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태학 SF, 자연을 바라보기 위한 창문 본문
[고대 신화들처럼,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을 과장합니다. 자연은 웅장하고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SF 세상에서 다양한 하위 장르들은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타임 머신>처럼, 미래 자연은 종말을 맞이합니다. <에코토피아>처럼, 인류 문명은 생태 유토피아를 이룩합니다. <빼앗긴 자들>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먹거리를 공유합니다. <오로라>처럼, 과학 기술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우고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합니다. <빛의 세계>처럼, 기이한 자연 생태계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고 거대 바다 괴수를 낳습니다. <야생종>처럼, 여자는 동물로 변신하고 자연을 누빕니다. <식물 아내>처럼, 여자는 자연(나무)이 되고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몰아냅니다.
<상흔>처럼, 자연 생태계는 온갖 기괴하고 적대적이고 이상한 형태들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처럼, 외계 자연 생태계에는 거대 괴수와 온갖 야수들이 있습니다. <니치>처럼, 새로운 진화 역사는 새로운 자연을 보여줍니다. <쥬라기 공원>처럼, 유전 공학은 공룡들을 복원하고 합성합니다. <메그>처럼, 여전히 어딘가에는 고대 야수가 돌아다닐지 모릅니다. <식수 전쟁 2017>처럼, 극심한 기후 변화는 평범한 고등학생 인생을 완전히 뒤바꿉니다. <인간 종말 리포트>처럼, 산업 자본주의는 유전 공학을 이용해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동물 권리를 침해하고, 여자들을 억압합니다.
이런 소설들과 게임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수많은 방법들로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에서 자연 생태계가 필수적인 소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SF 세상에서 자연 생태계는 대중적인 소재이고, 수많은 우주 탐사물들, 스페이스 오페라들, 대체 역사들, 바이오펑크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비경 탐험들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허접한 3류 거대 괴수부터 장엄한 외계 소행성 공학까지, 사이언스 픽션들은 온갖 방법들로 자연 생태계를 표현합니다. 어떤 소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보여주고, 어떤 영화는 거대 바다 괴수를 보여주고, 어떤 비디오 게임은 새로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모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에 속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온갖 방법들로 자연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들은 생태학 SF 하위 장르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공식적인 표준 하위 장르가 아니나, 평론가들이 생태학 SF 장르를 분류한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닐 겁니다. <식물 아내>와 <쥬라기 공원>과 <인간 종말 리포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와 <니치>에게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자연 생태계, 진화 역사, 생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평론가들은 이런 것들을 생태학 SF 장르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라는 행성급 환경 오염, 지질학적 재앙 시대에 생태학 SF 장르에게는 커다란 가치가 있을 겁니다.
만약 사람들이 창작물들을 이용해 자연 생태계를 느끼고 싶다면, 사람들은 이른바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찾아야 할 겁니다. 주류 문학들보다 훨씬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훨씬 거시적이고 근본적으로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주류 문학들 역시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나, 주류 문학들은 자연 생태계보다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을 보세요.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은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청률 40%에 육박하는 인기 드라마부터 콩가루 집안을 강조하는 신파적인 드라마까지, 다들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에서 기후 변화, 유전자 조작 작물, 생태계 교란, 쓰레기 섬, 생물 다양성 감소는 핵심 소재가 아닙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든, 핵 발전소가 반영구적인 산업 폐기물을 묻든, 영리 기업들이 유전자 조작 작물들을 만들든,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기후 변화, 유전자 조작 작물, 생태계 교란, 쓰레기 섬, 생물 다양성 감소는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어울립니다. 주류 문학이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런 이야기는 제한적인 시각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에서 미래 인류가 초대형 고리 구조물을 짓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우주 거주지와 새로운 자연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우주 거주지와 새로운 자연은 자연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새로운 자연을 만든다면, 먼저 인류 문명은 자연이 무엇인지 규정해야 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토론하는 것처럼, 우주 거주지, 바이오 돔, 테라포밍은 자연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연을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생명 현상과 진화 역사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에게는 오직 제한적인 시각만 있습니다. 주류 문학은 제한적인 시각으로 진화 역사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이 생명 현상과 진화 역사를 돌아보고 싶다면, 주류 문학은 SF 장르 경계선을 넘어가야 합니다. 적어도 주류 문학은 슬립스트림, 경계 문학이 되어야 합니다. 주류 문학은 삼림이 싱그럽고 울창하다고 예찬할 수 있으나, 주류 문학은 38억 년 진화 역사를 고찰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에게 이런 과제는 쉽지 않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처럼, 우주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초대형 원통을 짓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는 동안, 주류 문학은 제한적인 시각으로 그저 자연을 예찬할 뿐입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어떻게 생명 현상이 나타나는지 모방할 수 있으나, 주류 문학은 하지 못합니다.
