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레우스>부터 <심어스>까지, 신 게임과 생태학 SF 본문
[이런 스크린샷처럼, 여러 신 게임들은 신이 세상에 개입하고 '자연 현상'을 조절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블랙 앤 화이트>는 신 게임(god game)에 속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신이 되고 인류 문명을 이끌어야 합니다.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기적들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신이 비를 뿌린다면, 곡식들은 훨씬 풍성하게 자랄 겁니다. 신이 나무들을 뽑고 창고에 저장한다면, 사람들은 목재 자원들을 훨씬 많이 사용할 겁니다. 신은 높은 창공을 향해 새들을 날릴 수 있고, 사람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이런 장면을 바라볼 겁니다. 신에게는 크리쳐가 있고, 신은 크리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크리쳐는 거대한 2족 보행 동물들입니다.
신은 크리쳐에게 기적을 가르치거나 선행을 가르치거나 악행을 꾸짖거나 멀리 내보낼 수 있습니다. 신이 크리쳐를 잘 가르친다면, 크리쳐는 인류 문명과 어울리고 그들을 도울 겁니다. 커다란 호랑이가 선한 오라를 뿜고, 농장 위에 비를 뿌리고,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다면, 이런 장면은 정말 웅장하고 신비로울 겁니다. 아쉽게도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블랙 앤 화이트>가 신 게임보다 심부름꾼 게임에 가깝다고 불평합니다. 게임 속에서 인류 문명은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신은 그것들을 들어줘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산만하게 요구들을 해결하고, 이건 신보다 심부름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블랙 앤 화이트>는 흥미로운 신 게임입니다.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세상에 개입하고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바꿉니다. 물론 <블랙 앤 화이트> 같은 신 게임 이외에 여러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바꿉니다. 전략 게임들, 경영 게임들, 건설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관리자가 됩니다. <블랙 앤 화이트>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세상에 개입하는 것처럼, <심시티>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도시를 이끌고, <문명>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문명을 이끌고, <커맨드 앤 컨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군대를 이끕니다. 이렇게 여러 게임 장르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세상에 개입하고 뭔가를 관리하고 이끕니다.
비단 신 게임 장르만 아니라 다른 게임 장르들 역시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속의 세상에 개입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게임 장르들과 신 게임이 똑같나요? 만약 양쪽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이 차이가 무엇인가요? 왜 신 게임이 신 게임인가요? 제목처럼,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신의 기적을 연출합니다.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가 전략 게임인가요, 아니면 신 게임인가요? 아니면 이게 양쪽 모두인가요? 여기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는 신 게임보다 전략 게임에 가까우나, 장르는 반드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대답이 될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마우이는 자신이 '자연 현상'을 조절한다고 말합니다. 반신(demigod)으로서 마우이는 하늘, 태양, 파도를 준비했습니다. 마우이는 엄지로 하늘을 들어올렸고, 불을 전달했고, 섬을 끌어올렸고, 태양을 붙들었고, 바람을 이용해 돛단배를 띄웠고, 장어를 땅에 묻었고 코코넛 나무에 거름을 줬습니다. 마우이는 거대 소라게 괴수 타마토아와 싸웠고 물리쳤습니다. 마우이는 테 피티의 심장을 노렸고, 이건 커다란 실수이나, 그렇다고 해도 마우이는 자연 현상을 조절했고,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건 전형적인 영웅 신화입니다. 신이 세상에 개입하고 '자연 현상을 조절'한다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이 인류 문명을 둘러쌌기 때문에, 신은 자연 현상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세상에 개입하고, 자연 현상을 (직접) 조절하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산다면, 이 게임은 신 게임에 속할 겁니다. 이런 특징이 신 게임을 완전하게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신 게임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블랙 앤 화이트>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현상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거대한 2족 보행 야수 크리쳐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인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레우스> 역시 자연 현상을 조절합니다. <레우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거대한 네 신들을 조종합니다. 네 신들은 대지, 삼림, 늪지, 바다를 조절합니다. 신들이 자연 현상에 개입하고 조절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번성할 수 있습니다. <레우스>에서 신들은 정말 자연 현상과 닮았습니다. 대지 신은 바위 거인이고, 바다 신은 거대 갑각류이고, 삼림 신은 나무 같은 원숭이고, 늪지 신은 질척거리는 녹색 거인입니다. <레우스>는 신 게임 장르에서 자연 현상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모든 신 게임에서 자연 현상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 게임에는 여러 종류들이 있고, 어떤 신 게임에서 자연 현상은 부차적입니다. 루카스아츠 신 게임 <애프터라이프>에서 자연 현상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외관에서 <애프터라이프>와 <레우스>는 크게 다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사후 세계'라는 제목이 울창한 숲, 장대한 물고기 떼, 화산 폭발, 늪지와 조류를 가리킨다고 쉽게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레우스>는 신 게임이 자연 현상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이건 모든 신 게임이 자연 현상을 필수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프터라이프>처럼, 신 게임들은 얼마든지 다른 것들을 중시할 수 있습니다.
