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달 위를 걷는 느낌>과 판데믹 등급 위기 본문
[이건 태양열 농장, 인공 생태계입니다. 어떻게 이 장면이 세계적인 전염볌 위기와 이어질 수 있나요?]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전염병이라고 간주하고,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은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전세계적인 위기이고, 심지어 이건 세계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2008년 금융 대란 이후, 세계화 자본주의는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는 중이나, 코로나 19 사태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또 다시 세계화 자본주의는 깊은 불황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코로나 19 사태가 인류 사회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는 전염병 아포칼립스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메리 셸리는 소설 <최후의 인간>을 썼습니다. <최후의 인간>은 사이언티픽 로망스, 전염병 아포칼립스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전세계적인 전염병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최후의 인간>이 전염병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와 <최후의 인간>은 비슷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코로나 19 사태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한 원인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는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되었습니다. 이 원인이 무엇인가요? 어떤 전문가들은 원 헬스(One Health)를 언급합니다. 보건 개념으로서 원 헬스는 자연 생태계를 전반적으로 고려합니다.
사람들이 사회학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사람들은 사회학이 경제, 법률, 문화, 종교를 다룬다고 인식합니다. 사람들은 환경 사회학을 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환경 사회학은 늦깎이 사회학입니다.) 사람들이 환경 사회학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건을 언급할 때, 보건은 자연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반면, 원 헬스는 인류 사회와 자연 생태계를 함께 고려합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 사회는 살아갑니다. 자연 환경 없이, 인류 사회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연 환경이 병들고 아플 때, 인류 사회 역시 병들고 아플 겁니다. 어쩌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보여주는 것처럼, 언젠가 인류 문명은 인공 생태계를 만들지 모릅니다.
언젠가 자연 생태계 없이, 인공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은 살아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이 행성급 인공 생태계를 구성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비록 미래 인류 문명이 행성급 인공 생태계를 구성한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비참한 빈부 격차 디스토피아일지 모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행복한 인류 사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디스토피아들이 그러는 것처럼,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극단적인 빈부 격차와 빈곤한 인생들을 조명합니다. 아무리 인공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간다고 해도, 만약 극단적인 빈부 격차에서 인류 문명이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공 생태계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아니, 인공 생태계는 해답이 되지 못할 겁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 사회는 살아가야 하고, 인류 사회는 자연 환경을 경외해야 합니다. 보건 개념 역시 자연 생태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고 훼손한다면,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 사회가 살아가기 때문에, 인류 사회 역시 피해를 받을 겁니다. 코로나 19 사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19 사태에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 '자연 생태계 교란'입니다. 인류 문명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했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은 인류 사회에게 피해를 미쳤고, 이건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되었습니다.
원 헬스 개념은 자연 생태계 교란과 코로나 19 사태를 연결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배후'에는 자연 생태계 교란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코로나 19 사태는 뚝 떨어지지 않았고, 그 자체로서 코로나 19 사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코로나 19 사태는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에는 원인, 배후가 있고, 원인, 배후는 자연 생태계 교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전염병 위기라고 간주하나, 전염병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전염병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해도, 전염병 그 자체보다 전염병 '배후'는 훨씬 중요합니다. 배후에서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배후(자연 생태계 교란)에서 현상(코로나 19 사태)이 나타났기 때문에, 만약 인류 사회가 배후를 예방할 수 있었다면,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았다면, 코로나 19 사태는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코로나 19 사태에서 자연 생태계는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하지만 소설 <최후의 인간>은 자연 생태계에 치중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인간>은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전세계적인 전염병과 대혼란을 그리나, 이 소설은 인류 사회가 자연 생태계를 수탈한다고 비판하지 않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최후의 인간>이 환경 오염을 비유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전세계적인 전염병과 인류 멸종은 환경 오염을 비유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은 틀리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최후의 인간>은 환경 오염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최후의 인간>보다 김윤영이 쓴 <달 위를 걷는 느낌>은 코로나 19 사태에 훨씬 가깝습니다. 청소년 SF 소설 <달 위를 걷는 느낌>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나, 이 소설은 전염병 아포칼립스보다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에서 전염병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핵 발전소를 고발하고 비판합니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이 핵 발전소를 고발하고, 핵융합 물리학자가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전염병보다 환경 오염(핵 발전소)에 치중합니다. <최후의 인간>은 전염병과 인류 멸종에 치중하고, <달 위를 걷는 느낌>은 치명적인 환경 오염에 치중합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전염병 위기이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는 <최후의 인간>에 가까울지 모르나, 원 헬스 관점에서 자연 생태계 교란이 배후이기 때문에, 비록 <달 위를 걷는 느낌>이 전염병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해도, 이런 보건 관점에서 코로나 19 사태는 <최후의 인간>보다 <달 위를 걷는 느낌>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건 <최후의 인간>보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이 코로나 19 사태와 반드시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염병 아포칼립스가 기준이 될 때, 어떤 독자들은 <최후의 인간>이 코로나 19 사태와 가깝다고 느낄 테고, 환경 아포칼립스가 기준이 될 때, 어떤 독자들은 <달 위를 걷는 느낌>이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이런 분류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분류할 때, 그 자체로서 분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준에게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기준은 분류를 만듭니다. 원 헬스 개념이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때문에, <달 위를 걷는 느낌>은 코로나 19 사태와 가깝습니다.
