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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누구를 위하여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가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누구를 위하여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가

OneTiger 2018. 8. 9. 23:37

장 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작가와 독자들이 무슨 관계를 맺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보다 먼저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오직 혼자 소설을 읽지 않아요. 작가가 쓰는 소설은 작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죠.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작가가 그 자체로서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이 존재할 때, 작가는 생산자가 될 수 있죠. 따라서 독자들이 없는 작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무슨 독자들이 그 소설을 읽는지 함께 살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가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둘까요? 작가가 어떤 독자들을 상정할까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건 다를 겁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그런 과정을 살핍니다. 비록 장 폴 사트르는 오직 유럽이라는 한정적인 지역에만 초점을 맞추나, 이런 분석은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언제나 달라졌음을 뜻합니다. 지배적인 사회 구조에 따라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작가와 독자들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면, 우리가 이런 관계를 미래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작가가 미래의 독자들을 상정할 수 있을까요?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작가가 오직 동시대의 독자들만을 상정해야 할까요? 장 폴 사르트르가 이런 문제를 뭐라고 생각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가 미래의 독자들을 상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SF 작가는 미래의 독자들을 염두에 둘 수 있겠죠. 이는 SF 소설이 미래를 전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작가는 현재의 시각을 그저 미래에 투영할 수 있을 뿐입니다. SF 작가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그저 우연에 불과하고, 본질적으로 SF 작가는 미래를 전망하지 못합니다. 색다른 시각에서 현재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 SF 작가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거나 현재를 미래에 투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SF 작가는 미래를 이용합니다. 비록 그런 방법이 본질적인 시대 변혁을 꿰뚫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SF 작가는 시대적인 변혁을 이야기합니다. 시대가 변혁하지 않는다면, SF 작가는 SF 소설을 쓰지 못하겠죠. 우리가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읽고 시대적인 변혁을 뒤돌아보는 것처럼, 미래 사람들 역시 21세기 SF 소설들을 읽고 시대적인 변혁을 뒤돌아볼 겁니다. 우리가 과거의 SF 소설들을 읽고 시대가 흘러온 과정을 뒤돌아보는 것처럼, 미래 사람들 역시 21세기 SF 소설들을 읽고 시대가 흘러온 과정을 살펴볼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미래 인류입니다. 미래 인류는 과거의 우리입니다. 우리는 미래 인류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고, 우리는 미래 인류로 흘러갈 겁니다.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21세기 하드 SF 소설로 이어진 것처럼, 21세기 하드 SF 소설 역시 23세기의 미래 SF 소설로 이어질 겁니다. 뭐, 23세기까지 인류가 생존할 수 있을지 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설사 23세기까지 인류가 생존한다고 해도, SF 소설이 존재할지 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23세기와 24세기와 25세기 인류가 존재하고, 그때까지 SF 소설이 존재한다면, 25세기 인류는 21세기의 SF 소설들을 읽고 과거를 뒤돌아볼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21세기 SF 소설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그들은 몇몇 21세기 SF 작가가 미래를 훌륭하게 통찰했다고 여길지 모르죠.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가장 큰 전환점이 뭘까요? 만약 SF 작가가 그런 전환점을 소설에 표현한다면, 미래 사람들은 그런 SF 소설이 선견지명을 드러냈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그런 전환점은 기술적 특이점이나 전면적인 핵 전쟁이나 화성 개척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후 변화 역시 미래의 거대한 전환점이 될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기후 변화는 가장 큰 전환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기후 변화가 거대한 재앙이 될까요? 물론 기후 변화는 이미 어마어마한 환경 재앙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전세계적인 가뭄이나 해수면 상승이나 핵 발전소 침수는 훨씬 끔찍한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과학자들 역시 미래를 함부로 예측하지 못하나, 어쩌면 23세기나 24세기나 25세기 사람들은 그런 재앙에 직면할지 모릅니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커다란 과오였는지 깨달을지 모르죠. 거대한 환경 재앙 덕분에 미래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정말 어리석은 범죄였다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미래 사람들은 왜 과거 사람들이 이런 중대한 범죄를 뜯어고치지 않았는지 원망할지 몰라요.


만약 21세기의 SF 작가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기후 변화를 경고한다면, 24세기 사람들은 그런 SF 작가에게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저는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가 그런 호평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24세기 문학 비평가들이 과거의 소설들을 평가한다면, 그들은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와 <붉은 화성>이나 <오로라> 같은 소설을 호평할지 모르죠. 글을 잘 쓰는 필력 좋은 작가들은 많겠으나, 미래를 내다보는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드물겠죠. 어쩌면 24세기 사람들은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는 사실을 통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미래의 비평가들을 위해 킴 스탠리 로빈슨이 <붉은 화성>을 썼다는 뜻이 아닙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미래의 독자들을 상정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붉은 화성> 같은 소설을 통해 킴 스탠리 로빈슨 같은 작가는 미래의 문학 비평가들로 이어질 수 있겠죠. 비록 킴 로빈슨은 미래의 비평을 듣지 못하겠으나, 킴 로빈슨 덕분에 미래의 비평가들은 과거에 미래를 내다보는 SF 소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죠. 이 세상에는 여러 장르 소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는 장르 소설은 오직 SF 소설뿐일 겁니다. 저는 SF 작가들이 미래의 비평가들, 300년이나 400년 이후의 독자들을 상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SF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암울한 환경 재앙을 살아가는 21세기 SF 작가가 그런 시대적인 소통을 간과한다면, SF 소설이라는 이름값은 다소 아까울지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SF 작가들은 그런 소통의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SF 소설들 속에서 수많은 SF 작가들은 세상을 뒤집고, 인류를 멸종시키고, 아주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하지만 그런 난리법석 속에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시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환경 재앙 속에서 살아감에도, 수많은 SF 작가들은 그런 시각을 갖추지 못했어요.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폭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매연이나 기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런 환경 오염들이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게 환경 오염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본주의를 간과할 때, 자본주의는 더욱 난리를 부릴 수 있겠죠. 우리는 자본주의를 간과하고,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착취를 간과하고, 착취를 그저 일상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착취를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는 개인들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어떻게 일개 개인으로서 우리가 쉽게 거대한 사회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겠어요.


저는 민중의 자발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민중의 자발성처럼 지식인의 솔선수범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으로서 SF 작가들은 미래의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현대 사회에 경고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SF 작가가 구태여 미래의 독자들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를 비판하는 SF 소설은 미래의 독자들로 이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미래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고, 이는 SF 소설이 드러내는 여러 장점들 중 하나일 겁니다.



※ 만약 24세기에 남한이 아직 남아있고, 미래 남한의 비평가들이 21세기의 남한 SF 소설들을 살펴본다면, 그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국내 창작 SF 소설들 중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소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붉은 화성>처럼 강렬하게 울리는 국내 창작 SF 소설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국내에는 뛰어난 SF 작가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SF 작가들이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다들 그저 피상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피상적인 대안들을 내놓을 뿐이죠. 어쩌면 미래 24세기의 남한 문학 비평가들은 혀를 끌끌 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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