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과 조산술 테라포밍, Cli-Fi 장르 본문
[이런 행성 환경 변화는 Cli-Fi 장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의 행성 변화는 어떤가요?]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은 전형적인 초인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초인들은 훨씬 놀라운 능력들을 발휘합니다. 종종 초인들은 이런 초능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초능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인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초인들을 외면하고, 차별하고, 심지어 죽이기 원합니다. 어디에서든 초인들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차별과 소외를 피하기 위해 초인들은 게토를 형성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소설 <스페인의 거지들>과 영화 <엑스맨>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설 <이상한 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소설 <갈매기의 꿈>과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조차 이런 이야기 구도를 따릅니다.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초능력자보다 마법사이나, 초능력자와 마법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습니다. 엘사는 엄청난 빙결 능력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엘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엘사는 빙결 능력으로 사람들을 꽁꽁 얼릴지 모릅니다. 엘사에게 이건 뛰어난 얼음 마법보다 저주입니다. 이것 때문에, 엘사는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안나는 차별과 소외, 고립에서 엘사를 구하기 원합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 리빙스턴은 초인이 아니나, 나중에 조나단은 초인이 됩니다. 조나단은 많은 차별들과 소외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조나단은 초인이 되고 놀라운 순간 이동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을 위해 조나단은 심각한 차별들과 소외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설 <갈매기의 꿈>과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비단 <갈매기의 꿈>만 아니라 다른 많은 초인 이야기들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다른 초인 이야기들보다 <다섯 번째 계절>은 훨씬 처절하고 무시무시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와 달리, 노라 제미신은 초능력과 차별을 이용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다섯 번째 계절>은 처절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 소설이 어린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을 연이어 비교하고 대조하기 때문에, 독자는 어떻게 사람들이 초인들을 차별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소녀 다마야는 너무 어립니다. 어린 다마야는 아직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합니다. 독자와 다마야는 닮았습니다. 독자는 초인 오로진들이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린 다마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와 다마야는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어떻게 오로진들이 가시밭길을 걷는지 직접 겪습니다. 다마야는 아직 어리나, 어른 오로진이 아이 오로진과 다른가요? 그건 아닙니다. 시에나이트는 성인이나, 시에나이트 역시 가시밭길을 걷습니다.
시에나이트가 성인이기 때문에, 시에나이트는 훨씬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합니다. 엄마 에쑨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엄마 에쑨은 비극과 만나야 합니다. 에쑨은 인사불성이 되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합니다. 소설 초반에 <다섯 번째 계절>은 비극과 학살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차별과 소외를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끔찍한 복수와 학살을 미화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 소녀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을 대조하고 억압적인 세상 물정을 늘어놓기 때문에, 이 소설은 처절하고 참혹합니다. 수호자가 오로진을 찾아온다면, 초인 이야기에서 공포 이야기로 이 소설은 돌변할 겁니다.
아무리 <엑스맨>과 <갈매기의 꿈>과 <겨울 왕국>이 차별과 소외를 강조한다고 해도, <엑스맨>과 <갈매기의 꿈>과 <겨울 왕국>은 이런 수준에 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계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오직 이것만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초인들은 행성 환경과 직접 관계를 맺습니다. 행성 지질은 불안정하고, 지진은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진은 또 다른 '계절'이 되고 인류 문명을 멸망시킬지 모릅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비단 초인 장르만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입니다. 너무 거대한 지진이 또 다른 '계절'이 되었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멸망했고, 또 다른 문명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초인들은 지진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초능력 갈매기들은 창공과 교감하지 않습니다. 영화 <엑스맨>에서 돌연변이들은 진화 생명 역사와 교감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얼음 정령들과 교감하지 않습니다. 어떤 팬들은 엘사가 애니메이션 <가디언즈>의 잭 프로스트와 사귄다고 설정 놀음을 즐기고, 이런 설정 놀음 속에서 엘사와 잭 프로스트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이런 동인 만화(링크)가 보여주는 것처럼, 엘사와 잭 프로스트 커플은 100점 만점에 300점짜리입니다. 