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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과 <빌러비드>의 극단적인 저항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다섯 번째 계절>과 <빌러비드>의 극단적인 저항

OneTiger 2019. 8. 14. 19:57

어떤 관점에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과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은 아주 비슷합니다.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에는 대지 초능력자 오로진들이 있습니다. 오로진들은 지진을 일으키고, 바위를 움직이고, 화산을 터뜨립니다. 태생적으로 오로진들에게는 이런 조산술 능력이 있습니다. 오로진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로진들은 조산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로진들이 이걸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오로진들은 저도 모르게 땅을 가르거나, 바위를 던지거나, 집을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오로진들이 조산술 능력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다치거나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로진들을 미워합니다.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냉기 마법사입니다. 태생적으로 엘사에게는 냉기 능력이 있습니다. 엘사는 주변을 얼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엘사는 호수를 얼리고, 얼음 성채를 짓고, 얼음 거인을 부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엘사가 이걸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엘사는 저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얼릴지 모릅니다. 엘사가 냉기 마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다치거나 죽을지 모릅니다. 엘사는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고, 산 속에서 혼자 살기 위해 엘사는 왕국에서 도망칩니다.



 이렇게 소설 <다섯 번째 계절>과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주연 등장인물들에게 특별한 초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초능력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오로진들을 배척합니다. 엘사는 언제 자신이 사람들을 얼릴지 알지 못하고, 이것 때문에 언제나 엘사는 조마조마하게 살아갑니다. 엘사는 심한 마음고생을 겪습니다. 엘사가 왕국에서 도망친 이후, 엘사는 <렛 잇 고>를 부릅니다. <렛 잇 고>는 "더 이상 나는 눈치를 살피지 않겠다."라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상황이 만만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냉기 마법은 모든 것을 얼릴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엘사는 대규모 살인자가 아닙니다. 엘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겨울 왕국>은 대규모 학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약 엘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면, 아무리 안나가 엘사를 용서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엘사를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엘사는 그저 주변 환경을 얼렸을 뿐입니다. 이건 대규모 학살이 아니고, 엘사는 쉽게 비주류에서 주류가 될 수 있습니다. 엘사는 쉽게 주류가 됩니다. 하지만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오로진들이 쉽게 주류가 될 수 있나요? 오로진은 대규모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오로진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오로진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어린 다마야, 어른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은 모두 오로진입니다. 소설 속에는 알라배스터를 비롯해 다른 오로진들 역시 많습니다. 소설 시점이 계속 오로진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오로진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오로진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해도,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오로진들을 배척하기 때문에, 오로진들은 저도 모르게 조산술을 이용해 폭력들을 휘두릅니다. 독자들은 이것을 이해합니다. 독자들은 왜 오로진들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이해합니다. 소설 시점이 오로진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소설 시점이 오로진보다 다른 사람들을 강조한다면, 독자들은 오로진들이 악랄한 학살자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소설 시점이 오로진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독자가 뭐라고 오로진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대화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독자는 오로진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로진들에게 복수하기 원하고, 소설 시점이 이런 복수를 계속 강조한다면, 독자는 오로진들보다 이런 복수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점은 중요한 문학 장치입니다. 시점이 바뀐다면, 독자는 다른 것을 읽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이건 독자가 반드시 소설 시점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가 풍자 소설, 부조리 소설, 피카레스크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 시점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소설 화자가 파쇼주의자라면, 아무리 소설 화자가 제국주의 침략을 찬양하고 독립 운동가들이 악랄한 빨갱이라고 욕한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화자를 의심하고 사회주의 운동권을 동정할 겁니다. 독자는 풍자 소설이 풍자와 해학, 모순을 이용해 파쇼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강조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장르가 풍자와 해학, 모순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시점을 믿지 않을지 모릅니다.


소설 시점이 사회주의 운동권을 강조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소설 시점이 엉터리라고 비난할 겁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옳음에도 왜 소설이 사회주의 운동을 강조하는지 비난할 겁니다. 훨씬 오랜 동안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훨씬 악랄하게 사람들을 학살했고 자연 환경을 파괴했음에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미 현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속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에 속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쁘다고 생각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은 자본주의가 이상하다고 깨달으나, 이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 시점이 사회주의 운동권을 강조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소설 시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소설이 모순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소설 시점과 주연 등장인물들을 믿지 않을 겁니다. 여러 이유들 때문에, 독자는 소설 시점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 동안, 많은 독자들은 오로진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소설은 오로진들이 엄청나게 탄압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은 오로진 시점(피해자 시점)에서 탄압을 보여줍니다.


