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머리띠 제작자>와 엘리트 통치 구조 본문
필립 딕은 엘리트를 꽤나 싫어하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여러 소설들 속에서 필립 딕은 엘리트들이 인류를 이끌고 계몽시킨다는 발상을 부정합니다. <무한자>나 <머리띠 제작자> 같은 단편 소설들은 그런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쩌면 SF 소설은 그런 주제를 보여주기에 아주 적합한 장르일지 모르겠습니다. SF 소설은 초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SF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초인들이 존재합니다. 만약 기술적 특이점이 나타난다면, 아주 강력한 인공 지능이 개화할지 모릅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댄다고 해도, 인류는 강력한 인공 지능에 대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강력한 인공 지능은 모든 인류를 통치하는 초인이 될 수 있겠죠. 이런 소재는 로봇의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고요. 아니면 인류 중 누군가는 진화할지 모릅니다. 만약 몇몇 인간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들을 대적하지 못할 테고, 몇몇 초인은 인류를 이끌 수 있을지 모르죠. 이런 소재는 흔한 초인 장르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 초인 영웅 만화들은 이런 소재를 자주 변주합니다. 저는 슈퍼맨이 원래 영웅이 아니라 천재적인 악당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면 외계인들은 초인이 될 수 있겠죠. 만약 외계인이 지구인보다 훨씬 앞서 문명을 일으켰다면, 그들은 인류에게 초인이 될 겁니다. 그들은 인류를 계몽시키고 각성시키고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 수 있겠죠. 사실 현실 속에서 외계인들은 이미 존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가 아직 외계 문명에 합류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그저 인류를 지켜보는 중일지 모릅니다. 인류가 폭력적인 사회 구조를 바꾼다면, 외계인들은 정체를 드러내고 우리를 끼워줄지 모릅니다. 이런 소재 역시 드물지 않아요. 이런 소재는 아주 경이적인 우주 탐사물로 이어질 수 있죠. 이렇게 SF 세상에는 강력한 인공 지능, 진화한 신인류, 첨단 외계 문명 같은 초인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일부 SF 작가들은 이런 발상을 현실에 적용하기 원했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인류가 세계 정부를 만들고 몇몇 엘리트가 세계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계 정부를 이끌기 위해 그런 엘리트들은 근검절약해야 하고 사리사욕을 없애야 합니다. 하지만 필립 딕은 이런 발상을 아주 부정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부 엘리트들이 세계 정부를 지배한다? 필립 딕은 그런 문명이 반드시 억압적인 사회로 타락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설사 강력한 인공 지능이나 신인류나 첨단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류는 스스로 사회를 꾸릴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말은 쉽습니다. 문제는 실천이죠. "인민들은 스스로 사회를 꾸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발상에 동의할 겁니다. 심지어 독재 지도자들조차 이런 발상에 동의할지 몰라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민중이 그럴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막연하게 민중이 스스로 사회를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죠. 민중이 스스로 사회를 꾸리는 세상은 너무 이상적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그것을 실현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당장 뭔가를 시도할 수 있겠죠. 우리가 당장 대의 제도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없애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당장 다른 변화들을 시도할 수 있겠죠. 만약 사람들이 훨씬 적게 일하고, 훨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실업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따라서 노동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은 일할 수 있을 겁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유 시간을 이용해 사회 활동에 참가하고 권력자들을 감시할 수 있겠죠. 다수 민중이 권력을 감시한다면, 중앙 집중적인 권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그 권력은 쉽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겠죠.
당장 대의 제도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없애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사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당장 이런 상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면 노동자들이 임금을 훨씬 적게 받을 거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도, 노동자가 임금을 적게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을 결정하는 주체는 기업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임금을 결정하죠. 하지만 왜 우리가 자본가 계급에게 임금을 받아야 하나요? 이것 역시 엘리트 구조겠죠. (과연 자본가들이 엘리트 행세할 정도로 똑똑한지 의심스러우나) 이는 자본가 계급이 엘리트 행세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인 엘리트를 거부해야 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경제적인 엘리트를 거부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발상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정치적인 엘리트를 거부하는 급진적인 사람들조차 기업들에게 매달리고 자본가 계급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엘리트와 경제적인 엘리트를 모두 거부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오직 어떤 한쪽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평등한 사회로 향하지 못하겠죠.
※ <머리띠 제작자>에서 필립 딕은 볼셰비키를 나치와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부당한 비교입니다. 나치는 침략자인 반면, 볼셰비키는 침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러시아를 공격했고, 그건 볼셰비키에게 치명타가 되었죠. 이는 볼셰비키가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볼셰비키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자본주의 때문에 볼셰비키는 폭력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필립 딕은 좋은 작가이나, 이런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진흙발의 오르페우스> 역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요.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점을 고려하지 못하죠. 기득권들이 계속 자본주의와 서구적인 근대화와 유럽 중심주의가 옳다고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필립 딕 역시 그런 세뇌를 벗어나지 못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