엘사와 잭 프로스트는 똑같이 빙결 속성이고, 비슷한 장르에 속하고, 비슷한 고민을 품고, 이런 것들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엘사와 잭 프로스트는 달달한 커플이 될 겁니다. 안타깝게도 엘사와 잭 프로스트는 공식적인 연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팬들이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엘사와 잭 프로스트가 사귀기보다 모스라와 고지라가 끈적끈적하게 원 나이트 스탠드를 때리기는 훨씬 쉬울 겁니다. 다행히 수많은 동인들이 엘사와 잭 커플을 응원하기 때문에, 설정 놀음을 즐기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엘사와 잭을 응원하는 동인분들이여, 힘내시길….) 하지만 아무리 엘사와 잭 프로스트가 모태 솔로의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 화기애애한 눈덩이를 던지는 환상 케미 커플이라고 해도,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겨울'과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반면,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오로진들은 아버지 대지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주변 환경, 행성과 직접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에는 (문자 그대로) 행성급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갈매기의 꿈>과 <엑스맨>과 <겨울 왕국>과 다른 많은 초인 이야기들은 (자연) 환경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자연) 환경과 초능력 사이에는 아무 교차점이 없습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에서 이른바 조산술과 불안정한 지질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국에는 뛰어난 지질학자들이 있습니다. 대지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질학 이외에 다른 과학 분야들은 크게 발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인류 문명에는 기계 장치들이 있으나, 이런 기계 장치들은 미숙한 스팀펑크 같습니다. 다들 대포가 최신 병기라고 생각합니다. 대포가 최신 병기임에도, 인류 문명은 기계 장치들을 이용합니다. 어떻게 인류 문명이 기계 장치들을 이용함에도, 대포가 최신 병기일 수 있나요? 인류 문명이 오직 지질학에만 비용을 쏟기 때문에? 다른 과학 분야들보다 지질학이 우선 사항이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대지불을 운운합니다. 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 프레멘들이 사막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불안정한 대지 위에서 사람들은 대지불을 운운해야 합니다. 오로진들은 이런 불안정한 대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소설 <듄>은 사막 행성 환경을 이용해 사회, 종교, 문화, 생태계, 초인을 복잡하게 얽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에서 초능력, 불안정한 행성 환경, 과학 분야와 스팀펑크, 문화와 관습은 복잡하게 얽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관계들'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초인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사람들은 오직 초능력만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아무리 <겨울 왕국>이 초대박 인기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엘사와 아렌델 왕국 문화와 자연 환경을 함께 고려하지 않습니다. 엘사는 오직 엘사일 뿐입니다. 아무리 엘사가 사방을 얼리고, 야생 동물들이 먹이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생태 재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엘사는 소설 <고양이 요람>의 아이스 나인과 다르고, 계절 변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은 어떻게 '계절 변화'가 사회 구조, 문화와 관습, 과학 분야, 초능력에 영향을 미치는지 묘사합니다. 독자는 오직 초능력만 읽지 않습니다. 독자는 행성 환경, 사회 구조, 문화와 관습, 과학 분야, 초능력을 함께 읽습니다. 독자는 체계, 환경, 상호 작용을 함께 읽습니다. 소설 <듄>이 사막 행성 환경을 이용해 사회, 종교, 문화, 생태계, 초인을 복잡하게 얽는 것처럼,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붉은 화성>이 화성 테라포밍을 이용해 사회, 문화, 생태계, 새로운 문명을 복잡하게 얽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 역시 행성 환경이 인류 문명을 둘러쌌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에는 거대한 테두리, 환경이 있습니다. 초능력은 그저 초능력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초능력은 거대한 테두리, 환경으로 이어집니다. 독자가 소설 <듄>과 소설 <붉은 화성>을 좋아한다면, 독자는 <다섯 번째 계절>이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세 소설들은 모두 장기적인 환경 변화와 행성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조산술은 테라포밍입니다. 오로진들이 대지를 흔들고 제어하기 때문에, 조산술은 충분히 테라포밍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겨울 왕국>에서 엘사가 사방을 얼린다고 해도, <겨울 왕국>은 테라포밍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은 테라포밍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초능력(조산술)을 이용해 테라포밍합니다.
<겨울 왕국>과 <다섯 번째 계절>이 똑같이 '가혹한 계절 변화'를 보여준다고 해도, <겨울 왕국>은 장기적인 환경 변화를 걱정하지 않으나, <다섯 번째 계절>에서 장기적인 환경 변화는 핵심적인 걱정거리입니다. <겨울 왕국>은 테라포밍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나, <다섯 번째 계절>은 테라포밍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겨울 왕국>보다 <다섯 번째 계절>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겨울 왕국>은 재미있는 가족 뮤지컬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다섯 번째 계절>이 지루하고 한심하고 따분하다고 느낄 겁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 비단 초능력만 아니라 테라포밍 역시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이 게시글은 그저 <겨울 왕국>과 <다섯 번째 계절>을 비교할 뿐입니다.
