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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그림 <Hydroponics Lab>과 보색 효과 문학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그림 <Hydroponics Lab>과 보색 효과 문학

OneTiger 2020. 2. 20. 21:02

[이 그림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비슷한 범주에 속하고, 외계 바이오 돔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위 그림 제목은 'Hydroponics Lab', 수경 재배 실험실입니다. 하지만 위 그림은 일반적인 수경 재배 실험실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수경 재배는 토양 없이, 식물이 오직 배양액만 이용하고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궤도 정거장과 세대 우주선에서 수경 재배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토양 없이, 궤도 정거장과 세대 우주선이 자급자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토양을 갖출 수 있으나, 만약 궤도 정거장과 세대 우주선이 토양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경 재배는 필수적인 기술이 될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수경 재배 개념과 달리, 위 그림 <Hydroponics Lab>은 토양을 묘사합니다.


그림 <Hydroponics Lab>에서 제목과 내용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위 그림은 수경 재배 실험실보다 (폐쇄) 인공 생태계를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은 폐쇄 인공 생태계를 반드시 가리키지 않으나, 어떤 관점에서 두 가지는 비슷한 범주에 속합니다. 궤도 정거장은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입니다. 궤도 정거장은 밀실과 비슷합니다. 여기는 열린 공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에서 식물들이 성장하고, 각종 화학 물질들이 순환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한다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처럼, 이런 현상은 폐쇄 인공 생태계에 가까워질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폐쇄 인공 생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궤도 정거장과 수경 재배 순환은 폐쇄 인공 생태계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우주 수경 재배는 우주 속의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급자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혹한 우주에서 사람들이 폐쇄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을 건설하고 자급자족할 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우주 수경 재배는 이런 상황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양쪽이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호랑이와 재규어가 비슷한 고양이과 야수인 것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우주 수경 재배는 비슷한 범주에 속합니다.


만약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수경 재배 실험을 검색한다면, 검색 프로그램은 비단 우주 수경 재배만 아니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바이오 돔을 함께 보여줄 겁니다. 우주 수경 재배가 우주 속의 자급자족을 가리키는 것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역시 우주 속의 자급자족을 가리키기 때문에, 양쪽은 비슷한 범주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류가 옳지 않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수경 재배 실험보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훨씬 폭넓은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수경 재배 실험은 토양 없는 농사에 가까우나,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생태계에 가깝습니다.



분명히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삼림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궤도 정거장이 뛰어난 수경 재배 기술들을 갖춘다고 해도, 궤도 정거장은 삼림을 품지 않을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자연 생태계를 모방하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영구 동토층, 열대 밀림, 모래 사막, 고산 지대를 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면, 개척 생태학자들이 여러 생태계들을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영구 동토층, 열대 밀림, 모래 사막, 고산 지대를 필수적으로 갖출지 모릅니다.


수경 재배 기술들은 영구 동토층, 열대 밀림, 모래 사막, 고산 지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수경 재배 기술들은 외계 행성 테라포밍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외계 불모지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수경 재배 기술들을 이용하고 자급자족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경 재배 기술들은 오직 자급자족, 외계 거주지만 뒷받침할 뿐입니다. 수경 재배 기술들은 대자연, 유사 지구 생태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비슷한 범주에 속하나, 우주 수경 재배와 테라포밍 사이에는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양쪽이 똑같은 범주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이런 반박은 타당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 속의 자급자족은 근본적인 유사성이고, 그래서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슷한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비슷한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양쪽은 폐쇄 인공 생태계를 비슷하게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Hydroponics Lab>은 일반적인 수경 재배 실험보다 (폐쇄) 인공 생태계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위 그림은 바이오 돔 건물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화가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화가가 이것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우주 수경 재배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비슷한 범주가 되기 때문에, 우주 수경 재배가 (폐쇄) 인공 생태계를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화가는 바이오 돔을 (저도 모르게) 그렸는지 모릅니다. 만약 위 그림 제목이 <Hydroponics Lab>보다 <Bio-Dome>이라고 해도, 제목 '바이오 돔'은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우주 개척 게임 <플래닛 베이스>가 자급자족을 위한 바이오 돔을 짓는 것처럼, 위 그림은 바이오 돔과 비슷합니다. 비록 화가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기에는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논의와 해석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지구에서 인류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나고, 궤도 정거장을 짓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우고,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설계할지 모릅니다. 외계 불모지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폐쇄적인 지하 거주지를 짓고, 바이오 돔은 지하 거주지 자급자족을 뒷받침할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은 수경 재배 기술들을 이용하거나 (그림 <Hydroponics Lab>처럼) 폐쇄 인공 생태계를 유지할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거주지가 지속 가능하다면, 개척 과학자들은 훨씬 어려운 과업에 도전할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거주지가 지속 가능하다면, 개척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 테라포밍에 도전할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가능하다면, 우주 시대는 엄청난 가능성을 돌파할 겁니다. 지구는 유일한 생명의 요람이 아닐 테고, 어머니 자연은 오직 지구만 가리키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나지 못하나, 언젠가 미래 인류는 외계 불모지 행성이 가이아 행성으로 바뀐다고 감동적으로 지켜볼지 모릅니다. 이런 '시대 격차'는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은 바뀔지 모릅니다.



