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눈먼 자들의 나라>와 외계인 사회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눈먼 자들의 나라>와 외계인 사회

OneTiger 2019. 7. 1. 16:18

옆동네 철수는 단편 소설을 씁니다. 소설 제목은 <외눈박이 사회>입니다. 어떤 남아메리카 밀림에는 외눈박이 사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탐험가는 우연히 외눈박이 사회에 들립니다. 탐험가에게는 두 눈이 있습니다. 탐험가는 "외눈박이 사회에서 두 눈이 있는 사람은 왕이다."라고 말합니다. 탐험가가에게 두 눈이 있기 때문에, 탐험가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외눈박이들은 탐험가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두 눈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외눈박이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외눈박이 사람들은 외눈박이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두 눈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탐험가를 소외시킵니다. 탐험가는 왕따가 됩니다. 그리고 탐험가는 보편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낍니다. 소설을 쓴 이후,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에게 <외눈박이 사회>를 보여줍니다. 뭐라고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평가할까요? 세 사람들은 "철수야, 이건 허버트 웰즈가 쓴 장님 마을 이야기와 똑같아. 너는 허버트 웰즈 단편 소설을 표절했어."라고 대답할 겁니다. 단편 소설 <외눈박이 사회>는 단편 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와 아주 비슷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반박할 겁니다. "아니야! 나는 허버트 웰즈를 표절하지 않았어! 허버트 웰즈는 장님 마을을 썼고, 나는 외눈박이 마을을 썼어! 장님과 외눈박이는 달라! 내 소설은 아주 독창적이야!" 이렇게 옆동네 철수는 반박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철수는 옳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장님 마을을 이야기했습니다. 단편 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장님 마을에서 외눈박이는 왕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건 아주 유명한 문구입니다. 단편 소설 <외눈박이 사회>는 "외눈박이 사회에서 두 눈이 있는 사람은 왕이다."라고 말합니다. 두 문구는 다릅니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장님과 외눈박이를 비교하고, <외눈박이 사회>는 외눈박이와 두 눈이 있는 사람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눈먼 자들의 나라>와 <외눈박이 사회>는 다릅니다. 그래서 철수는 자신이 표절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이걸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세 사람들은 철수가 허버트 웰즈를 표절했다고 주장할 겁니다. 철수가 허버트 웰즈를 표절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허버트 웰즈가 아주 비슷한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철수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할 겁니다.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옆동네 철수가 굉장한 사변 문학 작가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눈먼 자들의 나라>와 <외눈박이 사회>를 비교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님과 외눈박이가 다름에도, 어떻게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눈먼 자들의 나라>와 <외눈박이 사회>가 아주 비슷하다고 간주할 수 있나요? 허버트 웰즈와 옆동네 철수가 다른 소재를 이야기했음에도, 왜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철수가 허버트 웰즈를 표절했(거나 모방했)다고 간주하나요? "장님 마을에서 외눈박이는 왕이다."와 "외눈박이 사회에서 두 눈이 있는 사람은 왕이다."가 다른 뜻임에도, 왜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이 두 문장이 똑같다고 간주하나요?


왜 이런 비교/해석이 나타날까요? 두 소설에서 그 자체로서 소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눈먼 자들의 나라>가 장님 마을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눈먼 자들의 나라>는 장님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장님들은 비유에 가깝습니다. 장님들은 보편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비유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들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만약 허버트 웰즈가 외계인 사회와 인간, 개조 동물 사회와 인간, 새로운 인류 사회와 인간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소재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단편 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장님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이방인'을 이야기했고, 장님은 그저 이방인을 비유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허버트 웰즈가 외계인을 이용해 이방인을 비유한다고 해도, 소설 주제와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장님 마을에서 외눈박이가 왕이라면,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 눈이 있는 탐험가는 왕이 될지 모릅니다. 외눈박이가 두 눈이 있는 탐험가가 되는 것처럼,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계속 또 다른 이방인들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이방인은 아주 흔한 소재입니다.