SF 팬들은 이런 관점을 다른 SF 장르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SF 장르가 존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이 기준은 SF 장르를 분류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영화'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영화이기 때문에,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작은 아씨들>은 비슷한 분류가 됩니다.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배우이고, 엠마 왓슨 역시 영화 배우입니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왓슨이 영화 배우이기 때문에,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작은 아씨들>은 비슷한 분류가 됩니다. 반면, 소설 <달 위를 걷는 느낌>은 '소설'입니다.
김윤영 작가는 영화 배우가 아닙니다. 라이언 고슬링과 달리, 김윤영 작가는 영화 배우가 아닙니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달 위를 걷는 느낌>보다 <작은 아씨들>에 가까워야 하나요? 아니, 많은 사람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영화' <작은 아씨들>보다 '소설' <달 위를 걷는 느낌>에 훨씬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달 위를 걷는 느낌>이 모두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쪽은 똑같이 SF 장르에 속합니다. 여기에서 형식, 매체 차이(소설과 영화)보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훨씬 중요한 기준, 높은 가치입니다.
[라이언 고슬링처럼, 엠마 왓슨은 영화 배우입니다. 하지만 <작은 아씨들>은 SF 장르에 속하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사이버펑크입니다.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가 사이버펑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설 <뉴로맨서>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다릅니다. 소설 <뉴로맨서>는 사이버펑크이나, 이 소설은 생명 탄생, 피지배 계급 인조인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생명 탄생, 피지배 계급 인조인간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카렐 차페크가 쓴 <로섬의 만능로봇>에서도 생명 탄생, 피지배 계급 인조인간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나, <로섬의 만능로봇>은 사이버펑크가 아닙니다. SF 팬들이 일반적인 사이버펑크를 언급할 때, SF 팬들은 이걸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사이버펑크이나, 사이버펑크 <뉴로맨서>와 달리,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로섬의 만능로봇>은 훨씬 비슷합니다. 피지배 계급 인조인간들이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로섬의 만능로봇>과 <공산당 선언>을 연결할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분류는 드물지 않습니다. 여러 평론가들은 <로섬의 만능로봇>과 <공산당 선언>을 연결합니다. 비록 카렐 차페크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로섬의 만능로봇>과 <공산당 선언>은 비슷하고,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2049>와 <공산당 선언>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섬의 만능로봇>은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로섬의 만능로봇>은 인류 문명이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고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반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비록 이 영화가 환경 오염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환경 오염과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코로나 19 사태와 가까울 수 있습니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이 코로나 19 사태에 가까운 것처럼,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염병 아포칼립스가 아니나, 이 영화는 코로나 19 사태와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뭔가를 분류할 때, 그 자체로서 분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준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이 기준은 분류를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분류를 파악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이 그 분류를 만들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한 분류입니다. 왜 사람들이 소비에트 연방과 독재를 연결하나요? 소비에트 연방은 20세기 인류 문명에 속합니다.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가장 심각한 비극이 무엇인가요? 수많은 사람들은 2차 세계 대전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파쇼주의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나, 이건 2차 세계 대전에 대비하기 위한 눈가림이었습니다. 비디오 게임 <스타크래프트 2> 경기에서 저그 선수는 테란 선수에게 눈가림 저글링들을 보내고 무리 군주 생산 시간을 법니다. 테란 진영에서 저글링들이 시간을 끌기 때문에, 저그 진영이 거대 둥지탑을 올리고 무리 군주들을 뽑는 것처럼, 독소 불가침 기간 동안,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이 테크 트리를 올리고 병력을 양산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결국 파쇼주의는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가장 심각한 전쟁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파쇼주의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코로나 19 사태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허공에서 파쇼주의는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파쇼주의가 나타났나요? 파쇼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식민지 쟁탈, 1차 세계 대전, 세계 대공황은 세계적인 파장들을 연이어 미쳤고, 이런 상황은 파쇼주의를 형성했습니다. 사실 이런 세계적인 파장들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역시 절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옆동네 유럽에서 파쇼주의가 지랄발광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역시 20세기 최대의 비극에 맞서야 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락합니다. 식민지 쟁탈, 1차 세계 대전, 세계 대공황, 파쇼주의 난동, 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나타났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에게 이런 세계적인 파장들은 훨씬 심각한 '배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세계적인 파장들이 나타났나요? 왜 식민지 쟁탈, 1차 세계 대전, 세계 대공황, 파쇼주의 난동, 2차 세계 대전이 나타났나요? 서구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쟁탈, 1차 세계 대전, 세계 대공황, 파쇼주의 난동, 2차 세계 대전은 모두 서구 자본주의 지역에 속합니다. 