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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그림과 활자 매체의 한계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시공을 초월하는 그림과 활자 매체의 한계

OneTiger 2018. 7. 28. 22:27

[게임 <스텔라리스>처럼, 시각적인 매체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훨씬 자세히 보여줄 수 있어요.]



"언어의 장벽이라는 한계로 국경을 넘기 힘든 문학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그림과 음악은 시공을 초월해 전세계적인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후략)"



위 문구는 <피카소 시집>에서 나온 해설의 일부입니다. 제목처럼 <피카소 시집>은 파블로 피카소가 쓴 시들을 모아놓은 작품입니다. 20세기 서구에서 파블로 피카소는 가장 유명한 화가입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피카소가 가장 위대한 20세기 서구 예술가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 중앙 정보부가 피카소를 꽤나 미워했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냉전 시대에 러시아의 현실 사회주의에 맞서기 위해 미국 중앙 정보부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중앙 정보부는 여러 예술가들, 지식인들, 철학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공산당을 선택했습니다. 미국 중앙 정보부는 20세기 서구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끌어들이지 못했죠.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이게 사실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렇게 유명한 예술가라는 반증이겠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피카소가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파블로 피카소는 시들을 썼고, <피카소 시집>은 그런 시들을 모았습니다.



시와 그림은 다릅니다. 시는 활자 작품입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시를 감상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운율이나 반복되는 문구를 어설프게 눈치챌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를 감상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글자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멋진 시를 썼다고 해도, 키릴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걸 읽지 못하겠죠. 이는 비단 시만 아니라 다른 활자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중후장대하거나 섬세하고 서정적인 소설을 쓴다고 해도, 글자를 모르는 독자는 그 소설을 읽지 못하겠죠. 그래서 소설은 쉽게 퍼지지 못합니다. 소설은 시공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만약 세계 공용어가 있고, 누구나 세계 공용어를 사용하고, 그런 공용어가 몇 백 년 이상 살아남는다면, 소설 역시 쉽게 퍼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있고, 다들 각자 다른 언어들을 사용합니다. 아무리 영어와 중국어가 대세라고 해도, 영어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와 중국어 소설들은 쉽게 퍼지지 못할 겁니다. 영어와 중국어처럼 널리 쓰이는 언어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퍼질 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상대적일 뿐이겠죠. 하지만 그림이나 음악에는 그런 제약이 없고, 쉽게 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라스코 동굴 벽화를 감상할 수 있죠.



시나 소설 같은 활자 매체에는 또 다른 제약이 있습니다. 활자 매체는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합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와 우리가 보는 <게르니카>는 똑같습니다. 비록 서로 다른 감성을 뽑아낸다고 해도, 피카소와 우리는 똑같이 시각적인 측면을 공유합니다. 만약 <게르니카>가 소설이었다면, 피카소와 우리가 똑같이 시각적인 측면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단어들은 시각적인 측면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합니다. 단어들은 그저 어떤 심상들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피카소가 소설 <게르니카>를 쓰고, 누군가가 그걸 그렸다면, 그 결과는 그림 <게르니카>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와 독자들은 똑같이 시각적인 장면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생각한 어떤 구체적인 장면은 독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작가가 표현한 단어들을 이용해 완전히 다른 장면을 상상할지 모릅니다. 특히, SF 소설처럼 상상을 중시하는 장르에서 이는 훨씬 커다란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만약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묘사한다면, 현실 속에서 독자는 그걸 직접 참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작가가 <게르니카>를 이야기한다면, 독자는 미술관에 가거나 미술 서적에서 <게르니카>가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다릅니다. 만약 어떤 SF 작가가 우주 구축함이나 거대 바다 괴수를 묘사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작가와 다른 장면들을 상상할 겁니다. 현실 속에는 우주 구축함이나 거대 바다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것들을 직접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작가와 독자들, 독자들과 또 다른 독자들, 서로 다른 독자들은 각자 다른 장면들을 상상할 겁니다. 하나의 텍스트는 서로 다른 수많은 장면들을 낳을 겁니다. 아예 어떤 독자는 작가가 뭐라고 썼는지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단어들을 이용해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들이나 공포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지 전쟁> 매니아들은 악마 발록에게 날개가 있는지 논의합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그런 논의는 끊이지 않았고,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존 로널드 톨킨이 열심히 소설을 썼다고 해도, 단어들은 완전한 장면을 만들지 못합니다. 현실에는 악마 발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저 열심히 해답 없는 논의들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는 온갖 SF 소설들, 판타지 소설들, 공포 소설들이 드러내는 한계일 겁니다.



SF 소설들과 판타지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고민합니다. 이 장면이 좀 더 시각적이었다면. 이 장면이 좀 더 두 눈에 생생하게 보인다면. 그래서 저는 SF 소설들에 삽화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나, 정말 이게 가능할까요? 이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이게 다른 부작용이나 훨씬 더 커다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저는 SF 소설들이 라이트 노벨들을 참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발록에게는 날개가 있을 겁니다. 날개 없는 발록은 뽀대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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