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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허기>, 왜 우리에게 사이언스 픽션이 필요한가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허기>, 왜 우리에게 사이언스 픽션이 필요한가

OneTiger 2019. 6. 8. 23:05

반다나 싱이 쓴 <허기>는 문자 그대로 허기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허기는 긍정적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일부러 굶는 것처럼, 허기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즐겁게 요리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장(허기)이 반찬이라는 속담처럼, 허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허기가 없어진다면, 먹거리 방송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할 겁니다. SNS 유저들은 맛집들을 자랑하지 못할 겁니다. 먹거리 방송 시청자들은 허기가 사라지지 않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허기는 부정적입니다. 결국 인간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언젠가 허기를 느낍니다.


유기체 동물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라는 농담은 재미있으나,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죽을 겁니다. 문제는 먹고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간이 허기를 느낌에도, 인간이 먹지 못한다면? 허기가 위장을 찌르고 쑤시고 비튼다면? 허기는 기대와 즐거움보다 고통과 절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정말 숱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식량 전문가들은 인류의 절반이 빈곤선이거나 인류의 절반이 굶주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인류의 절반이 빈곤선인가요?



만약 우리가 통계 자료들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자세하고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태여 통계 자료들을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직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는 식량 전문가들이 쓴 서적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정말 인류의 절반이 빈곤선이라면, 왜 인류 문명이 엄청난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나요?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그건 아닐 겁니다. 고급 식당들은 음식 재료들을 버립니다. 심지어 식당들은 멀쩡한 식량들을 버립니다. 상품들이 팔리지 않음에도, 유통 업체들은 식량 상품들을 과다 발주합니다.


식량 MD들(바이어들)은 식량 상품들을 점포들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매출액을 초과 달성하기 위해 영업 담당 직원들은 억지로 식량 상품들을 팔아야 합니다. 경제 공항이 터진 이후, 사람들은 쓰레기통들을 뒤적입니다. 창고들에 식량들이 쌓였음에도, 먹고 살기 사람들은 쓰레기통들을 뒤적거려야 합니다. 한쪽에서 식량들이 가득 쌓였음에도, 다른 한쪽에서 식량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쓰레기들을 뒤적거려야 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날까요? 한쪽에 식량이 있음에도, 왜 다른 한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기와 고통과 절망을 느껴야 하나요?



단편 소설 <허기>는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 디브야는 허기를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제목과 달리, 허기 때문에 디브야는 고통과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 디브야는 파티를 준비하고 파티를 즐깁니다. 디브야가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디브야는 허기를 느끼나, 나중에 이런 허기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파티와 허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파티에는 숱한 음식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흥청망청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허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파티라는 상황 속에서 허기는 이질적입니다. 파티라는 상황 속에서 허기는 소외를 당해야 합니다.


숱한 음식들은 허기라는 개념을 밀어내고 배제하고 소외시킬 겁니다. 흥겨운 파티장에서 어떤 사람이 심한 허기를 느낀다면, 이 사람은 꽤나 이질적일 겁니다. 디브야는 파티를 준비하고, 이내 손님들은 흥청망청 파티를 즐기고 먹고 마십니다. 디브야는 이런 파티에 참가합니다. 하지만 왜 소설 제목이 '허기'인가요? 디브야가 파티에 참가한다면, 소설 제목은 '파티'나 '배부름'이나 '흥겨움'이 되어야 할 겁니다. 소설 제목은 이런 것들보다 허기입니다. 소설 제목(허기)과 소설 내용(파티)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소설 내용(파티) 속에서 소설 제목(허기)은 소외를 당합니다. 소설 내용은 소설 제목을 밀어내고 배제합니다.



소설 내용이 소설 제목을 밀어내는 것처럼, 소설 내용(파티)에게 소설 제목(허기)이 이질적인 것처럼, 단편 소설 <허기>는 디브야가 소외를 느낀다고 묘사합니다. 소설 초반부터 거의 소설 결말까지, 디브야는 소외를 느끼고 당혹스럽다고 느낍니다. 소설은 디브야의 시선과 심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디브야의 시선과 심리는 사건을 이끌어나갑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시선들과 심리들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허기>는 디브야의 심리를 자유롭게 서술하나, 뭐라고 다른 등장인물들이 느끼는지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오직 디브야의 관점에서만 <허기>는 세상을 설명합니다.