러시아는 세계 대공황을 일으키지 않았고, 중국은 파쇼주의 난동을 일으키지 않았고, 아프리카는 식민지 쟁탈을 벌이지 않았고, 이슬람은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지 않았고, 남아메리카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서구 자본주의 지역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식민지 쟁탈, 1차 세계 대전, 세계 대공황, 파쇼주의 난동,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은 독재가 아닙니다. 솔직히 서구 자본주의 폭력에게 소비에트 연방은 그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합니다. 진짜 무서운 독재는 자본주의입니다.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경제 현상이고, 세계적인 독점 자본가 계급은 가장 지배적인 계급입니다. 그래서 지배적인 관념 역시 자본가 계급을 떠받듭니다. 자본가 계급을 떠받들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를 독재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지랄발광한다고 해도, 지배 관념은 자본주의를 미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무서운 독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독재이고, 이건 아주 명명백백한 사실이나, 많은 사람들은 사실로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소비에트 연방과 독재를 연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이런 분류(소비에트 연방-독재)가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분명히 소비에트 연방에는 치명적인 결함들이 있고, 우리는 이런 치명적인 결함들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독재 분류는 너무 엉터리 분류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주의를 미화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연 생태계 교란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왜 인류 문명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나요? 흔한 대답은 탐욕스러운 인류입니다. 심지어 생물학 교과서들, 과학 학습 만화들조차 탐욕스러운 인류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떠벌입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가 온실 가스를 열심히 뿜고 열대 밀림을 파괴하는 동안, 흑인들, 원주민들, 인디언들은 학살을 당했고 착취를 당했습니다. 19세기 서구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을 파괴했고, 동시에 서구 자본주의는 흑인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구 백인 남자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습니다. 서구 백인 남자 자본가와 아프리카 흑인 여자 노예가 똑같은 인류인가요?
아니, 인류 문명에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있고,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착취합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모두 똑같이 탐욕스러운 인류가 되나요? 하지만 아무리 서구 자본주의가 열대 밀림을 파괴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를 미화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에게 죄를 묻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 책임을 인류 전체에게 떠넘기고, 그래서 인류는 환경 오염 범죄자가 됩니다. 가난한 흑인 여자 노예는 비참하게 착취를 당했으나, 흑인 여자 노예는 환경 오염 범죄자가 됩니다. 자본주의 독재는 흑인 여자가 오염 범죄자라고 지랄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자연 생태계 교란을 비판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사실 코로나 19 사태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여러 생태학자들은 생태계 교란과 자유 시장 경제와 대혼란을 비판했고 경고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갑작스러운 대혼란이 절대 아닙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예견된 대혼란입니다. 생태 재앙이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되었기 때문에, 생태 재앙은 또 다른 위기를 유발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와 해수면 상승, 엄청난 폭염에게 코로나 19 사태는 그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엄청난 기후 변화 재앙에 대처할 수 있나요?
[자연 생태계 멸종과 디스토피아 메트로폴리스와 밑바닥 인생들. 이런 것들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보수 우파 세력들은 악랄한 본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수많은 작업장들과 돌봄 노동들에 피해를 미치기 때문에, 국가 정부는 시민 배당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은 시민 배당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판데믹 등급 위기가 된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시민 배당은 본격적인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시민 배당이 임금 노동 제도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피해를 피지배 계급들에게 떠넘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구 꼴통들은 온갖 차별들을 노골적으로 떠듭니다.
만약 당장 3차 세계 대전이 터진다면, 수구 꼴통들은 3차 세계 대전에 노골적으로 찬성할 겁니다. 코로나 19 사태보다 기후 변화가 훨씬 무서운 생태 재앙이기 때문에, 아무도 기후 변화가 무슨 파국을 일으킬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SF 울타리에서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거대한 재앙들을 경고합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정말 심각해진다면, 더 이상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SF 장르가 아닐지 모릅니다. 자본주의는 코로나 19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찌질거립니다. 고작 이런 자본주의 따위가 기후 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까요? 아니,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재앙을 피지배 계급들에게 떠넘길 겁니다.
그래서 생태 재앙은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 역시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비록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전염병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코로나 19 사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코로나 19 사태는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원 헬스, 환경 아포칼립스, 계급 투쟁, 자본주의 비판은 기나긴 연결 고리들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류가 엉터리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주의를 미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 비판이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독재 분류가 너무 웃기지도 않은 엉터리 착각인 것처럼, 그 자체로서 분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분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류보다 분류 '기준'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코로나 19 사태, 환경 아포칼립스들, 자본주의 비판이 이어지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