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비경 탐험들과 동굴 우화, 민중 혁명 본문
제임스 블리시가 쓴 <표면 장력>은 비경 탐험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에서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 너머를 두려워합니다.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웅덩이 너머에는 뭔가가 있는 것 같으나,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를 벗어나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수중 인간들은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체 잠수정(오오, 생체 잠수정…!)을 건조하고 웅덩이 밖으로 나갑니다. 다른 수중 인간들은 이게 무모한 시도라고 비난하나, 결국 생체 잠수정은 낯선 세계로 떠납니다.
지상에서 적응하기 위해 생체 잠수정은 온갖 고생길들을 거치나, 생체 잠수정 승무원들은 웅덩이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깨닫습니다. 소설 <표면 장력>은 작은 수중 인간들, 웅덩이, 생체 잠수정(다시 한 번 감탄사. 오오, 생체 잠수정…!)을 이야기하나,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훨씬 웅장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서 클라크가 쓴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태양계 인류는 초거대 원통 우주선 라마를 목격합니다. 태양계 인류는 커다란 충격에 부딪힙니다. 이제 태양계 인류는 우주에서 그들이 유일한 지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지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초거대 원통 우주선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태양계 인류는 그저 간단한 유인 우주 탐사선을 건조할 뿐이나, 이른바 라마인들은 초거대 우주선을 건조하고 머나먼 우주로 날릴 수 있습니다. 인데버 탐사대가 라마 우주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태양계 인류는 충격을 받습니다. 인데버 탐사대가 라마 우주선으로 들어간 이후, 탐사 대원들은 훨씬 커다란 충격들을 마주칩니다. 탐사 대장은 탐사 대원들에게 경고합니다. 만약 마음의 준비 없이, 탐사 대원들이 라마 내부 풍경을 구경한다면, 탐사 대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겁니다. 라마 내부 풍경이 너무 광대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탐사 대원들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라마 내부에서 탐사 대원들은 엄청난 것들을 목격합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잃어버린 세계> 역시 새로운 세계와 낯선 충격을 이야기합니다.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에는 공룡 세계가 있습니다. 챌린저 교수는 공룡 세계를 주장하나, 다른 사람들은 챌린저 교수를 조롱합니다. 챌린저 교수는 작은 탐사대를 이끌고, 탐사대는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으로 향합니다. 열대 밀림 속에서 탐사대는 정말 공룡 세계를 찾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챌린저 교수를 조롱했으나, 이제 챌린저 교수는 외칠 수 있습니다. "아직 공룡들은 멸종하지 않았어!" 이런 순간들에는 넘쳐흐르는 환희가 있습니다.
이제 인식의 지평선은 넓어질 겁니다. 탐사대가 새로운 것을 찾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런 경이에 주목합니다. 소설 <표면 장력>은 웅덩이 너머에 뭔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거대 우주선 내부가 독립적인 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잃어버린 세계>는 열대 밀림에 공룡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새로운 뭔가를 제시하고, 탐사대가 그것을 찾을 때, 사람들은 환희와 경이를 느낍니다. 이런 경이 덕분에, 사이언스 픽션들은 재미있습니다. 새롭고 낯선 뭔가는 지상이거나 거대 우주선이나 공룡 세계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새로운 세상과 낯선 충격을 이야기합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들이 새로운 세상과 낯선 충격을 이야기하나요? 왜 다른 문학 사조들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이런 것들을 훨씬 극적으로 이야기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 역시 이유가 될 겁니다. 알프레드 월리스가 말레이 밀림을 탐사하는 것처럼,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는 새로운 것들을 탐사했고, 이건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와 탐사는 필수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19세기 서구 산물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 낯선 탐사, 사이언티픽 로망스 사이에는 단단한 매듭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낯선 탐사가 식민지 수탈로 이어지기 때문에, SF 장르와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서구적인 근대화는 오직 낯선 탐사와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서구적인 근대화는 민중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성 해방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 해방 역시 충격적인 경이가 될 수 있습니다. 지상과 거대 우주선과 공룡 세계 이외에 성 해방 역시 새롭고 낯선 뭔가일 수 있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여자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남자들은 여자 공동체를 만납니다. 남자들은 엄청난 충격에 부딪힙니다. 