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전복적이고 비주류적인 시선 본문
"주인님이 은둔을 끝내신다면, 저는 주인님과 침팬지를 짝지을 수 있어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이렇게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말합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초반부에서 브루스 웨인은 은둔하는 중이었습니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너무 배트맨을 괴롭혔기 때문에,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활동을 그만두고 은둔하는 중이었습니다.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브루스 웨인이 다시 배트맨이 되기 원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은둔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어느 날 브루스 웨인은 어떤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고, 마침내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은둔을 끝낼 거라고 예상합니다.
알프레드는 약간 비아냥거리며 브루스를 바깥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브루스와 침팬지를 짝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침팬지는 모욕과 조롱에 가깝습니다. 인간처럼 침팬지는 영장류이나, 우리 인간은 침팬지가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삼모사 같은 사례처럼, 원숭이를 비롯해 영장류는 인간과 비슷하나 인간보다 열등합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 인간은 원숭이를 모욕과 조롱에 이용합니다. 만약 외계인이 우리 인간을 원숭이에 비유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런 비유가 모욕이라고 느낄 겁니다.
만화 <미스터 손>과 <날아라 슈퍼 보드>에서 미스터 손은 원숭이라는 호칭을 싫어합니다. 누군가가 미스터 손을 원숭이라고 부른다면, 미스터 손은 "원…, 원숭이?!"라고 외치며 13,500근짜리 쌍절곤을 휘두를 겁니다. 미스터 손처럼, 우리 인간에게 원숭이는 모욕입니다. 그래서 피에르 불은 소설 <혹성 탈출>을 썼을 겁니다. 소설 <혹성 탈출>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집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다른 영장류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나, 소설 속에서 똑똑한 영장류들은 인류를 지배합니다. 인류는 야생 동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나, 똑똑한 영장류들은 소설 주인공을 비웃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나, 소설 <혹성 탈출>에서 소설 주인공은 비참하게 추락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왕자와 거지가 바뀌는 것처럼, 순식간에 소설 주인공은 이성적인 인간에서 열등한 야생 동물이 됩니다. 소설 <혹성 탈출>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 자리에서 멀리 쫓아내고 독자의 뒷통수를 강렬하게 때립니다. 비단 <혹성 탈출>만 아니라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집고 독자의 뒷통수를 때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디스토피아 소설보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소설 <킨>은 훨씬 무섭습니다. 넘쳐나는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감히 <킨>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사실 <킨>은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타임 슬립으로 흑인 노예 제도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왜 어지간한 디스토피아 장르보다 이런 시간 여행 소설이 훨씬 무서운가요? 주류와 비주류가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숱한 디스토피아들을 보세요.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처럼, 숱한 디스토피아들은 미래 자본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시대는 미래이나, 경제 구조는 여전히 자본주의입니다. <새틀라이트 레인>에서 주류와 비주류는 뒤집히지 않습니다.
주류와 비주류는 훨씬 멀어졌을 뿐입니다. 2019년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이 개돼지가 되는 것처럼, <새틀라이트 레인>에서 피지배 계급은 여전히 개돼지입니다. 사이버펑크 개돼지는 나노 로봇들을 뒤집어쓸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개돼지라는 계급 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반면, <킨>에서 소설 주인공 흑인 여자는 자유민입니다. 하지만 타임 슬립 때문에, 흑인 여자는 노예가 됩니다. <킨>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집고, 흑인 여자는 자유민에서 노예로 추락합니다. 이런 비참하고 아찔한 추락이 있기 때문에, <킨>은 무섭습니다. 흑인 여자가 다시 노예에서 자유민이 될 때, 이건 전복입니다. 좋은 사이언스 픽션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흔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났을 때, 이미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주류와 비주류를 뒤흔드는 중이었습니다. 메리 셀리는 소설 <최후의 인간>을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인류 문명은 멸망합니다. 인류는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나, 인류 문명은 멸망하고, 새로운 지적 문명은 다시 나타날 겁니다. <최후의 인간>은 주류(인류 문명)와 비주류(전염병 이후 새로운 문명)를 바꿉니다. 왜 메리 셸리가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쓸 수 있었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유럽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신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서구 문명에서 기독교가 당장 무너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진화 이론이 널리 퍼진 이후에도, 서구 문명에서 기독교는 당장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중세 1,000년 동안 기독교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고, 이런 전통은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계몽주의는 신의 섭리보다 이성적인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해도 신은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은 여기에 한몫을 더했을 겁니다.
자연 과학 역시 발달하는 중이었습니다. 메리 셸리가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메리 셸리는 인조인간 설정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메리 셸리는 정말 연금술사가 인조인간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으나, 발달한 자연 과학은 어느 정도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진화 이론이 발달한 이후, <타임 머신> 같은 소설은 인류가 퇴보할지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배경들, 계몽주의, 혼란스러운 혁명, 발달한 자연 과학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나타났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집을 겁니다.