[신 게임은 어머니 행성, 살아있는 행성을 이야기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가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아나>에서 마우이가 자연 현상을 조절하는 것처럼, 신은 자연 현상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이 신화를 만드는 동안, 자연 현상은 아주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작물들이 시드는 동안, 신이 기적을 연출하지 않고 비를 뿌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런 신을 숭배하지 않을 겁니다. 마우이가 장어를 잡고 코코넛 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처럼, 신은 자연 현상에 개입하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어머니 자연을 만들었을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은 모성적입니다. 어머니 자연, 자연의 여신은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신 게임들이 직접 자연의 여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 게임들이 자연 현상을 자세하게 묘사한다면, 이건 자연의 여신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아나>에서 최종 목표는 테 피티일 겁니다. 전형적인 자연의 여신으로서 테 피티는 자연 환경을 복원하고 사람들을 먹입니다. 이건 여자라는 관념이 반드시 모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성적인 자연,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이건 비유입니다. 이건 근본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언클레임드 월드>에는 외계 식생들이 있습니다. 왜 이 게임이 외계 나무를 보여주나요? 게임 제작자들이 정말 머나먼 외계 행성에 외계 나무가 있다고 믿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을 이용하는 비유'라고 말했습니다. 인류 문명보다 생물 다양성이 원초적이기 때문에, 자연 과학자들은 생물 다양성이 신비롭다고 감탄하곤 합니다. 생태학자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생태학자들은 자연이 놀라운 뭔가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외계 나무를 말합니다. 외계 나무는 비유이고, 근본적인 의미는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입니다.
우리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표(껍데기)를 뛰어넘고 근본적인 의미(알맹이)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사회 구조입니다. 사회 구조가 억압적이라면, 억압적인 사회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테고, 개인은 억압을 해석에 반영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껍데기를 알맹이로 밀어넣고 여자를 왜곡합니다. 여자가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는 번성과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여자의 본질이 아니고 전부가 아닙니다. 이게 본질이 아니고 전부가 아님에도, 가부장적인 편견은 여자를 오직 임신과 출산과 육아로만 연결합니다. 가부장 문화에게 여자는 인간보다 생체 인큐베이터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여자가 인간이 된다고 해도, 여자는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와 자연을 연결한다면, 오히려 가부장 문화는 여자와 자연을 착취할 겁니다. 멍청하고 무식한 가부장 문화는 자신이 잘났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고, 우리 인생에서 이런 가부장 문화는 개미 눈꼽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연 환경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사회 구조를 없애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먹고 살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상호 작용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상호 작용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직접 이어지기 때문에, <레우스> 역시 자연 환경 변화를 이야기했을 겁니다. <애프터라이프>처럼, 신 게임들이 다른 것들을 중시할 수 있다고 해도, 신 게임들에게 자연 현상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레우스>는 대지 거인, 거대 갑각류, 거대 나무 원숭이, 늪지 거인을 보여줬을 겁니다. 만약 비디오 게임이 자연 현상에 훨씬 가까이 다가간다면, 어떻게 신 게임이 바뀔까요? <레우스>는 자연 환경 변화를 묘사하나, <레우스>보다 신 게임이 자연 환경 변화를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면, 어떻게 신 게임이 바뀔까요? 어쩌면 <심어스>는 대답이 될지 모릅니다.