시에나이트가 감탄하는 것처럼, 열 반지 알라배스터는 '자연 현상을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반신 마우이가 자연 현상을 조절하는 것처럼, 알라배스터는 자연 현상을 다시 씁니다. 그래서 소설 <듄>과 소설 <붉은 화성>이 테라포밍 소설인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은 자연 현상을 다시 쓰고 테라포밍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듄>과 <붉은 화성>에는 자연 생태계가 있습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은 자연 생태계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 아버지 대지를 말하는 것처럼, <붉은 화성>은 어머니 자연을 말할 수 있습니다.
메마르고 삭막한 아버지 대지와 달리, 어머니 자연은 풍요롭고 싱그럽습니다. <듄>과 <붉은 화성>과 <다섯 번째 계절>이 '똑같이 행성 환경 변화를 거시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듄>과 <붉은 화성>은 행성 생태학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 지질학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듄>과 <붉은 화성>에는 행성 생태학이 있고, <다섯 번째 계절>에는 행성 지질학이 있습니다. 세 소설들이 똑같이 거시적인 환경 변화를 묘사한다고 해도, 생태학과 지질학은 다릅니다. 비디오 게임 <프롬 더스트>와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을 보세요. 두 게임은 모두 '환경 변화를 거시적으로 묘사'합니다.
<프롬 더스트>는 해일을 막고, 화산을 터뜨리고, 강물을 흘리고, 토산(土山)을 옮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생태학이 없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녹색 식물 막대를 채운다고 해도, 커다란 정원사 꿈틀이들이 형형색색 식물들을 심는다고 해도, <프롬 더스트>에서 생태학은 미흡합니다. 반면, 제목 '녹색 행성'처럼,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무수한 생명체들이 퍼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은 직접 보여주지 않으나, 어쩌면 바닷속에서 장수 거북들과 혹등고래들과 고래 상어들은 장대하게 헤엄치는지 모릅니다. <프롬 더스트>는 고대 신화 판타지이고, <그린 플래닛>은 하드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르 차이 이외에, <프롬 더스트>와 <그랜 플래닛>에서 지질학과 생태학 역시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창작물이 거시적인 환경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거시적인 환경 변화는 생태학보다 다른 분야들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듄>과 <붉은 화성>이 행성 생태학에 치중하기 때문에, 두 소설은 비단 테라포밍 소설만 아니라 기후 장르(climate fiction, Cli-Fi)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섯 번째 계절>이 거시적인 행성 변화와 테라포밍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소설이 기후 장르에 속할 수 있나요? 많은 SF 독자들은 고개들을 저을 겁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듄>과 <붉은 화성>에게 영향을 받았고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을 썼습니다.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Cli-Fi 장르를 이용해 기후 변화와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듄>과 <붉은 화성> 같은 기후 장르는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듄>이 자유 시장 경제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후 장르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고, 기후 장르에게는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하기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막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유 시장 경제를 청산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저항 운동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봉쇄합니다.
