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미니즘과 공산주의는 한 지붕 두 가족 본문
소설 <어둠의 왼손>은 위대한 문장들을 남겼습니다. "왕은 임신했다." 같은 문장 역시 그렇죠. 이 문장을 봤을 때,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겁니다. 어떻게 왕이 임신할 수 있을까요? 왕은 남자이고, 남자는 임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둠의 왼손>은 게센이라는 외계 행성을 이야기합니다. 게센 행성에서 원주민들은 성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번식기에 일부 동물들이 성별을 바꾸는 것처럼 게센 사람들 역시 성별을 바꿉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외부인이고, 이런 관습에 쉽게 적응하지 못합니다. 게센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 양쪽 모두 아닙니다.
어떻게 양쪽 성별에 익숙한 사람이 이런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어슐라 르 귄은 놀라운 사변을 펼쳤고, <어둠의 왼손>은 길이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습니다. <어둠의 왼손>은 어떻게 사변 소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보여줬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의 왼손>이 남자 대명사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조안나 러스 같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어둠의 왼손>에 여자가 없고 이게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라고 비판했어요.
어슐라 르 귄은 이런 비판에 열심히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고, 르 귄은 크게 반성했습니다. 문제는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같은 대표 소설들이 남자 주인공을 묘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스스로 페미니즘 작가라고 여겼으나, 여자 주인공을 쓰지 않았죠.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인 <어스시의 마법사> 역시 그렇고요. 그래서 여러 SF 독자들은 이런 사실을 크게 아쉬워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슐라 르 귄에게 너무 많이 욕을 들어먹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지배적인 관념을 깨뜨리기 어려운지 보여줍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주옥 같은 소설들을 남긴 환상 소설 작가조차 지배적인 관념에 쉽게 굴복할 수 있어요. 계급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수 있겠죠. 요즘에 페미니즘이 유행이기 때문에 여러 장르 창작물들은 여자 권리나 여자 등장인물들을 내세웁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저는 페미니즘이 유기농 과일 같은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장르 창작물들이 여자 권리를 떠든다고 해도, 결국 그것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그것들은 지배 계급이 허용하는 범주를 나가지 않아요.
아마 수많은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공산주의를 싫어할 겁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악질 빨갱이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원래 한 지붕 아래에서 페미니즘과 공산주의는 함께 살았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만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은 골수 빨갱이였습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소속이었고, 클라라 체트킨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하죠. 세계 여성의 날에 여자 시위대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도화선을 지필 수 있었습니다. 근대 국가들 중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일찌감치 동성애를 합법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여자는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공산주의자였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냉전 시대에 유럽에서 자본주의에 휩쓸리지 않은 유럽 철학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공산주의가 무조건 페미니즘과 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럽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하고 유럽 공산주의가 짓밟힌 이후, 러시아는 소비에트 노선에서 벗어났습니다. 볼셰비키는 더 이상 사회주의 노선을 지속하지 못했고, 결국 타락합니다. 덕분에 페미니즘과 공산주의는 크게 갈라졌죠. 그렇다고 해도 어슐라 르 귄이 <빼앗긴 자들>을 쓴 것처럼, 사회주의와 페니미즘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행히 21세기 이후, 양쪽은 다시 손을 잡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 친합니다. 페미니즘은 공산주의에 영향을 주고, 공산주의는 페미니즘에 영향을 주죠. 로자 룩셈부르크와 클라라 체트킨은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양쪽이 아무 이유 없이 친하지 않았겠죠. 시몬 드 보부아르가 소비에트 연방을 편들었기 때문에 냉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기 원하는 미국 정보 부서는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를 꽤나 미워했죠. 하지만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역사를 얼마나 숙고할까요. 미투 운동 같은 것들은 쉽게 유행이 됩니다. 하지만 훨씬 급진적인 운동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가난한 여대생이 편의점 알바에 매달린다면, 미투 운동이 그걸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정체성 운동이 그런 가난한 여대생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핵 발전소 때문에 시골 할머니가 고향에서 쫓겨난다면, 정체성 운동이 시골 할머니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훨씬 급진적인 운동만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겠죠. 그들은 지배 계급에게 충성하고, 지배 계급을 넘어가지 않겠죠.
※ '여대생'은 꽤나 사랑을 받는 용어입니다. 남대생이라는 표현은 별로 쓰이지 않으나, 여대생이라는 표현은 아주 엄청난 인기를 누리죠. 언론이 여자 대학생을 그냥 대학생이라고 말한다면, 다들 하늘이 무너질 거라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여대생은 남한 사회가 얼마나 가부장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보여주는 근거일 겁니다. 여대생을 대학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다른 성 차별들 역시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국가 이데올로기(군대)가 남자들을 계속 우대한다면, 성 차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