<심어스>는 행성 공학을 묘사합니다.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지구 행성 환경을 관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헛갈릴지 모릅니다. <심어스>가 신 게임 장르에 속하나요? 분명히 <심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대기, 기후, 대륙, 생물량, 진화를 조절하고 관리합니다. 행성 관점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것들을 조절하고 관리합니다. 이런 과정은 정말 신과 같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행성 대기와 행성 생물량을 조절할 수 있다면, 이런 게임 플레이는 신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심어스>가 신 게임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 가깝다고 반박할 겁니다.
<심어스>가 고대 신화보다 근대 생태학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블랙 앤 화이트> 및 <레우스>와 달리, <심어스>는 근대 생태학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심어스>가 신 게임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신 게임이 되지 못하나요? 비디오 게임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진화 생물학을 이야기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진화 과정을 관리하고 조절하고 통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블랙 앤 화이트> 및 <레우스>와 달리,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은 신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신 게임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모두 생태계 조성을 중시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묻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게임 플레이어가 진화 과정을 조절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신과 같을 겁니다. 3류 바이오펑크들이 내뱉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우하하, 나는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팀에서 <인텔리젠트 디자인>에는 사이언스 픽션, 과학, 교육, 신 게임 태그들이 있습니다.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고 동시에 신 게임입니다. 심지어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새로운 진화 역사들을 이야기합니다.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전형적인 사이언스 픽션과 다르나, 이 게임이 새로운 진화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텔리젠트 디자인>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비단 <인텔리젠트 디자인>만 아니라 <니치> 역시 사이언스 픽션, 생태계 시뮬레이션, 신 게임입니다. <니치>는 새로운 진화 역사를 보여주나, <니치>에도 신 게임 태그가 있습니다. <제노블룸> 역시 반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가 생물 다양성을 퍼뜨리고 진화 역사를 관리하고 세상을 창조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제노블룸>이 외계 생물권(alien biome)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동시에 반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생물권을 관리하고 조절하고 개입합니다. 이렇게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신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신 게임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어스>, <인텔리젠트 디자인>, <니치>, <제노블룸>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고 동시에 신 게임이나, 다른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이 신 게임이 될 수 있나요? <타이토 에콜로지>와 <Among Ripples 2>가 신 게임이 될 수 있나요? <쉘터 2>가 신 게임이 될 수 있나요? 만약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신 게임이 된다면,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이 신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SF 소설 속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불모지 소행성을 자연 생태계로 바꾼다면, 독자는 첨단 기술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그들이 신과 같은 업적을 이룩했다고 자랑할지 모릅니다. 3류 바이오펑크 소설에서 진화 생물학자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 자신이 신이라고 자랑할 겁니다. 이미 메리 셸리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근대적인 프로메테우스라고 말했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근대적인 프로메테우스라면, SF 소설 속에서 개척 과학자들 역시 근대적인 신이 될지 모릅니다. 테라포밍 소설은 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비유입니다.
신이 자연 현상에 개입하고 자연 현상을 조절하기 때문에,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때문에, 개척 과학자들이 거시적인 생태계 변화를 일으키고 불모지 소행성을 자연 생태계로 바꾼다면, 테라포밍 소설은 '비유적인 의미로서' 신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로서 신은 자연 환경 변화입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Among Ripples 2>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Among Ripples 2>는 신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쉘터 2> 역시 신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특히, <타이토 에콜로지> 및 <Among Ripples 2>와 달리, <쉘터 2>는 샌드 박스보다 오픈 월드입니다.