[우주 거주지를 건조하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연이 무엇인지 논의해야 할 겁니다.]
이건 자연을 이야기하기 위해 창작물이 반드시 규모를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물이 초거대 원통 우주선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창작물은 자연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연이 웅장하다고 말하나, 아무리 규모가 웅장하다고 해도, 여기에 생명력이 없다면, 웅장한 규모는 '자연'이 되지 못할 겁니다. 만약 나이아가라 폭포가 모래 사막이라면,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모래 사막보다 작은 웅덩이가 훨씬 싱그럽고 생생하다고 느낄 겁니다. <소멸의 땅>에서 생물학자가 웅덩이 생태계에 관심을 쏟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규모보다 생명력일 겁니다.
만화 수필 <독립 생활 다이어리>에서 다카기 나오코는 차조기 화분에서 생명력과 계절 변화를 느낍니다. 작은 화분에서 차조기는 쑥쑥 자라고 무성한 잎들을 펼칩니다. 다카기 나오코가 차조기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다카기 나오코는 신나게 차조기 잎들을 뜯어먹습니다. 차조기 화분은 썰렁해졌으나, 얼마 후 다시 차조기 줄기는 무성한 잎들을 펼쳤고, 다카기 나오코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낍니다. 하지만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차조기는 시들었고,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도 다카기 나오코는 차조기를 보고 계절이 바뀐다고 느낍니다. 이런 일화는 사소하고 일상적이나, 웅장한 규모 없이, 창작물은 오직 작은 차조기 화분만으로도 자연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류 문명보다 자연 환경이 훨씬 원초적이고 거대하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존재했습니다. 고생대 동식물들과 미생물들이 복잡한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는 동안,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생명 진화 역사에서, 지구 행성 역사에서 아주 나중에 인류 문명은 나타났습니다. 자연에서 인류가 비롯했기 때문에, 인류보다 자연이 훨씬 원초적이기 때문에, 자연 없이 인류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이 드넓게 퍼졌기 때문에, 인류보다 자연은 훨씬 거대합니다. 인류 문명은 반드시 이런 원초적이고 거대한 자연 환경에 의지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북극 이누이트부터 아마존 열대 밀림 인디언까지, 먹고 살기 위해 모든 인류는 보편적으로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자연 환경 없이, 인류는 재화(가치)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자연 환경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자연 환경은 절대 개인적인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태학자가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생태학자가 되지 못할 겁니다. 애석하게도 자본주의 체계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수많은 생태학자들은 진짜 생태학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기계적이고 딱딱한 지식들을 읊조리는 좀비들에 불과합니다. 지질학적 단위에서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킴에도, 이런 좀비 생태학자들은 자본주의를 찬양합니다.