<최후의 인간>은 1826년 소설이나,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이언스 픽션은 주류와 비주류를 뒤집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SF 독자들은 SF 소설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SF 독자들이 소설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비주류 시선을 키우기는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 구조가 그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주류 시선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정말 비주류 시선을 키울 수 있나요? 우리가 SF 소설들을 열심히 읽는다면, 우리가 새로운 사고 방식을 확장할 수 있나요? 분명히 SF 소설들은 도움이 될 겁니다. SF 소설들은 파격적인 사고 방식을 이야기하고, 독자들은 이런 사고 방식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SF 소설들을 많이 읽는다면, 소설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저도 모르게 파격적인 사고 방식을 훈련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자들은 주류가 더 이상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이 정말 비주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회 구조는 이걸 막을 겁니다. 사회 구조는 우리가 비주류보다 주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비주류 시선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배적인 관념을 거부해야 할 테고, 지배 계급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비주류 시선을 선택한다고 해도, 비주류 시선이 지배 계급에게 피해를 미치지 않는다면, 지배 계급은 이걸 그냥 놔둘 겁니다.
이건 안락한 비주류 시선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지배 계급에게) 아주 위험한 비주류 사고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SF 독자들이 파격적인 SF 소설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SF 독자들 역시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구호 광고들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구호 광고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을 보여주고 말합니다. "불쌍한 흑인 아이들. 여러분의 후원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매월 2만 원으로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을 후원하세요."
이건 아주 전형적인 구호 광고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구호 광고는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흑인 아이들을 후원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우리는 부유하고 자유롭습니다. 부유하고 자유로운 우리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구호 광고는 주장합니다. 하지만 왜 흑인 아이들이 가난한가요? 왜 흑인 아이들이 굶주리나요? 왜 아프리카 대륙에 내전들이 있고, 인종 청소들이 있고, 심각한 빈곤들이 있나요? 왜 아프리카 사람들이 부유하게 살지 못하나요?
우리는 전형적인 대답들을 압니다. 깜둥이들은 열등합니다. 아프리카는 저주를 받은 대륙입니다. 열대 지방은 미개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은 불쌍합니다. 우리는 이런 대답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걸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대답들에 동의합니다. 깜둥이는 열등하고 저주를 받았고 미개합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그래서 구호 광고가 불쌍한 흑인 아이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우리는 구호 광고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SF 독자들은 구호 광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정말 문제가 없나요?
문제는 서구 자본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수탈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문명은 아프리카 대륙을 수탈했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서구 문명은 부유합니다. 이 부유함은 착취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서구 문명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화했고 잔인하고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런 착취와 수탈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착취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부유해지지 못합니다. 만약 내일부터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폭싹 무너질지 모릅니다. 비단 아프리카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동남 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구 문명은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을 밀어냈고 아예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서구 문명에 편입시켰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선진 국가이고 제3세계들이 후진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부유해지지 못했을 테고, 부유한 서구 문명은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서구 문명은 우월하지 않습니다. 제3세계는 열등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착취, 수탈, 식민화입니다. 심지어 식민지 수탈을 늘리기 위해 서구 자본가 계급은 세계 대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두 차례조차.
그래서 구호 광고가 식민지 수탈을 언급하나요?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제국주의 세계 대전을 일으킨다고 구호 광고가 이야기하나요? 아니, 구호 광고는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구호 광고들과 제국주의 논리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비서구 지역 및 비자본주의 지역이 열등하다는 시선입니다. 제국주의는 주장합니다. "깜둥이들, 야만인들, 인디언들은 열등해. 우월한 우리는 그것들을 문명화시켜야 해." 구호 광고들은 이런 제국주의를 따릅니다. "깜둥이 아이들은 불쌍해. 우월한 우리는 열등한 깜둥이 아이들을 도와야 해."
제국주의와 구호 광고들은 왜 자본주의가 부유해지고 제3세계가 가난해지는지 절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식민지 수탈을 지적한다면, 제국주의와 구호 광고들은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않는다고 게거품을 물며 부정할 겁니다. SF 독자들 역시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않는다고 게거품을 물며 부정할 겁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식민지 수탈을 설명합니다. SF 독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악랄한 빨갱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식민지 수탈을 설명합니다. SF 독자들은 에코 페미니즘이 그저 순진한 계집년에 불과하다고 조롱할 겁니다. SF 독자들은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가 계급의 관념입니다.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주장합니다. "우리는 저소득층을 도와야 한다." 이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똑같습니다. 이 주장은 왜 저소득층이 나타나는지 묻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은 당연합니다. 빈부 격차는 당연합니다. 양극화는 당연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이 주장은 근본적인 물음을 은폐합니다. 왜 저소득층이 나타나는가? 대답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고 노동력들을 착취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공황을 뻥뻥 터뜨리고 빈민들을 양산합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그저 부유한 사람들이 저소득층을 도덕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SF 독자들은 이런 주장에 충성할 겁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지적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할 겁니다. 이게 파격적인 사고 방식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SF 독자들은 파격적인 사고 방식을 만나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이 정말 파격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면, SF 독자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떨쳐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