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로봇들의 반란과 골렘들의 반란 본문
[설사 로봇이 된다고 해도, 이런 스팀펑크 골렘이 로봇들의 반란을 고찰할 수 있을까요.]
중세 판타지 설정에는 여러 골렘들이 등장합니다. 전설이나 미신과 달리,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은 다양한 골렘들을 내놨습니다. 모험가 일행에게 여러 난관들을 안겨주기 위해서겠죠. 살덩이 골렘, 진흙 골렘, 화염 골렘, 수정 골렘 등등 중세 판타지 설정은 온갖 골렘들을 전시합니다. 재료에 따라 수많은 골렘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골렘 종류는 꾸준히 늘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세 판타지에는 로봇이 없으나, 이런 골렘은 로봇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대부분 골렘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입니다.
만약 골렘이 자아를 얻고 마법사나 연금술사에게 대항한다면, 이건 로봇이 과학자에게 대항하는 장면과 비슷하게 보이겠죠. 중세 판타지에서 마법사가 과학자를 대신하는 것처럼, 골렘은 로봇을 대신할 수 있어요. 특히, 금속으로 만들어진 강철 골렘은 시각적으로 로봇과 비슷할 겁니다. 금속 인간형 물체가 돌아다닌다면, 중세 판타지를 보는 독자들은 그게 로봇과 비슷하다고 여기겠죠. 여기에서 더 나간다면, 중세 판타지 창작물은 아예 강철 골렘이 로봇이라고 우길 수 있어요. <토치라이트> 같은 중세 판타지는 강철 골렘을 아예 로봇이라고 그립니다.
로봇이 워낙 인기를 끄는 소재이기 때문에, 골렘이 로봇을 대신할 수 있다면, 골렘 역시 인기를 끌 것 같습니다. 하지만 SF 세상에서 로봇은 닳고 닳은 소재인 반면,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골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얄팍한 SF 비디오 게임들조차 인간에게 대항하는 로봇이나 인공 지능을 자주 그립니다. 그런 소재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로봇의 반란은 아주 진부합니다. 반면, 중세 판타지 게임들에는 그런 소재가 상대적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이는 마법사에게 저항하는 골렘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디즈니 만화 <판타지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마법사 역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한 곤란에 빠질지 모릅니다.
<판타지아>에 등장하는 움직이는 빗자루는 골렘이 아닙니다. 하지만 골렘과 움직이는 빗자루 모두 마법사가 창조한 살아있는 물체입니다. 따라서 골렘과 움직이는 빗자루는 근본적으로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중세 판타지 세상의 로봇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로봇과 달리, 골렘은 자주 주역을 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을 잘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골렘의 반란을 이야기하는 중세 판타지 설정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골렘의 반란은 분명히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이는 수많은 비유들과 재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은 여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아마 그 이유는 이미 SF 설정이 인공 지능의 반란을 써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메리 셸리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을 쓴 이후, SF 세상에서 피조물의 반란은 아주 진부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인간 과학자에게 대항하는 로봇에게는 더 이상 신기한 구석이 없습니다.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소재는 흥미를 끌 수 있으나, 인공 지능의 반란이 진부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는 인공 지능의 반란을 이야기하는 모든 SF 창작물이 구닥다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술적 특이점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고전적인 로봇 소설들 역시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와 이야기 구조겠죠.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인간을 응용하는 이야기들은 너무 많고, 이런 양산형 창작물들 때문에 인공 지능의 반란은 아주 진부하게 보입니다. <로보포칼립스> 같은 소설을 몇 번이나 비판한다고 해도, 그건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로보포칼립스> 같은 얄팍한 양산형 창작물들 때문에 인공 지능의 반란은 닳고 닳은 소재가 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이 골렘의 반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요? 중세 판타지가 골렘의 반란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진부한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중세 판타지 창작물들에게는 구태여 골렘의 반란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SF 세상에서 로봇의 반란은 진부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중세 판타지가 그걸 반복한다면, 비웃음을 사기 쉽겠죠. 다들 그런 중세 판타지가 <프랑켄슈타인>을 어설프게 따라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중세 판타지 창작가들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골렘의 반란이 흥미롭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 창작가들은 골렘의 반란을 쓰지 않겠죠. 하지만 작가가 독특한 필력을 발휘한다면, 골렘의 반란은 얼마든지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나 <모털 엔진>은 중세 판타지 설정이 아닙니다. 이런 소설들은 스팀펑크 장르에 가깝죠.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과 필립 리브는 멋진 필력을 발휘했고, 로봇이나 인조인간을 진부하지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로봇들이 활약하는 장면들은 기가 막힙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인공 지능이 각성하는 장면은 <뉴로맨서>에서 인공 지능이 피어나는 장면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게 과대 평가라고 지적할지 모르나, 저는 그 장면이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골렘의 반란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면, 그 중세 판타지 이야기는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가 되지 못할 겁니다.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에서 모험가 일행은 산 넘고 물 건너 마왕을 물리치고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죠. 그건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골렘의 반란은 그런 이야기 구조를 깨뜨릴 테고, 그래서 중세 판타지 창작가들이 골렘의 반란을 이야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흠, 골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로섬의 만능 로봇> 같은 상황을 조성한다면, 그게 중세 판타지 모험으로 괜찮을까요? 글쎄요, 별로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세 판타지 독자들은 모험가들이 마왕과 싸우는 이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딱히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저는 그럴지 모른다고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