가끔 <허기>는 작은 따옴표('')를 동원하고 뭐라고 디브야가 느끼는지 직접 보여줍니다. 디브야는 작은 따옴표를 이용해 자신이 소외를 느낀다고 짤막하게 보여줍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작은 따옴표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디브야의 시점에서 소설은 다른 등장인물들의 심리들을 추측합니다. <허기>에서 디브야는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창문입니다. 그래서 디브야가 소외를 느끼고 당혹해할 때, 이런 감정들은 훨씬 커집니다. 소설 시점이 디브야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디브야가 소외를 느끼고 낯설게 세상을 바라볼 때, 소설 속에서 세상은 정말 낯설어집니다.



소설 내용(파티)에게 소설 제목(허기)이 이질적인 것처럼, 소설 속의 세상은 정말 이질적입니다. 만약 <허기>가 전지적 시점으로 모든 등장인물의 심리들을 골고루 설명했다면, 이런 이질적인 감정은 많이 옅어졌을 겁니다. 이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소외를 강조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허기>는 단편 소설이고 짧은 분량 속에서 소외를 강조해야 합니다. 단편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골고루 조명한다면, 특정한 시점과 감정을 쉽게 강조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허기>가 장편 소설이라고 해도, 장편 소설이 소외, 이질적인 상황, 낯선 감정을 강조하고 싶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은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디브야의 시점에 의존하고,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디브야는 허기를 다르게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허기는 그저 추레하고 짜증나고 불쾌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디브야는 허기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허기를 배제하나, 디브야는 허기가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둘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허기는 빈곤에서 비롯합니다. 디브야는 이 세상에서 빈곤이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허기>는 흥청망청 파티를 묘사하나, 디브야는 파티에서 소외를 당하고 허기와 빈곤에게 다가갑니다.



디브야가 소외를 느낄 때, 디브야는 이질적인 존재, 이방인이 됩니다. 흥청망청 파티 속에서 디브야가 허기와 빈곤을 직시한다면, 디브야는 이방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브야는 파티에 어울리지 않고 아웃사이더가 됩니다. 디브야는 아싸입니다. 이런 아싸는 외계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외계인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 무엇인가요? 외계인은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외계인은 이방인입니다. 사실 외계인과 이방인은 동의어가 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디브야는 소외를 느끼고, 그래서 디브야는 이방인이고 동시에 외계인입니다.


디브야가 열정적인 SF 독자이기 때문에, 디브야는 정말 이 세상에 외계인이 있다고 느낍니다. 외계인을 찾기 위해 SF 독자가 구태여 장거리 세대 우주선에 탑승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단편 소설 <허기>는 얼마든지 사람들이 외계인들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디브야가 허기와 빈곤을 바라보는 것처럼, SF 독자들이 허기와 빈곤을 바라본다면, SF 독자들은 얼마든지 외계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백화점을 보세요. 백화점은 삐까번쩍하고 으리으리합니다. 한쪽에서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어죽음에도, 백화점은 삐까번쩍하고 으리으리해야 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한 현상입니다. 백화점에서 SF 독자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수두룩한 사람들이 굶어죽음에도, 으리으리한 백화점이 존재한다면, 백화점 속에서 SF 독자는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SF 독자가 빈곤과 허기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SF 독자는 훨씬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SF 독자가 기본 소득, 시민 배당을 주장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SF 독자를 비웃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할 겁니다. SF 독자는 온갖 수모들을 당하고 격렬한 소외를 느낄 겁니다. SF 독자가 시민 배당을 주장할 때, 다른 사람들은 SF 독자를 배제하고 모욕할 테고, SF 독자는 이방인, 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SF 독자는 자신이 좀비 무리 속의 생존자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방에는 좀비 무리들이 수두룩합니다. 좀비들에게는 생각이 없습니다. 좀비들이 맹목적으로 생명체들을 물어뜯는 것처럼, 생각 없이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SF 독자는 최후의 생존자입니다. 생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좀비 무리가 되고, SF 독자는 최후의 생존자가 됩니다. 단편 소설 <나는 전설이다>처럼, 최후의 생존자는 너무 깊은 외로움을 느낄 겁니다. SF 독자가 최후의 생존자가 된다면, SF 독자 역시 너무 깊은 외로움을 느낄 겁니다. 인류 사회에는 이미 최후의 생존자와 외계인이 있습니다. SF 독자는 최후의 생존자와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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