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던전 III>가 스팀펑크를 묘사하는 이유 본문
[이런 기계 장치와 전기 불빛들은 중세 판타지보다 스팀펑크에 가깝죠. 하지만 왜 스팀펑크일까요?]
비디오 게임 <던전 III>는 사악한 던전을 운영하는 내용입니다. <던전 III>는 피터 몰리뉴가 만든 <던전 키퍼>를 따라가는 전략 게임이죠. 일반적인 중세 판타지들과 달리, <던전 키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악마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모험가 일행이 던전을 침략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악마들을 모으고 모험가 일행을 물리쳐야 합니다. 일반적인 중세 판타지들이 모험가 일행을 조명한다면, <던전 키퍼>는 모험가 일행과 맞서는 던전 악당들을 조명합니다. 던전 건설은 독특한 게임 플레이로 이어지고, 덕분에 <던전 키퍼>는 여러 정신적 후계작들을 양산했습니다.
<던전 III>는 그런 후계작들 중 하나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크 엘프 마법사가 되고, 사악한 던전을 확장하고, 악마 군대를 생산하고, 선한 세력들을 궤멸시켜야 합니다. 당연히 선한 세력들은 계속 모험가 일행들을 보내고, 악마 군대와 맞서 싸울 겁니다. 전사들은 장검을 휘두르고, 사제들은 치유 주문을 외우고, 엘프 도적들은 쌍수 단검을 찌르고, 드워프 포병들은 악마들에게 포탄을 쾅쾅 날리겠죠. 희한하게도 다른 병사들이 장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고 주문을 외울 때, 드워프들은 대포를 쏩니다.
사악한 세력 역시 첨단 기술(?)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던전 대장간에서는 두툼한 톱니바퀴가 쿵쿵거리며 돌아가고, 고블린들은 이족 보행 강화복을 입습니다. 이족 보행 강화복은 산탄을 발사하고, 여러 적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어요. 따라서 <던전 III>는 스팀펑크입니다. 전형적인 스팀펑크가 아니라고 해도, <던전 III>는 어느 정도 스팀펑크를 품었습니다. 특히, 드워프와 고블린은 스팀펑크 분위기를 가장 강하게 풍기는 종족들일 겁니다. 손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에 드워프는 쉽게 스팀펑크 종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고블린들이 스팀펑크 종족이 되었을까요?
일반적으로 고블린들은 훨씬 강하고 사악한 종족을 섬기는 약소 종족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고블린들은 초보 모험가 일행을 상대하는 역할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고블린은 스팀펑크에 어울리는 종족 같지 않습니다. <반지 전쟁> 역시 고블린들을 똑똑하고 손재주가 있는 종족이라고 그리지 않았어요. 아마 다른 기원이나 이유 때문에 <던전 III>가 고블린을 스팀펑크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워해머>가 영향을 미쳤을까요? 글쎄요, 그게 무슨 기원이나 이유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장간을 짓거나 보행 병기를 만드는 고블린은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것 같군요.
하지만 스팀펑크 요소를 담았다고 해도, <던전 III>는 과학 기술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가 대도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해도, 보행 병기를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행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 공장이 존재할까요? 왜 중세 사람들이 거대 공장을 만들었을까요? 생산 양식이 공장에게 영향을 미쳤을까요? 하지만 무슨 계기가 생산 양식을 바꿨을까요? 갑자기 하늘에서 신들이 금덩이들을 뿌렸을까요? 현실 속에서 거대 공장은 식민지 침략에서 비롯했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침략은 유럽에 막대한 부를 안겼습니다.
덕분에 유럽은 상업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나중에 상업 자본주의는 산업 혁명과 함께 산업 자본주의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여러 스팀펑크 작가들은 19세기 유럽을 이용합니다. 아마 작가들은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겠으나, 19세기 유럽 스팀펑크는 식민지 침략 같은 비극을 바탕에 깔았습니다. 스팀펑크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III>가 특별한 설정을 깔았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던전 III>는 그런 시대 배경이나 생산 양식, 기술 발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토치라이트>나 <헨젤과 그레텔>이나 <킹덤 러시>를 이야기했을 때처럼, 이런 중세 판타지가 대포나 보행 병기나 비행선이나 잠수함을 집어넣는 이유는 그게 전술적인 다양성을 보장하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가 공중 전투나 수중 전투를 묘사하고 싶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드래곤이나 크라켄 같은 괴수들은 공중 전투와 수중 전투를 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이나 크라켄은 인간들이 만들고 통제하는 병기가 아닙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종족들이 항공기나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면, 멋지게 공중 전투나 수중 전투를 벌일 수 있겠죠.
게다가 판타지 종족들이 항공기와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면, 강화복이나 전차를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그래서 중세 판타지는 스팀펑크를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 구조와 생산 양식과 과학 기술을 고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박질 때문에. 싸움박질이 우선이기 때문에 <던전 III> 같은 중세 판타지는 생산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죠.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빨리 금광을 캐고, 던전을 확장하고, 악마 병사들을 생산하고, 상대 세력을 쓸어버리기 원하겠죠. 중세 판타지에서 싸움박질을 위해 스팀펑크는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그런 흐름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풍경들을 좋아합니다. 드래곤과 전투 비행선이 격돌할 때, 크라켄이 전기 잠수함을 몰아낼 때, 기마 부대와 증기 보행 전차가 함께 돌진할 때, 그런 풍경들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괴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겠으나, 그런 괴리 때문에 저는 스팀펑크가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스팀펑크 장르에는 독특한 싸움박질 이상을 말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던전 III> 같은 중세 판타지는 그런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