현실에는 오로진들이 없으나, 소설은 다양한 초인들의 시점들을 이용해 오로진들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오로진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왜 오로진들이 폭력들을 휘둘러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탄압과 차별 속에서 오로진들은 폭력들을 휘둘러야 했습니다. 오로진들이 사람들을 죽였다고 해도, 죽은 사람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피해자들이었다고 해도, 오로진들은 폭력들을 휘둘러야 했습니다. 오로진들이 엄청난 탄압과 차별에 저항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탄압과 차별 속에서 사람들이 윤리를 지킬 수 있나요? 엄청난 탄압 속에서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저항할 수 있나요?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노동자들은 비참하게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12시간 이상 일해야 했습니다. 휴일들은 사치였습니다. 노동 조건들은 너무 열악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온갖 오염들과 위험들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구빈원들은 끔찍한 감옥이었습니다. 심지어 자본가 계급은 아동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지저분한 도시에서 사람들에게는 숨쉬기 위한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현모양처를 강조했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는 여자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자들에게 산업 노동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은 억지로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비참했습니다. 빈민들은 훨씬 끔찍한 일상을 헤쳐야 했습니다. 빈민들에게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경제는 정말 불지옥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권이 불지옥을 만들고, 세상이 진짜 불지옥이 된다고 해도, 빈민들은 불지옥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빈민들은 자본주의 불지옥이 그저 또 다른 불지옥으로 바뀔 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오히려 빈민들이 먹고 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 불지옥보다 이런 불지옥은 훨씬 나을 겁니다. 노동 조합들은 시위했으나, 오히려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들었고 노동자들을 살해했습니다. 노동 조합들이 끔찍하고 심각한 불지옥에 저항했음에도, 오히려 권력자들은 노동 조합들을 살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사회주의 혁명들은 붉은 깃발들을 휘날립니다. 하지만 붉은 깃발들은 엄청난 탄압과 차별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권력자들은 노동 조합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노동 조합들보다 사회주의 혁명들은 훨씬 전복적입니다. 권력자들이 이런 전복들을 그냥 놔두기 원했나요? 아니, 그들은 훨씬 악랄하게 혁명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들 역시 폭력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이건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집니다. 국가 정부가 자본가 계급을 편들고 노동자 저항들을 탄압했을 때, 이미 이건 2차 세계 대전을 예고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들이 폭력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이게 사회주의 혁명의 잘못인가요? 끔찍한 탄압과 차별 속에서 피지배 계급이 윤리적으로 적당히 저항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만약 이게 가능했다면, 왜 오로진들이 대규모 살인자가 되어야 했나요? 왜 오로진들이 윤리적으로 적당히 저항하지 않았나요? 소설 <빌러비드 (사랑 받는 사람) Beloved>에서 흑인 엄마는 자신의 딸을 죽입니다. 어떻게 독자가 이런 사건을 해석해야 하나요? "세상에, 엄마는 딸을 죽였어! 아니, 딸에게 무슨 잘못이 있지? 엄마는 미치광이 씨발년이야! 살인은 정당하지 않아! 이건 유아 살해야! 엄마는 악랄한 살인마야!"



이게 올바른 해석인가요? 어떤 독자들은 흑인 엄마가 비열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살인마라고 욕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빌러비드>에서 흑인 엄마는 노예입니다. 흑인 엄마는 플랜테이션 농장 여자 흑인 노예입니다. 흑인 엄마는 비참한 일상을 헤쳐야 했습니다. 흑인 엄마는 자신의 딸 역시 노예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딸이 노예가 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이런 현실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딸을 죽입니다. 엄마에게 살인은 노예 해방입니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엄마는 딸을 죽여야 했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유아 살해, 딸 살해는 노예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오직 흑인 엄마만 비난해야 하나요? 독자들이 흑인 엄마가 유아 살해를 저질렀다고 비난해야 하나요? 하지만 현실과 소설 속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은 너무 끔찍합니다. 독자들은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윤리적으로 적당히 저항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빌러비드>를 이용해 이것을 물을 수 있다면, 독자들은 이런 물음을 <다섯 번째 계절>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빌러비드>와 사회주의 저항과 <다섯 번째 계절>이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이 사회주의 저항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빌러비드>와 사회주의 저항과 <다섯 번째 계절> 사이에는 보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권력이 끔찍하게 탄압한다면, 저항은 너무 격렬해질 겁니다. 이건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수구 꼴통과 급진적인 페미니즘 모두 이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수구 꼴통과 급진적인 페미니즘에게 "인간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가 보편적인 사실인 것처럼, 끔찍한 탄압 속의 격렬한 저항은 보편적인 사실이 됩니다. 심지어 너무 격렬한 저항은 탈선하고 타락하고 몰락할지 모릅니다. 독자는 <빌러비드>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이끌어내고 이것을 <다섯 번째 계절>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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