만약 미래 인류가 궤도 정거장을 짓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우고, 외계 바이오 돔을 설계한다면, 미래 사회는 바뀔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행성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간다면, 외계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닐지 모릅니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사회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소설 <붉은 화성>부터 비디오 게임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까지, 여러 우주 개척 이야기들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천연 자원들을 고갈시키고, 산업 폐기물들을 버리고, 자연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경고합니다. 하드 SF 소설부터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까지, 우주 개척 이야기에서 자본주의 오염들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에서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추구할지 모릅니다. 비록 20세기 인류 문명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들을 짓밟았기 때문에, 20세기 사회주의 혁명들은 너무 움츠러들고 처참하게 타락해야 했으나,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에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꿈을 이룰지 모릅니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사회는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자연과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고, 우리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인식의 지평선은 한계를 뛰어넘고 거시적으로 바라봅니다.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사회 덕분에, 인식의 지평선은 고정 관념을 뛰어넘고 거시적으로 바라봅니다.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지기 때문에, SF 팬들은 SF 장르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SF 팬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SF 평론가들은 인식의 지평선이 SF 장르의 미덕이라고 평가합니다. SF 장르에게는 경이로운 미덕이 있고, 이건 '시대 격차'와 '인식의 지평선'입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인식의 지평선을 똑같이 제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SF 장르에게 '시대 격차'와 '인식의 지평선'은 놀랍고 훌륭한 미덕이나, 인식의 지평선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FTL: 패스터 댄 라이트>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시대 격차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이 <패스터 댄 라이트>를 좋아하나요? 분명히 <패스터 댄 라이트>는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우주선을 직접 설계하고 어떻게 우주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우주선 산소실이 망가진다면, 우주선 승무원들은 난리법석을 일으킬 겁니다. 하지만 우주선 승무원들 중에서 어떤 승무원은 질식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승무원은 금속 종족이고, 금속 종족 승무원은 질식 피해에 면역입니다.



인간을 비롯해 다른 산소 호흡 종족들이 난리법석을 일으키는 동안, 금속 종족 승무원은 산소실을 침착하게 수리할 테고, 우주선은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런 재미를 선사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다양하고 개성적인 외계인들은 전형적인 설정입니다. 하지만 금속 종족은 시대 격차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금속 종족 승무원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 이외에 다른 종족들을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금속 종족 승무원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는지 모르나, 분명히 그림 <Hydroponics Lab>과 게임 <FTL: 패스터 댄 라이트>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금속 종족 승무원 역시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금속 종족 승무원과 인간 승무원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금속 종족 승무원을 바라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속 종족 없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으나, 금속 종족과 인간이 커다란 대비가 되기 때문에, 테리 비슨이 단편 소설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를 쓴 것처럼, 우리는 금속 종족 승무원을 바라보고 인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속 종족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이 아니나, 외계 행성 바이오 돔처럼, 금속 종족 승무원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금속 종족 승무원이 인간을 부각하는 것처럼,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은 지구 자연 생태계를 부각합니다. 금속 종족 없이, 우리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외계 행성 바이오 돔 없이, 우리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계 바이오 돔과 지구 자연 생태계가 대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훨씬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에서 빨간색과 녹색이 보색 효과를 일으키는 것처럼, 외계 바이오 돔과 지구 자연 생태계는 보색 효과를 일으키고, 우리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훨씬 뚜렷하게 확인합니다. SF 장르는 보색 효과를 일으킵니다.


SF 장르는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금속 종족 승무원 같은 비일상적인 것들을 상상합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보색 효과를 일으키고, 보색 효과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이건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금속 종족 승무원이 똑같은 보색 효과라는 뜻이 아닙니다. SF 장르는 아주 다양한 보색 효과들을 선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비일상적인 상상력으로서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금속 종족 승무원은 보색 효과를 일으키고, 우리는 현실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다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고정 관념을 돌파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고, 그래서 SF 장르는 재미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SF 장르가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합니다. 현실 속에서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실 속에서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SF 장르는 외계 행성 바이오 돔에서 개척 생태학자들이 식물들과 버섯들과 꿀벌들을 관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무 황당무계합니다. 외계 행성 거주지에서 우리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현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을 이야기하나요? 하지만 외계 바이오 돔과 지구 자연 생태계가 보색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인식의 지평선은 넓어집니다.