자본주의가 저항 운동들을 짓밟고 학살하고 고립시키기 때문에,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막기는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은 비단 고인 물뿐만 아니라 썩은 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억압적인 썩은 물 소비에트 연방을 만드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절대 싱그러운 녹색이 되지 못합니다. 기후 장르가 시각을 넓힌다면, 기후 장르는 비단 생물 다양성 감소만 아니라 이런 저항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듄>은 원주민 독립 운동을 보여주고, <붉은 화성>은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을 따집니다. 심지어 SF 독자들은 윌리엄 모리스가 쓴 <에코토피아 뉴스>와 샬롯 퍼킨스 길먼이 쓴 <Moving the Mountain>을 기후 장르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장르는 후천적입니다. 19세기 후반 생태 유토피아는 21세기 초반 거대 괴수 테라포밍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Moving the Mountain>은 기후 장르에 '후천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Moving the Mountain>이 전형적인 기후 장르가 아니라고 해도, 두 소설이 선구적으로 환경 보호와 저항 운동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이 차별과 소외와 처절한 저항을 보여준다고 해도, 이런 차별과 소외와 저항이 거시적인 행성 환경 변화와 어울린다고 해도, <다섯 번째 계절>은 기후 장르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듄>과 <붉은 화성>이 자연 생태계 변화를 묘사하기 때문에, 두 소설은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Moving the Mountai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계절>이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갈 수 있나요? 행성 지질학이 생태적인 상상력인가요? 나오미 오레스케스가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다고 해도,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소설 형식을 이용해 기후 변화와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못할 겁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기후 장르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만약 <다섯 번째 계절>이 Cli-Fi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어떤가요? 분명히 <괴수 행성> 시리즈는 테라포밍을 보여줍니다.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는 아주 장기적인 생태계 변화가 있습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기후 변화를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듄>과 <붉은 화성>처럼, <괴수 행성> 시리즈가 장기적인 테라포밍, 생태계 변화를 전망하기 때문에, <괴수 행성> 시리즈는 Cli-Fi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듄>과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 사이에는 여러 근본적인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SF 팬들은 이런 공통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괴수 행성>이 기후 장르가 아니라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은 친근한 이웃 사촌이 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괴수 행성>이 Cli-Fi 울타리에 들어가거나 이웃 사촌이 될 수 있다면,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어떤가요? 영화 속에서 기도라는 노골적으로 폭풍우를 몰고 다닙니다.
기도라에게 엄청난 폭풍우는 둥지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도시 속에서 해군 함선들은 '항해'할 수 있습니다. 모스라는 신성한 빛을 뿌리고 비구름들을 몰아냅니다. 모스라 역시 기상 현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모스라는 날아다니는 생체 기후 조절 장치 같습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원한다면, 모스라는 아주 유용한 (생체) 기후 조절 장치가 될지 모릅니다. 소설 <듄>과 소설 <붉은 화성>에서 기후를 조절하기 위해 프레멘들과 개척 과학자들은 고생했으나, 모스라는 간단한 날갯짓으로 비구름들을 날립니다. 이건 뉴욕에서 나방이 날갯짓하면 베이징에 폭풍이 몰려오는 수준…이 아니나, 분명히 모스라는 엄청난 환경 변화를 유발합니다.
이런 환경 변화가 농담거리라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은 환경 오염들을 걱정합니다. 이런 걱정이 얄팍한 환경 운동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 역시 Cli-Fi 울타리에 들어가거나 친근한 이웃 사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환경 변화 이야기들과 <다섯 번째 계절>은 다릅니다. 이런 환경 변화 이야기들 이외에, 다른 환경 변화 이야기들은 어떤가요? 어떤 관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과 비디오 게임 <엔들리스 레전드>는 많이 닮았습니다. <엔들리스 레전드>는 중세 판타지 같으나, 이 게임은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습니다. 고대 문명은 여러 생명체들을 실험했고, 생명체들은 아우리가 행성을 뒤덮었고, 고대 문명은 사라졌습니다.
고대 문명이 사라진 이후, 과학 기술은 마법 주문이 되었고, 행성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엔들리스 레전드>는 '기후 변화'를 걱정합니다.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아우리가 행성 세력들에게 기후 변화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온난화를 걱정하나, 아우리가 세력들은 영원한 겨울을 걱정합니다. 심지어 어떤 세력은 '우주선'을 건조하고 아우리가 행성을 떠나기 원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을 뒤섞고 장기적인 행성 환경 변화와 '가혹한 계절 변화'를 묘사하는 것처럼, <엔들리스 레전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서 후투아 부족 역시 생태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가끔 행성 시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끔 아우리가 시점에서 <엔들리스 레전드>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어머니 행성 아우리가가 기후 장르에 들어갈 수 있나요? 소설 <듄>과 소설 <붉은 화성>과 게임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Cli-Fi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엔들리스 레전드>가 가혹한 계절 변화를 걱정한다고 해도, 이 게임이 Cli-Fi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아니, <엔들리스 레전드>가 전형적인 기후 장르가 아니라고 해도, SF 팬들이 <엔들리스 레전드>를 Cli-Fi 울타리에서 쫓아내야 하나요? 이 게임에서 기후 변화가 가장 커다란 고민임에도? 어떤 SF 팬들은 <엔들리스 레전드>가 Cli-Fi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고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또 다른 SF 팬들은 화를 벌컥 내고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Cli-Fi 장르가 되는지 반박할 겁니다. 이렇게 SF 팬들은 비교하고 대조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장기적인 환경 변화, 행성 변화, 기후 변화 설정를 좋아하기 때문에, <듄>과 <프롬 더스트>부터 <다섯 번째 계절>과 <엔들리스 레전드>까지, 말자 할머니는 이런 창작물을 모두 좋아합니다. 반면, 아랫집 수진은 행성 생태학을 좋아합니다. 아랫집 수진 역시 장기적인 환경 변화 설정을 좋아하나, 아랫집 수진은 행성 생태학을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이 <듄>과 <붉은 화성>을 좋아하고, <듄>과 <붉은 화성>과 <다섯 번째 계절>이 똑같이 행성 환경 변화를 거시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다섯 번째 계절>이 섭섭하다고 느낍니다.