어떻게 오직 여자들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나요? 남자는 여자를 이끌어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와 섹스해야 합니다. 남자 없이, 여자는 없습니다. 이렇게 남자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관념들은 고정 관념들입니다. 남자들은 온갖 편견들과 오해들을 동원하고 성 차별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자 공동체에게 이건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독자들 역시 충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표면 장력>과 <라마와의 랑데부>와 <잃어버린 세계>는 친숙한 충격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자 공동체는 다소 혼란스러운 충격일지 모릅니다. <표면 장력>과 <라마와의 랑데부>와 <잃어버린 세계>는 지배 계급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생체 잠수정(또 다시 감탄사. 오오, 생체 잠수정…!)과 초거대 원통 우주선과 공룡 세계는 지배 계급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자 공동체들과 성 해방 운동은 가부장적인 지배 계급을 위협합니다. 오랜 동안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했고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런 착취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는 이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취 속에서 여자들은 온갖 폭행들과 치욕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여자들은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착취 속에서 여자들은 안정적인 삶을 꾸리지 못합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은 분노하고, 미쳐버리고, 이성의 끈을 놓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메갈리아 같은 극단적인 여자들은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메갈리아는 아주 당연한 현상입니다. 비단 메갈리아만 아니라 언제나 억압적인 지배 계급들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저항들을 만듭니다. 지배 계급이 너무 가혹하게 탄압하기 때문에, 피지배 계급은 극단적으로 저항합니다. 비단 메갈리아만 아니라 인류 문명에서 이런 폭력 저항들은 아주 흔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이걸 테러라고 규정하고, 약자, 피해자는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소설은 이런 지배적인 관념을 뒤집습니다. 그래서 공룡 세계는 친숙한 경이가 되나, 여자 공동체는 다소 혼란스러운 충격이 될 겁니다. 가부장 문화와 여기에 물든 사람들은 온갖 편견들을 동원하고 극단적인 여자들을 헐뜯습니다. 이런 상황은 플라톤 동굴 우화와 많이 비슷합니다. 동굴 우화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동굴 속에는 영희와 철수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있습니다. 네 사람들은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대 동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오직 동굴 속에서만 그들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동굴이 좁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합니다. 동굴 밖에서 세상은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동굴 속의 네 사람들은 그림자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그림자들에 이름들을 붙입니다. 어떤 그림자는 나무가 되고, 어떤 그림자는 호랑이가 되고, 어떤 그림자는 버섯이 됩니다. 어느 날, 말자 할머니는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갑니다. 동굴 밖에서 말자 할머니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평생 동안 말자 할머니는 햇빛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깥 세상에서 어떻게 말자 할머니가 쉽게 적응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해도 바깥 세상을 견디기 위해 말자 할머니는 아주 열심히 노력합니다.
말자 할머니는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다시 노력합니다. 그래서 말자 할머니는 바깥 세상과 친숙해집니다. 말자 할머니는 그림자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나무, 호랑이, 버섯이 있습니다. 그림자들은 그저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합니다. 말자 할머니는 동굴로 돌아가고 영희와 철수와 수진에게 외칩니다. "다들 주목! 그림자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말자 할머니는 이 세상에 정말 나무, 호랑이, 버섯이 있다고 외칩니다. 그림자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말자 할머니는 영희와 철수와 수진이 부수적인 그림자들보다 진짜 나무, 호랑이, 버섯을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쉽게 먹히나요? 영희와 철수와 수진이 당장 동굴 밖으로 나가고 진짜 나무, 호랑이, 버섯을 보기 원하나요? 플라톤은 그게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동굴 사람들에게는 고정 관념이 있습니다. 오랜 동안 영희와 철수와 수진은 그림자들을 봤습니다. 세 사람들은 그림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자 할머니는 그게 아니라고 지적하나, 영희와 철수와 수진은 진실보다 고정 관념을 선택합니다. 영희와 철수와 수진은 온갖 오해들과 편견들을 동원하고 진실보다 고정 관념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영희와 철수와 수진은 멍청합니다.
