체를 노래합니다. 내용이 없는 시는 참여와 저항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저항 시인들에게 이런 평가는 가혹할지 모릅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한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시를 비판하는 부분을 읽는다면, 뭐라고 파블로 네루다가 생각할까요? 시가 참여 문학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너무 극단적일지 모릅니다. 이육사처럼 저항과 투쟁과 강철 같은 의지를 부르짖는 시인에게 이런 평가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죠. 분명히 그 자체로서 <무지개>나 <절정> 같은 시는 저항과 투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절정>은 그저 매서운 바람과 거기에 맞서는 의지를 노래할 뿐이죠. 여기에는 특별히 억압적인 사회 구조나 그것을 분석하는 시각이 없습니다.


<절정>이 여전히 수많은 좌파들에게 소중한 영감이 된다고 해도, <절정>은 참여 문학에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참여 문학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절정>에게서 용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절정>에게 아무 가치가 없을까요. 2차 세계 대전 당시, 장 폴 사르트르는 저항과 투쟁 시기를 거쳤고 저항 시인들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항 시인들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시를 다소 폄훼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시가 저항이 되지 못한다면, 노래 역시 저항이 되지 못할 겁니다. 존 바에즈 같은 민중 가수는 저항이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내용들이 많아요. 누군가는 장 폴 사르트르가 문학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몇몇 부분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꽤나 날카로운 지적들을 보여줍니다. 후반부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어떻게 작가라는 위상이 바뀌었고 왜 작가가 어용 지식인이 되는지 이야기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아직 자리를 잡기 전에, 부르주아 계급이 아직 권력을 잡기 전에, 그런 상황에서 작가라는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자유로운 개인을 이야기할 때, 자유로운 개인들이 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노력할 수 있었죠. 관습적인 신분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작가는 떠오르는 태양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부르주아 계급은 핵심 권력자가 아니었고, 작가는 아무 가책 없이 자유로운 개인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시대 작가를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부르주아 계급은 가장 강력한 지배 계급이 됩니다. 더 이상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는 핵심적인 권력이 없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비단 가장 강력한 지배 계급일 뿐만 아니라 가장 민중을 가혹하게 쥐어짜는 지배 계급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로운 개인, 순수한 개인, 합리적인 개인을 강조합니다. 1970년대 신자유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적인 관계를 박살내고 모든 것을 자유로운 개인들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게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좋아하겠어요.



자본주의는 관습적인 신분 제도를 없애고 거기에 개인의 사적 소유를 집어넣었습니다. 개인은 자유롭게 뭔가를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정말 순수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존재하나요? 그건 허상입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우리는 수많은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습니다. 사실 그런 사회적인 관계들이 없다면, 현대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가 계급은 어마어마한 부자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혼자 그런 부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니죠. 노동자들에게서 노동력들을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자유롭고 순수한 개인을 외칠 때, 이런 사회적인 관계들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로운 개인을 사랑합니다. 작가가 자유로운 개인을 노래할 때, 부르주아 계급은 그걸 선호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계급 구조가 없습니다. 모든 개인은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게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다고 해도, 개인들은 사회를 탓하지 못합니다. 개인들은 자유로운 개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건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은폐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작가가 어용 지식인이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비단 자유로운 개인만 어용 문학이 아니었습니다. 허무 역시 어용 문학이었죠. 여러 작가들은 세상이 허무하고 부질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저 세상이 허무하다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들은 왜 세상에 빈곤과 오염이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고통들을 목격하나, 왜 고통들이 나타나는지 근본적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여러 작가들은 세상에 고통들이 있고 세상이 살기 힘들고 그래서 세상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가립니다. 자유로운 개인보다 허무는 훨씬 위험한 어용 문학일지 모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로운 개인과 허무가 어용 문학이 된다고 비판하고 작가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이렇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작가들을 비판합니다. 이 책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유럽 주류 문학들을 상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오직 유럽 주류 문학들을 향해야 할까요? 장르 소설들은? SF 작가들은? SF 소설들이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문학입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소설을 비판한다면, SF 소설 역시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SF 작가들 역시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이야기합니다. SF 작가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허무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 SF 작가들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을 이용해 이른바 전체주의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뭘까요?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하늘에서 전체주의가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았나요?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전체주의를 비판할 때,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나 중국 인민 공사를 부정적으로 간주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인민 공사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는 온갖 수탈들과 학살들과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수탈들과 학살들과 오염들 속에서,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인민 공사는 나타났죠.


사실 <우리들>을 비롯해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전체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19세기~20세기 초기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자본주의 비극을 묘사했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른바 전체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먼저 나타났고, 이른바 전체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어마어마한 범죄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말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먼저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제대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나요?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생산 수단의 개인적인 소유와 임금 노동 제도를 비판하나요? 그건 꽤나 회의적입니다.



여기 게시글들에서 저는 어떻게 SF 소설들이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는지 여러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SF 작가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SF 소설들이 미래를 전망하기 때문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SF 작가들을 훨씬 강렬하게 비판해야 할 겁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사이언스 픽션을 제대로 몰랐을 겁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생체 우주선이나 돔 생태계나 행성 공학을 알았겠어요. 생체 우주선을 논의하는 장 폴 사르트르…. 어, 이건 다소 어색한 장면입니다. 설사 사르트르가 SF 소설들을 의식했다고 해도, 사르트르는 SF 소설들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았겠죠. 윌리엄 모리스가 자신을 SF 작가라고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장 폴 사르트르 역시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SF 소설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문학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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