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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문학과 혁명>의 희망, <이성적 낙관주의자>의 망상 본문

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문학과 혁명>의 희망, <이성적 낙관주의자>의 망상

OneTiger 2019. 5. 19. 19:55

"몽블랑 산의 봉우리들과 대서양의 해저에 노동자 회관들을 건설할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더 찬란하게, 더 강렬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문학과 혁명>에서 레프 트로츠키는 말했습니다. 이 문구는 미래 공산주의를 위대하게 예찬합니다. 심지어 레프 트로츠키는 대서양 해저 노동자 회관을 운운하고 해저 문명을 예상합니다. 이런 전망은 <해저 2만리>와 비슷하고 꽤나 사이언스 픽션 같습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아직 해저 문명을 만들지 못했거나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류 문명이 만들지 못했는지 아니면 만들지 않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인류 문명에게 아직 해저 문명을 만들기 위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는 인류 문명에게 해저 문명을 만들기 위한 능력이 있음에도 다른 제약들 때문에 아직 인류 문명이 해저 문명을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가 옳든, 레프 트로츠키가 해저 회관을 운운했을 때, 레프 트로츠키는 사이언스 픽션을 전망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문학과 혁명>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레프 트로츠키는 SF 작가가 아닙니다. 미래 공산주의에 힘을 싣기 위해 트로츠키는 그저 해저 문명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레프 트로츠키는 비단 해저 문명만 아니라 바이오펑크 분위기를 살짝 풍깁니다. "해방된 인간은 신체 기관들을 더욱 원활하고 조화롭게 작동시키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문구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문학과 혁명>은 유전 공학과 트랜스휴머니즘보다 의지가 굳건한 초인을 예찬합니다. 트로츠키가 <문학과 혁명>을 썼을 때, 트로츠키는 유전 공학보다 초인적인 의지를 상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첨단 과학 기술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레프 트로츠키는 유전 공학과 트랜스휴머니즘을 별로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유전 공학이 더 나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레프 트로츠키는 유전 공학을 환영할 겁니다. 미래 인류가 유전 공학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해저 문명을 이룩한다면, 그건 정말 사이언스 픽션일 겁니다. 레프 트로츠키는 사이언스 픽션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나,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해 공산주의자들은 저도 모르게 SF 작가가 되곤 합니다. 공산주의는 미래입니다. 아직 아무도 공산주의 사회를 겪은 적이 없고, 공산주의 세상이 무슨 세상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공산주의자들은 현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세계화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산주의를 이야기할 때,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해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추상적인) 미래를 전망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래를 전망할 때, 공산주의자들은 미래가 밝을 거라고 말합니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하고, 자본주의는 무너질 테고, 공산주의 세상은 유토피아를 만들 겁니다. 그게 무슨 모습일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선형적인 진보 역사 관념은 멋진 대서양 회관을 꿈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과 혁명>이 순진하게 미래를 전망한다고 지적할 겁니다. <문학과 혁명>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소비에트 연방은 멋진 대서양 회관을 짓지 못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아직 대서양 해저 회관을 짓지 못합니다.


SF 소설들은 외계 개척지들을 떠들 수 있으나,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은 (외계 행성에는 고사하고) 아직 바닷속에 주거지를 짓지 못했습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생활 영역을 넓힌다면, 외계 주거지보다 해저 주거지는 훨씬 먼저 나타나야 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해저가 가혹하다고 해도, 우주보다 해저는 훨씬 가깝습니다. 화성에서 무인 탐사 로봇은 생명체를 찾지 못했으나, 심해에서 무인 잠수정은 생명체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계 행성에 돔 도시를 짓기 전에 미래 문명은 해저에 돔 도시를 지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외계 행성에 진출하든, 해저에 진출하든, 그건 아직 머나먼 이야기 같습니다.