<쉘터 2>는 생태계 조성보다 생태계 탐사를 이야기합니다. <쉘터 2>와 달리, <Among Ripples 2>는 생태계 조성을 이야기하나, 그렇다고 해도 <Among Ripples 2>와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다릅니다. <붉은 화성> 같은 테라포밍 소설이 생태계 조성을 중시한다고 해도, <붉은 화성>과 <Among Ripples 2>와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다릅니다. <레우스>와 <붉은 화성>과 <심어스>와 <인텔리젠트 디자인>과 <Among Ripples 2>는 서로 다르고,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생태계 조성, 자연 환경 변화라는 유사성만으로 <붉은 화성>과 <인텔리젠트 디자인>이 똑같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차이들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유사성을 강조하지 못하나요? 오히려 이런 차이들은 유사성을 강조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커다란 차이들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커다란 차이들이 있음에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우스>와 <붉은 화성>과 <심어스>와 <인텔리젠트 디자인>과 <Among Ripples 2>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 생태계 조성과 자연 환경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건 생태계 조성이 중요하다는 반증인지 모릅니다. 생태계 조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왜 다양한 매체들이 똑같이 생태계 조성과 자연 환경 변화를 중시하나요?
자연 환경 변화가 하찮다면, 왜 신 게임과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겹치고,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테라포밍 소설이 겹치나요? 우리는 고대 판타지 신 게임과 테라포밍 소설과 행성 공학 게임과 진화 생물학 게임과 담수 생태계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자연 환경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쉘터 2> 같은 게임조차 장대하고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자연 풍경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자연 환경 변화는 중요합니다.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매체들은 똑같이 목소리들을 높일 겁니다. <레우스> 같은 신 게임부터 <심어스> 같은 행성 공학 SF 게임까지, 여기에는 유사성(거시적인 생태계 조성)이 있습니다.
[자연의 여신은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의지한다고 비유합니다. 우리가 이런 비유를 제대로 해석하고 싶다면, 가부장 문화는 사라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너무 무리하게 장르 경계선을 넘어간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르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는 자신이 SF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SF 작가들은 사이버펑크 사조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반발했습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SF 작가이나,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이 본격적인 SF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평론가들은 <광기의 산맥> 같은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인지 논의합니다. 어슐라 르 귄은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을 이용하는 비유라고 규정했으나, 이건 절대적인 정의가 아닙니다. 심지어 어슐라 르 귄은 판타지 작가 같습니다. 반다나 싱과 켄 리우는 장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 모두 사변 장르이기 때문에, 반다나 싱과 켄 리우는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은 SF, 판타지, 고딕 호러, 해적 이야기를 종합하고, 평론가들은 이런 시도를 칭찬합니다. 칼 세이건은 SF 작가보다 과학자에 가까우나, 여러 SF 독자들은 워렌 페이 같은 SF 작가보다 칼 세이건을 훨씬 좋아합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장르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다른 것들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런 비교·대조는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다른 것들과 같거나 다른지 보여줍니다. 이런 비교·대조가 너무 무리한 왕래라고 해도, SF 장르에게는 이런 비교·대조가 필요합니다.
<레우스>와 <붉은 화성>이 보여주는 것처럼, <모아나>와 <Among Ripples 2>가 보여주는 것처럼, <블랙 앤 화이트>와 <심어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고대 판타지부터 하드 SF까지, 우리는 계속 자연 환경 변화와 생태계 조성을 이야기합니다. <모아나>는 고대 신화를 이용하고 <제노블룸>은 상상 과학을 이용하나, 양쪽 모두 자연 환경 변화를 거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자연의 여신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비유적으로) 자연의 여신을 우러러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연 생태계는 커다란 위기에 부딪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자연 생태계를 상품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연의 여신을 우러러보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여섯째 문단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는 모성적인 자연과 여자의 몸을 왜곡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가부장 문화에 속합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돌봄 노동자들은 여자들이고, 그래서 자본주의는 여자들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여자들은 생체 인큐베이터가 됩니다. 여자들이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은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자연은 그저 원자재 창고에 불과합니다. 여자와 자연은 생명을 낳고, 자본주의는 생명을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정말 뱀파이어 같습니다. 뱀파이어가 생명을 착취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생명을 착취해야 합니다. 드루이드가 언데드를 퇴치하는 것처럼, 자연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퇴치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의 여신을 우러러볼 수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