이런 좀비 생태학자들은 생태학보다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공유지의 비극 같은 헛소리를 주절거립니다. 지질학적 단위에서 자본주의가 부정적인 재앙을 일으킴에도, 좀비 생태학은 지질학적 생태 재앙보다 공유지의 비극 같은 헛소리를 주절거리기 원합니다. 현실 속에서 아무도 공유지의 비극을 직접 증명한 적이 없음에도, 오히려 수많은 사례들이 공유지를 이용해 지배 계급에게 저항했음에도, 좀비 생태학은 광신적으로 헛소리를 추구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부터 반다나 시바까지, 급진적인 사상들은 이런 헛소리에 반박합니다. 비록 여러 급진적인 사상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급진적인 사상들은 공유지의 비극 같은 헛소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썩어문드러지는 좀비 생태학과 달리, 진정한 생태학은 자연 환경 공유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진정한 생태학보다 좀비 생태학을 추구합니다. 아무리 환경 아포칼립스가 처참한 자연 생태계 붕괴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처참하게 붕괴한다고 해도, 오히려 환경 아포칼립스는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좀비 생태학을 피하지 못합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좀비가 됩니다.
만약 급진적인 사상들이 자연 환경 공유를 주장한다면, 좀비 생태학은 소비에트 연방을 운운하고 공유 사회가 독재 사회라고 반박할 겁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숱한 탄압들과 어려움들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권은 공유 사회를 이룩하기 원했으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사회주의 운동권을 짓밟았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 수탈이 문제라고 '공식적으로' 지적했고 식민지 독립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코민테른은 온갖 뻘짓들과 삽질들을 늘어놨으나, 그렇다고 해도 코민테른은 식민지 수탈을 '공식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사실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자본주의는 너무 끔찍하게 식민지들을 수탈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자본주의는 훨씬 폭력적입니다. 우리가 인디언들과 원주민들을 제외하고 오직 흑인 노예들만 계산한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은 감히 자본주의 폭력에 까불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조차 서구 자본주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폭력적인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좀비 생태학은 절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런 좀비 생태학을 따릅니다. 생태학 SF 장르 역시 좀비가 됩니다.
여전히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도, 환경 오염들이 빈부 격차들을 양산함에도, 깡마른 아이 앞에서 엄마가 수치와 자괴감과 고통에 몸부림침에도, 생태학 SF 장르는 좀비가 됩니다. SF 팬들이 생태학 SF 장르를 평가한다면, 생태학 SF 팬들은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들은 온갖 방법들로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 안에는 온갖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있습니다. 외계 행성의 바이오스피어 건물부터 링월드 속의 새로운 생태계까지, 생태학 SF 장르는 경이롭고 웅장한 시각을 제시합니다.
여섯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보다 자연 환경은 훨씬 원초적이고 거대합니다. 그래서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이 자연 환경을 근본적으로 논의하고 싶다면,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원초적이고 거대한 시각을 제시해야 합니다. 주류 문학은 이런 시각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진화 역사에는 거대한 격차들이 있고, 미래에도 이런 격차들은 나타날 겁니다. 주류 문학은 이것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진화 역사를 폭넓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니치> 같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언뜻 이런 게임은 단순하고 유치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임은 생명 진화 역사를 다시 이야기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숱한 놀림들과 조롱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유치하다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자연 생태계를 강조하기 원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망작이 되고 유치뽕짝이 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자연 생태계를 강조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알파 센타우리>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행성 환경과 공유 사회를 감동적으로 연출합니다. 반면,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은 진화 역사와 생물 다양성보다 본부장과 회사 경영을 떠듭니다. 중요한 것은 진화 역사와 생물 다양성보다 본부장과 회사 경영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 환경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본부장 앞에서 진화 역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회사 경영 앞에서 생물 다양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창작물이 반드시 자연 생태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보다 자연 생태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고작 자본주의 따위보다 자연 생태계가 백 배, 천 배, 만 배, 영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수두룩한 TV 드라마들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훨씬 중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가부장적인 우주 전쟁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알파 센타우리>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생태적인 상상력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오직 자연 생태계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에는 여러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연 생태계가 원초적이고 거대하다고 해도, 자연 생태계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자연 생태계는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소설들이 중요한 것처럼, 주류 문학들과 다른 장르들 역시 중요합니다. 어떤 문제는 아주 개인적이고,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보다 주류 문학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태학 SF 소설조차 개인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밑도 끝도 없이, 생태학 SF 소설은 오직 생태적인 상상력만 떠들지 못합니다.