행성 생태학과 거시적인 생태계 변화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듄>과 <붉은 화성>을 좋아하고, <다섯 번째 계절>은 섭섭합니다. SF 팬들이 장르 경계선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SF 팬들은 장기적인 행성 변화, 환경 변화 이야기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SF 팬들은 그들이 무엇을 훨씬 좋아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장르 덕후들에게 이런 비교 및 대조 과정은 중요합니다. 물론 <다섯 번째 계절>은 전부가 아닙니다. 이른바 '부서진 대지 3부작'에는 <다섯 번째 계절> 이외에 다른 두 편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 1편이기 때문에, 다른 두 편은 훨씬 놀랍고 거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사실 <다섯 번째 계절>은 행성 환경을 전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오직 일부만 이야기합니다. 인류 문명과 과학 기술과 초능력과 행성 환경은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을 맺습니다. 심지어 이런 설정은 스팀펑크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에서 노라 제미신은 과학 기술들을 운운했을 겁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이 <듄> 및 <붉은 화성>과 다르다고 해도, 분명히 '부서진 대지' 3부작은 행성 환경 변화를 웅장하게 묘사합니다. 그래서 부서진 대지 3부작은 기후 장르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1편 <다섯 번째 계절>은 이것을 전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건 다소 치사(?)합니다.
[이런 기후 변화가 Cli-Fi 장르가 아니라고 해도, 행성 변화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행성 환경 변화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원한다면, 아랫집 수진은 3부작을 모두 읽어야 합니다. 아랫집 수진이 3부작을 모두 읽는다면, 아랫집 수진은 부서진 대지 3부작을 다른 행성 변화 이야기들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Cli-Fi 장르에서 행성 환경 변화는 환경 오염들을 비판하기 위한 소재입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에서도 과학 기술 발전, 산업 동력원, 환경 오염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그래서 부서진 대지 3부작이 Cli-Fi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부서진 대지 3부작과 다른 행성 변화 이야기들에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창백한 푸른 점>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SF 독자들이 <창백한 푸른 점>을 좋아하는 것처럼, 부서진 대지 3부작과 기후 장르는 어울릴지 모릅니다.
솔직히 <프롬 더스트>부터 <듄>, <붉은 화성>, <다섯 번째 계절>,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 <엔들리스 레전드>까지, 현실에서 이런 행성 변화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이런 행성 변화들이 없음에도, 왜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고 듣기 원하나요?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 변화들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21세기 초반 우리에게 기후 변화는 가장 심각한 행성 변화입니다. 기후 변화는 온갖 행성 변화 설정들을 만들기 위한 생산 조건이 됩니다. 아랫집 수진이 생태학 SF, 테라포밍 설정, Cli-Fi 울타리를 확실하게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이런 생산 조건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장르를 완전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르는 흐릅니다. 강물이 꾸준히 흐르는 것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장르는 흐릅니다. 미래에 SF 작가들은 새로운 생태학 SF, 새로운 테라포밍 설정, 새로운 Cli-Fi 울타리를 만들지 모릅니다. 아랫집 수진이 그것들을 알기 원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아랫집 수진은 그것들을 절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다고 인식하는 것처럼, 미래 SF 작가들은 상호 작용을 인식할 겁니다.
그들은 이런 생산 조건으로 새로운 생태학 SF, 새로운 테라포밍 설정, 새로운 Cli-Fi 울타리를 만들 겁니다. 이런 생산 조건 위에서 아랫집 수진은 여러 행성 변화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랫집 수진이 부서진 대지 3부작을 모두 읽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국내에서 한국어 번역본은 오직 <다섯 번째 계절>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팬들이 언제 엘사와 잭 프로스트가 공식적으로 사귀는지 기다리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언제 두 편이 나오는지 오매불망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