수많은 SF 작가들은 외계인을 이용해 이방인을 이야기합니다. 낸시 크레스는 이방인을 이야기하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이방인을 이야기하고, 반다나 싱은 이방인을 이야기하고, 테리 비슨은 이방인을 이야기합니다. 허버트 웰즈가 장님보다 외계인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결국 허버트 웰즈는 이방인을 비유하기 원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서 소재(장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허버트 웰즈가 생물 해부학을 이용해 장님을 묘사했다면, 상황은 다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화 생물학 연구원으로서 허버트 웰즈가 생물 해부학을 이야기했다면, 이방인보다 생물 신체 구조는 훨씬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허버트 웰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가 단편 소설을 썼다고 해도, 단편 소설 <외눈박이 사회>는 걸작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철수가 표절했다고 비판할 겁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허버트 웰즈는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했다."고 주장할 겁니다. 허버트 웰즈는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그 자체로서 소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허버트 웰즈가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허버트 웰즈는 장님 마을을 썼고, 나는 외눈박이 마을을 썼어! 장님과 외눈박이는 달라! 내 소설은 아주 독창적이야!"라고 주장하나, SF 독자들은 "허버트 웰즈는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했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소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오직 소재에만 상관했습니다. 철수는 훨씬 거시적인 주제(이방인)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과 다른 SF 독자들은 소재보다 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과 다른 SF 독자들은 철수를 비판합니다. 이렇게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 독자는 오직 소설이 말하는 것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소재를 뛰어넘고 훨씬 거시적인 주제를 바라봅니다. 독자가 거시적인 주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독자는 허버트 웰즈가 외눈박이 사회를 썼다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옆동네 철수가 완전히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철수는 옳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뭔가를 말한다면, 많은 독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그것을 뛰어넘을 겁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메리 셸리는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를 비교하지 못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오직 표면적인 소재만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이버펑크 비디오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인조인간들을 차별한다면,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은 비슷한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는 나노 로봇과 컴퓨터 해킹과 엄청난 마천루와 비행 자동차와 네온 사인과 산성비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이 비슷한 주제가 될 수 있어? 이건 엉터리야! 메리 셸리는 나노 로봇과 컴퓨터 해킹을 알지 못했어!"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주장한다고 해도, 이건 틀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철수는 옳습니다. 만약 SF 독자들이 사이버펑크 설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이버펑크 설정이 기준이 된다면,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은 똑같은 부류가 되지 못할 겁니다.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을 보세요. 메리 셸리가 이런 장면을 상상했을까요? 아니, 메리 셸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게임에서 사람들이 인조인간들을 괴롭힌다면,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은 비슷해질 겁니다. 인조인간들이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인조인간들을 계속 괴롭힌다면, 인조인간들은 잔인하게 복수할 겁니다. 사람들은 인조인간들을 비난할 겁니다. "빌어먹을 인조인간들에게 영혼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인간들은 악랄한 살인들을 저질렀어!"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인조인간들만 헐뜯습니다. 만약 사이버펑크 게임이 이런 줄거리를 이야기한다면, 사이버펑크 게임과 <프랑켄슈타인>은 비슷한 부류가 될 겁니다.


남한 사회에서 여자 독자가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을 비교한다면, 여자 독자는 비슷한 감성을 느낄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괴롭힘에도, 가부장 문화가 훨씬 폭력적임에도, 그래서 여자들이 극단적으로 가부장 문화를 욕함에도, 남한 사회는 가부장 문화보다 극단적인 여자들이 나쁘다고 헐뜯습니다. 가부장 문화를 옹호하기 위해 남한 사회는 어처구니가 없는 헛짓거리를 저지릅니다. 우리가 폭력을 언급할 때,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한 것과 약한 것을 구분합니다. 강한 것은 옳은 것이고, 약한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이기는 편은 우리 편!" 우리는 이게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부자와 빈민이 똑같이 질병에 걸린다고 해도, 부자는 많은 돈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빈민은 죽어야 합니다. 빈민이 멍청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빈민이 죽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빈민에게 많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빈민은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부유함이 도덕이고 가난이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민이 잘 죽었다고 욕할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가난은 죄악입니다. 가난은 너무 비참한 죄악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에 부딪힌다면, 서구 자본주의는 막대한 구제 금융을 퍼붓고 경제 공황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가 기근에 부딪힌다고 해도,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는 돈을 쏟아붓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유한 서구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가난한 중국 인민 공사를 욕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엄청나게 뻘짓들을 저질렀고 삽질들을 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가난이 죄악입니까? 왜 서구 자본주의가 부유하고, 왜 중국 인민 공사가 가난한가요? 갑자기 하늘에서 부유함과 가난이 뚝 떨어졌나요? 태생적으로 백인 남자들이 부유하고, 태생적으로 짱깨 계집년들이 가난한가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을 차별합니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끔찍하게 짓밟고 약자가 극단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우리는 강자를 응원합니다. 그래서 여자 독자는 남한 사회, <프랑켄슈타인>, 사이버펑크 게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21세기 헬조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는 헬조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사이버펑크 도시와 21세기 남한은 다릅니다. 하지만 남한 여자 독자는 헬조선과 <프랑켄슈타인>과 사이버펑크 게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자들이 소설을 해석할 때, 독자들은 오직 소설이 말하는 것만 파악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그것(19세기 스팀펑크)을 뛰어넘고 훨씬 거시적인 것(종속-해방 투쟁)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메리 셸리가 헬조선을 이야기했고 허버트 웰즈가 외눈박이 사회를 이야기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많은 오해들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독자가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을 파악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과잉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가 메리 셸리와 헬조선을 이야기한다면,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가 과잉 해석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메리 셸리가 21세기 가부장적인 남한 사회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서로 싸울 테고, 이런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고, 소설 해석은 많은 논쟁들로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논쟁들을 싫어할 겁니다. 소설이 너무 많은 해석들을 낳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싫어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이 많은 해석들을 낳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