게다가 생태학 SF 소설이 자연 환경을 묘사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편파적인 시각이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생태학 SF 소설이 자연 생태계를 편파적으로 왜곡한다면, SF 독자들은 주류 문학보다 생태학 SF 소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못할 겁니다.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소재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미 고대 신화들이 자연 환경을 이용해 거대 괴수들을 늘어놨기 때문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여기에 근대 과학들을 덧붙이고 계속 폭력을 떠듭니다. 공룡 사파리 영화가 오직 살육만 보여준다면,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생태적인 상상력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고대 신화들에는 온갖 거대 괴수들이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이런 괴수들을 모방합니다. 중세 판타지에서 가장 유명한 거대 괴수들은 드래곤과 크라켄과 레비아탄일 겁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사변 장르는 자연 과학을 덧붙이나, 여전히 사변 장르는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합니다. 거대 괴수는 자연 환경이 웅장하다고 과장할 수 있고, 사변 장르는 이런 경이로운 과장을 사랑합니다. 고대 신화와 달리, 근대 과학에는 창조신이 없습니다.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창조신보다 진화 이론과 환경 오염을 이용해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야생 동물이 기이하게 진화하고 거대 괴수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진화가 아주 창조적이기 때문에, 진화는 우주 드래곤(!)을 만들 수 있습니다. 19세기 서구 자본주의는 무지막지한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고, 심지어 20세기 자본주의는 전략 병기와 기후 변화로 이어집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전략 병기와 기후 변화가 자연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돌연변이 거대 괴수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세 판타지에 드래곤과 크라켄과 레비아탄이 있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얼마든지 거대 괴수를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창작물들에서 이런 거대 괴수는 살아있는 상호 작용보다 싸움, 파괴, 살육을 강조합니다.
생태학 SF 장르가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왜곡하고 편견을 강조한다면, 주류 문학보다 이런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이 나을 수 있나요? 생태학 SF 장르는 중요하나, 생태학 SF 장르는 절대적이고 우월한 위상을 확립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창작물들이 자연 생태계를 표현하는지 우리가 알기 원한다면, 생태학 SF 장르는 아주 유용할 겁니다. 우주에서 미래 인류 문명이 초거대 고리 거주지를 짓고 거기에 자연 생태계를 집어넣는다면, 미래 인류 문명은 직접 자연 생태계를 배치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SF 장르는 어떻게 자연 환경이 순환하고 문명과 영향을 교환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태학 SF 장르와 달리,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이 자연 환경에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연 환경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자연 환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수두룩한 TV 드라마들은 살아있는 상호 작용보다 경영 승계와 재벌 가문을 중시합니다. 언제나 창작물보다 '현실 속의 생산 조건'은 훨씬 중요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연이 소중한지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중국 대기 오염을 힐난하나, 남한 사람들은 지질학적 행성급 환경 오염에 눈꼽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거대 포식자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배틀 로얄이 아닙니다.]
사실 대기 오염보다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한 문제임에도, 남한 사람들은 서구 자본주의보다 중국을 힐난합니다. 산업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는 절대 1면 기사가 되지 못합니다. 기후 변화가 1면 기사가 된다고 해도, 이런 신문 기사는 기후 변화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자연을 무시하고 자본주의를 숭배합니다. 우리는 모성적인 자연보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우리를 먹여살린다고 착각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착각입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건 피지배 계급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심각한 착각을 우리에게 계속 주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구 근대화가 자연 환경을 정복했다고 떠들고 자연 환경을 무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학 SF 장르는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장르가 거시적으로 자연을 고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태학 SF 장르를 이용해 자연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생태학 SF 장르가 좀비 생태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는 절대적인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태학 SF 장르에게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 환경을 고찰하고 싶다면, 생태학 SF 장르는 아주 유용한 창문이 될 겁니다. 우리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창문으로 자연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그림 <Stanford Torus> 출처: SMPritchard, http://fav.me/d9l3j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