영희와 철수와 수진이 멍청한 것처럼, 민중들은 멍청할 겁니다. 철학자는 진실을 알리기 원합니다. 하지만 철학자가 민중들에게 설교한다고 해도, 민중들은 오해들과 편견들을 동원하고 진실보다 고정 관념을 선택할 겁니다. 오히려 민중들은 철학자를 내쫓을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민중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철인 지도자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굴 속과 세상은 너무 다릅니다. 동굴 속에서 동굴 밖으로 영희가 나간다면, 영희가 진짜 세상과 마주친다면, 영희는 아주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겁니다.
철수는 이런 과정이 무모하다고 말할 겁니다. 수진은 진짜 세상을 거부할지 모릅니다. 영희가 철수와 수진을 설득한다고 해도, 철수와 수진은 고정 관념을 추구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동굴 우화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사람이나, 이런 동굴 우화는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이 그림자이고 무엇이 진짜 호랑이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국내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커다란 화제입니다. 수많은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런 남한 사람들이 정말 제국주의 폭력에 반대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남한 정부가 서구 제국주의에 들러붙음에도, 남한 사람들은 이게 옳다고 착각합니다.
남한 정부와 일본 정부는 모두 제국주의 침략에 찬성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를 침략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서구 산업 혁명이 기후 변화를 일으켰고 극심한 폭염이 가난한 아프리카 농민들을 굶겨죽인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기후 변화가 제국주의 범죄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한다고 해도, 이건 근본적인 비판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제국주의 다툼과 삐뚤어진 애국심에 불과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삐뚤어진 애국심으로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처럼, 제국주의 다툼은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국가 정부가 그저 자본가 지배 계급의 통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 및 민족 문제보다 계급 투쟁, 생산 수단 공유, 노동 사회화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보수 우파는 반박할 겁니다. 유시민이 카를 마르크스를 비난하고 서구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수 우파는 국가 정부를 지지할 겁니다. 만약 마르크스주의와 보수 우파가 대립한다면, 누가 옳고 누가 틀리나요? 누가 진짜 호랑이고, 누가 그림자인가요? 진짜 호랑이가 마르크스주의인가요? 보수 우파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한가요?
마르스크주의와 보수 우파는 서로 상대가 동굴 속의 그림자이고 자신이 진짜 호랑이라고 우길 겁니다. 이런 다툼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겁니다. 결국 우리는 한쪽을 편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제3세계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할 테고,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수 우파를 선택할 겁니다. 양쪽은 서로 상대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계속 다툴 겁니다. 이렇게 플라톤과 동굴 우화, 소설 <휴스턴, 들리는가?>와 여자 공동체는 비슷한 측면들을 보여줍니다. 양쪽 모두 편견, 고정 관념, 왜곡,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SF 독자들은 중요한 헛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멍청한 민중들이 진실을 조롱하고 철학자를 쫓아낸다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은 왜 민중들이 진실을 조롱하는지 파악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하늘에서 멍청한 민중들이 뚝 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동굴 우화는 훨씬 복잡한 개념이나, 그렇다고 해도 정말 민중들이 멍청한가요? 남자들이 가부장 문화에 충성한다고 해도, 태생적으로 남자들이 폭력적인가요?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만들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자가 만들어진다면, 남자 역시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플라톤은 민중 혁명보다 철인 지도자를 주장하나, 정말 민중들이 혁명하지 못하나요?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박할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중들이 혁명할 수 있다고 반박할 겁니다. 이건 민중 혁명이 쉽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자는 민중 혁명을 응원하나, 오직 특정한 상황 속에서만 민중 혁명은 가능합니다. 아나키즘은 절대적인 민중 혁명을 주장하나, 로자는 그게 망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민중 혁명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고 해도, 이건 민중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민중들은 현실 속의 모순들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