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기술적 진보와 제도적인 평등 본문
유토피아 설정은 비단 유토피아 소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붉은 별> 같은 소설이 아니라 다른 하위 장르들 역시 유토피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주 탐사물, 스페이스 오페라, 밀리터리 SF 소설들도 자신만의 이상향을 그리곤 합니다. 물론 이런 소설 속의 문명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처럼 보이지 않을 겁니다. 작가는 최대한 이상적으로 그렸으나, 어떤 독자는 (심지어 소설 주인공이) 거기에 거부감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가령, 미래 인류 혹은 인류의 후손이 텔레파시 능력을 발전시켰다고 가정하죠. 이들은 공감 능력이 엄청나게 풍부하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개인의 행동을 공동체와 연결시키죠. 게다가 공감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사적 재산을 소유하지 않아요.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공유 재산이 훨씬 나을 겁니다. 이들은 공유 재산 제도를 운영하고, 그래서 천연 자원이나 자연 환경이 모두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개인이 함부로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는 이들에게 아주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이런 문명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할까요. 이 미래 인류 혹은 인류의 후손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갑니다. 자연 환경이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 않아요. 빈민을 차별하거나 지배 계급이 다른 계급들을 억누르지 않죠. 겉모습은 정말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는 이런 문명 사회를 거부할지 모릅니다. 인류가 이렇게 변하기를 바라지 않을지 몰라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거쳐 이런 문명에 당도했다고 해도 주인공은 이런 문명에서 살기 거부할지 모릅니다.
주인공은 좀 더 인간다운, 그러니까 현대 인간 사회와 가까운 공동체에서 살기 원하겠죠. 모두가 모두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사회…. 솔직히 저도 그런 사회에서 살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텔레파시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거나 제 속내를 보여주기 싫습니다. 공유 재산 제도나 깨끗한 자연 환경 등이 참 부럽지만, 만약 제가 저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저는 홀로 고립되겠죠. '평범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되지 않을지.
하지만 언젠가 인류, 그러니까 미래 인류나 인류의 후손이나 인류의 피조물은 저런 문명을 이룩할지 모릅니다. 뭐, 저는 텔레파시 능력이 정말 발현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다른 종으로 진화한다고 해도 텔레파시 능력이 발현될 리 없겠죠.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뀔지 모릅니다. 좀 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도록 신체 구조나 본능이 바뀔지 모르죠. 혹은 인간이 그런 생명체를 만들지 모릅니다. 만약 인류가 유전자 공학 기술을 상당히 연구한다면, 언젠가 인류가 그렇게 조화로운 피조물을 만들지 몰라요.
아니면 인공 지능이나 만능 기계가 인류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인류가 좀 더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인공 지능이 보조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 미래학자들이 기술적 특이점을 논의하는 중이고, 기술적 특이점은 그리 비현실적이거나 막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전자 공학과 기술적 특이점은 언젠가 환경 오염이나 대규모 전쟁을 막는 방법이 될지 모릅니다. 이건 그리 비논리적인 예상이 아닐 겁니다. 아무도 미래를 함부로 장담하지 못합니다.
가능성을 정확히 따지지 못하지만, 저는 미래 인류가 좀 더 평등하고 조화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적 진보는 언젠가 인류에게 조화롭고 평등한 체계를 선사할지 모릅니다. 그때는 기후 변화 같은 환경 오염이 없을 테고, 사람들이 핵 무기 때문에 벌벌 떨지 않겠죠. 뭐,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을 겁니다. 인류는 잠재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동물일지 몰라요. 먼 미래에 그 사회주의적인 잠재성이 터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기다린다고 해도 현재의 불평등과 수탈과 오염은 너무 심합니다.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올지 모르지만, 그 시절이 오기 전까지 약자들은 계속 수탈을 당하겠죠. 그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조화와 평등을 그저 기술적 진보에만 맡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현대 인류가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로 조화와 평등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도 기본 소득이나 추첨 민주주의나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 조합을 다들 실행한다면….
물론 현대 인류는 미래 인류나 미래 피조물만큼 평등한 문명을 만들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아주 심각하고 거대한 오염이나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쩌면 그게 첫 걸음일지 모르죠. 미래로 향하는 첫 걸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