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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를 잃는 원본과 의식의 공유화 및 민주화 본문

사회주의/사회 공학

아우라를 잃는 원본과 의식의 공유화 및 민주화

OneTiger 2018. 7. 26. 20:10

비디오 게임 사업계에서 불법 복제는 아주 커다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불법 복제 게임을 이용한다면, 게임 제작자가 받는 수입은 줄어들 테고, 게임 제작자는 다음 게임을 만들지 못할 겁니다. 아예 게임 제작자는 생활고에 시달릴지 몰라요. 거대 게임 회사는 이런 불법 복제 문제를 견딜 수 있으나, 소규모 게임 제작진에게 불법 복제는 목숨을 위협하는 문제가 될 수 있죠.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불법 복제를 규제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이게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불법 복제 게임을 구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에, 게임 복제 과정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불법 복제 게임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과 게임 유통 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할지 모릅니다. 크라우드 펀딩처럼 게임 제작진이 먼저 제작 비용을 받는다면, 불법 복제가 미치는 부작용은 좀 더 줄어들지 몰라요. 그런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소규모 게임 제작진은 보호를 받을 수 있겠죠. 비록 제한적이나, 몇몇 소규모 제작진은 킥스타터 같은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해 무사히 게임을 내놓을 수 있었고요. 저는 이게 바람직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 근대 사람들은 이런 복제 문제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근대 사람들 역시 불법 복제 문제를 마주쳤겠으나, 그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 복제 기술이 꽤나 비쌌기 때문이죠. 근대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 복제 기술은 꽤나 저렴해졌습니다. 디지털 문화는 여러 혁신들을 이룩했으나, 저렴한 복제라는 문제 역시 낳았죠. 아무리 거대한 게임 회사가 AAA 블록버스터 게임을 공들여 만든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후딱 복제할 수 있어요. 만약 발터 벤야민이 이런 상황을 봤다면, 벤야민이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발터 벤야민은 어떻게 기술 복제 시대에서 예술이 달라지는지 설명했던 철학자입니다. 20세기 이후, 놀라운 기술들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아무렇지 않게 복제하기 시작합니다. 구태여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모나리자>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 덕분에 우편엽서에서, 미술관 안내 책자에서, 인터넷에서 우리는 간단히 <모나리자>를 구경할 수 있어요. 어쩌면 루브르 박물관보다 미술관 안내 책자가 더 나을지 모릅니다. 관람객들이 너무 많이 몰릴 때, 루브르 박물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제대로 작품들을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모나리자>보다 그걸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훨씬 인상적이더군요.



21세기 초반까지, 여전히 <모나리자>는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서 유명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구태여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이나 안내 책자나 인터넷으로 <모나리자>를 감상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모나리자>를 감상하기 위해 옛날 사람들은 무조건 원본을 찾아야 했으나, 이제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심지어 증강 현실 장치는 입체적인 복제 영상을 보여주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태여 관광 명소에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관광 명소는 북적거리고 시끄럽습니다. 관광 명소는 관광객들에게 신나게 바가지를 씌우고, 그건 관광이 아니라 짜증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디지털 문화가 4K짜리 생생한 화면으로 멋진 장면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구태여 관광 명소로 떠나지 않아요. 그렇게 <모나리자> 같은 예술 작품이나 관광 명소는 아우라를 잃습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원본을 찾지 않기 때문에, 사진들과 동영상들이 복제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때때로 그런 복제들이 원본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원본들은 아우라를 잃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기술적인 진보가 원본에게서 아우라를 빼앗는다고 한탄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발터 벤야민이 그걸 한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발터 벤야민이 기술적인 진보가 아우라를 빼앗았다고 한탄했을까요? 글쎄요, 우리는 그렇게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과학 기술은 예술에게서 중요한 뭔가를 빼앗았을지 모릅니다. 불법 복제 게임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원본 게임은 아우라를 잃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무조건 부정적인 상황일까요? 예술 작품의 영광을 부활시키고 싶다면, 우리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오직 원본만을 감상해야 할까요? 정부가 아주 철두철미하게 불법 복제를 단속하고, 게임 회사들 역시 아주 조금씩 게임을 유통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공유 지식들과 수많은 공유 자료들이 존재합니다. 복제 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쉽게 공유하고, 쉽게 지식들과 자료들과 정보들을 퍼뜨릴 수 있죠. 이는 예술과 정보의 민주화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공유화와 민주화가 더 널리 퍼진다면, 그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무조건 사적 소유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어느 정도 이런 공유화를 긍정적이라고 해석했고, 요즘에는 폴 메이슨이나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어쩌면 누군가는 아우라를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이런 아우라가 너무 강하다면, 사람들은 쉽게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겠죠. 진보적인 과학 기술은 그런 아우라를 해체하고, 예술과 정보의 공유화와 민주화를 꾀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사는 방식을 크게 바꿀지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공유화할 수 있을지 모르죠. 가상 공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공유하고 훨씬 평등하게 살아갈지 모르죠. 발터 밴야민은 SF 소설을 잘 몰랐을 겁니다. 얼마나 폴 메이슨이나 슬라보예 지젝이 SF 소설들을 많이 의식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정보의 공유화에서 비롯한 의식의 공유화는 충분히 SF 소설처럼 보입니다. 아니, 이미 사이버펑크 소설들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군요. 우리는 폴 메이슨의 주장과 사이버펑크 소설을 함께 비교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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