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레비아탄 비행선과 향유 고래의 이미지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레비아탄 비행선과 향유 고래의 이미지

OneTiger 2017. 4. 23. 20:00

소설 <레비아탄> 시리즈는 내용만큼 독특한 삽화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은 생체 병기와 보행 병기를 소재로 삼았고, 소설의 삽화가 키스 톰슨은 독특한 화풍으로 그런 병기들을 묘사했습니다. 육상 드레드노트의 웅장하고 복잡한 구조, 베헤모스의 기괴하고 흉측한 몸뚱이, 고풍스럽거나 딱딱한 문양과 장식 등이 그러합니다. 화보를 만들어도 좋을 듯한 그림들이죠. 아니, 사실 <Manual of Aeronautics>이라는 화보집이 있군요. 그런데 한 가지 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키스 톰슨은 소설의 주연 함선인 레비아탄을 향유 고래처럼 그렸습니다. 직사각형 머리통은 어디로 보나 분명히 향유 고래입니다. 레비아탄이 실제 향유 고래라는 뜻이 아닙니다. 향유 고래와 그만큼 닮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레비아탄은 굉장히 빠른 함선입니다. 소설 속의 영국군은 각종 생체 함선들을 보유했는데, 레비아탄은 그 중에서 제일 빠른 함선에 속합니다. 아마 독일군의 기계 비행선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여하튼 문제는 실제 향유 고래는 그렇게 빠른 동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솔직히 그 네모난 머리통을 봐도 별로 빠를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를 내고 싶다면, 유선형이 어울리겠죠. 실제 비행선이나 잠수함도 모두 유선형이잖아요. 참다랑어처럼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물고기도 유선형입니다.


물론 <레비아탄>은 사이언스 픽션(스팀펑크)이고, 뭔가 설정을 붙일 수 있죠. 겉보기는 느릴 것 같지만, 사실 레비아탄이 정말 빠른 함선이라고 설정할 수 있겠죠. 사이언스 픽션의 설정이 반드시 현실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빠른 함선이라는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레비아탄의 모델은 향유 고래가 아니라 긴수염 고래나 브라이드 고래가 되었어야 했을 겁니다. 이런 유선형 고래들이 향유 고래보다 훨씬 빠르거든요. 허먼 멜빌의 <백경>을 보면, 어느 멍청한 포경선이 긴수염 고래를 쫓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긴수염 고래는 엄청나게 빨리 헤엄치기 때문에 포경선이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고, 그래서 주인공 선원은 그 멍청한 포경선이 헛수고를 한다고 생각했죠. 사실 향유 고래의 특기는 수영 속도가 아니라 잠수 깊이입니다. 향유 고래는 가장 깊이 잠수하는 포유류이고, 덕분에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유명합니다.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어두운 물결을 헤치는 향유 고래의 이미지는 널리 알려졌죠. 만약 레비아탄이 비행선이 아니라 잠수함이었다면, 향유 고래의 이미지가 잠수함에 어울렸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레비아탄은 가장 빠른 비행선이죠.


어쩌면 키스 톰슨은 고래의 이미지 따위에 별로 신경을 안 썼을지 모르겠습니다. 향유 고래는 빠른 고래가 아니지만, 솔직히 어느 독자가 고래의 이미지에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겠어요. 게다가 향유 고래가 긴수염 고래보다 훨씬 전투적으로 보이잖아요. 키스 톰슨은 그런 전투적인 이미지가 레비아탄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모카 딕 같은 향유 고래는 포경선을 깨부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향유 고래가 바다 괴수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긴수염 고래나 브라이드 고래 등은 (실제 생태에 상관없이) 평화로운 거인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육식동물이지만, 호랑이나 악어처럼 먹이를 사냥하고 찢어발기는 장면과 어울리지 않죠. 반면, 향유 고래는 상당히 전투적입니다. 사람들은 향유 고래가 어둡고 깊은 바다 밑에서 거대한 오징어와 치열하게 싸운다고 상상합니다. 그 거대하고 어두운 싸움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심지어 <유년기의 끝>에서는 외계인들이 그 장면을 박제로 보존하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키스 톰슨은 이런 전투적 이미지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저도 유선형 레비아탄보다 향유 고래처럼 생긴 레비아탄이 훨씬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아무래도 딱딱한 직선이 유연한 곡선보다 더 강해 보인다고 할까요. 향유 고래의 머리 부분은 상당히 독특하게 생겼기 때문에 개성을 부여하기 좋고요. 키스 톰슨의 속뜻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화보집을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어쨌든 로망과 고증이 항상 일치하는 법은 아닙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