<문학과 혁명>을 썼을 때, 레프 트로츠키가 이런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레프 트로츠키가 오직 선형적인 역사 진보만을 믿었을까요? 왕년의 숱한 공산주의자들처럼, 분명히 레프 트로츠키에게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트로츠키가 "인생은 아름답다!"고 마지막으로 외쳤을 때까지, 변증법적 유물론자이고 전투적인 무신론자이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레프 트로츠키는 선형적인 진보 역사 관념을 버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트로츠키는 아우토반처럼 무조건 역사가 앞으로 쭉쭉 나갈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적어로 레프 트로츠키는 상당한 굴곡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트로츠키가 그렇지 않았다면,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을 쓰지 않았을 테고 별로 영향력이 없는 제4차 인터내셔널 결성에 매달리지 않았을 겁니다. 유럽 권력자들이 파쇼주의에 동조하는 동안, 트로츠키는 세계 대전이 터질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세계 대전이 터진다면, 인류 문명은 평화롭게 멋진 해저 문명을 이룩하지 못할 겁니다. <문학과 혁명>이 다소 선형적인 진보 역사 관념을 드러낸다고 해도, 레프 트로츠키는 순진하게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는 현실 자본주의에 계속 저항해야 한다'고 <독일 이데올로기>가 주장한 것처럼, 레프 트로츠키 역시 현실에 저항하기 원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희망을 미래와 연결합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때, 사람들은 이미 희망이 존재한다고 상정하지 않습니다. 미래에서 희망이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희망을 품습니다. 희망은 '미래가 나아진다'는 의미를 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는 어떤 불만과 갈등과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크든 작든, 현실에는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는 그런 문제가 사라질 테고, 이건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희망이 다가오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희망이 다가올까요?


아무 조건 없이, 희망이 다가올까요? 분명히 역사는 미래로 흘러갑니다. 미래가 도달한다면, 희망 역시 미래와 함께 다가올까요? 미래와 함께 희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까요? 만약 이렇게 사람들이 희망을 기대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현실을 유지하기 바랄 뿐일 겁니다. 미래가 이런 희망과 함께 나타날 때, 미래는 그저 현실의 연장선에 불과할 겁니다. 매트 리들리가 쓴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미래가 그저 현실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당연히 현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미래로 흐를 때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문제는 <이성적 낙관주의자>가 초월적인 시공간을 맹신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숱한 비극들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기계적으로 비극들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왜 비극들이 생기는지 파헤치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저 비극들이 많고 자본주의가 비극들을 해소할 거라고 말할 뿐입니다. 당연히 <이성적 낙관주의>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숱한 비극들이 자본주의에서 파생했다고 분석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에는 오직 초월적인 시공간만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유기적으로 과거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 발달을 뒷받침했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계속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는 이런 폭력과 수탈의 일환입니다. 기후 변화는 그저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재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적 낙관주의>는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건 희망입니다. <문학과 혁명>처럼, <이성적 낙관주의>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레프 트로츠키와 매트 리들리가 똑같이 희망을 이야기할까요? <문학과 혁명>의 대서양 노동자 회관과 <이성적 낙관주의자>의 집단 지성이 똑같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경제가 팽창할 때 소득 격차가 필수적으로 벌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소수 권력이 생산 수단을 차지하고 경제 공황을 터뜨린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반면, 레프 트로츠키는 그걸 지적합니다.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해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은 그걸 지적합니다. 레프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과 다른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다르게 경제 공황을 분석한다고 해도, 그들은 경제가 팽창할 때 소득 격차가 필수적으로 벌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중들은 이런 현실에 저항해야 합니다. 레프 트로츠키가 희망을 이야기했을 때, 트로츠키는 이걸 상정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이성적 낙관주의자>와 크게 다릅니다. 사실 <문학과 혁명>과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대립합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는 자본 권력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나, 반면, <문학과 혁명>은 과거에서 쓰라린 착취와 수탈이 이어졌다고 인식합니다. 적어도 레프 트로츠키는 과거에 이미 착취가 있었고 그게 자본주의를 뒷받침했다고 인식합니다. <문학과 혁명>은 순진하게 해저 노동자 회관을 꿈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문학과 혁명>이 순진한 진보라고 해도, <이성적 낙관주의자> 같은 권력의 앞잡이보다 해저 노동자 회관은 훨씬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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