이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문명, 자연, 우주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문명, 자연, 우주는 바뀝니다. 아무도 어떻게 문명, 자연, 우주가 바뀔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나, 분명히 문명, 자연, 우주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경이롭거나 참혹하게) 바뀔 겁니다. 이른바 주류 문학은 이것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주류 문학은 그저 고정적인 문명, 자연, 우주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심지어 주류 문학은 문명을 깊게 고민하지 않고, 자연을 웅장하게 감상하지 않고, 우주를 거시적으로 경외하지 않습니다. 반면, SF 장르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하고 새로운 문명과 자연과 우주를 제시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선과 하드 SF 바이오 돔은 다릅니다. 하지만 양쪽은 똑같은 보색 효과입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SF 장르는 보색 효과를 강렬하게 일으키고, 인식의 지평선은 넓어집니다. 비록 주류 문학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힌다고 해도, SF 장르는 훨씬 강렬하게 넓힐 수 있습니다. 이건 오직 비일상적인 상상력만 인식의 지평선을 강렬하게 넓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장르는 지배적인 관념에 굴복할지 모릅니다. 이른바 프로 문학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지 않으나, 프로 문학이 전복과 혁명을 추구하는 동안, SF 장르는 지배적인 자유주의에 굴복하고 우주선과 외계인을 안락하게 떠들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SF 장르는 보색 효과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SF 장르보다 프로 문학은 훨씬 전복적입니다.


비록 프로 문학이 우주선을 떠들지 않는다고 해도, 안락한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프로 문학은 훨씬 전복적입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보다 일상적인 상상력은 훨씬 강렬한 보색 효과일 수 있습니다. SF 장르는 지배적인 관념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편견, 자유주의 편견은 위험합니다. 한때 SF 장르에서 전형적인 주연 등장인물은 백인 남자 과학자였고, 솔직히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이건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러운 1,000만 관객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세요. 분명히 SF 장르에는 강렬한 보색 효과가 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으나, 그 자체로서 SF 장르는 강렬한 보색 효과가 아닙니다.



프로 문학이 전복과 혁명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색 효과는 SF 장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SF 장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문학 작가들은 보색 효과를 활용했습니다. 유토피아 문학은 대표적인 보색 효과입니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가부장적인 차별을 비판하기 위해 토마소 캄파넬라와 마가렛 캐번디시가 소설 <태양의 도시>와 소설 <불타는 세계>를 쓴 것처럼, SF 장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보색 효과 문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보색 효과 문학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SF 장르는 독립적인 분야가 아닙니다. SF 장르는 '보색 효과 문학'에 속합니다.


SF 장르가 '보색 효과 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소설 <지상의 여자들>이 어려운 자연 과학 용어들을 동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보색 효과 문학으로서 <지상의 여자들>은 SF 장르에 속하는지 모릅니다. 그림 <Hydroponics Lab>이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지구 자연 생태계를 대조하는 것처럼, 비디오 게임 <패스터 댄 라이트>가 인간 승무원과 금속 종족 승무원을 대조하는 것처럼,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여자 공동체와 가부장 사회를 대조하고 성 차별을 훨씬 뚜렷하게 부각합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에게 두꺼운 페미니즘 서적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충격적일 겁니다. 이건 강렬한 보색 효과입니다.



보색 효과는 '대조'입니다. 신호등이 빨간색과 녹색을 대조하는 것처럼, 보색 효과는 대조입니다. 녹색이 빨간색이 아니기 때문에, 녹색과 빨간색이 다르기 때문에, 보색 효과는 빨간색과 녹색을 대조합니다. 만약 우리가 보색 효과를 이용하고 현실을 들여다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대조해야 합니다. 현실과 비(非)현실이 대립할 때, 보색 효과는 성립합니다. 보색 효과를 위해, 현실을 훨씬 뚜렷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고 비현실, 현실이 아닌 것,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도입합니다. SF 장르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SF 장르는 현실을 강조합니다.


SF 장르는 비현실을 제시하고,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지구 자연 생태계를 대조하고, 현실을 뚜렷하게 부각합니다. 그 자체로서 비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자체로서 비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SF 팬들이 비현실에 감탄할 때, 그들은 현실을 인식합니다. 만약 이미 인류 문명이 여자 공동체라면, <지상의 여자들>은 보색 효과가 아닐 겁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이미 외계인들이 인간 남자들을 납치했다면,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인류 문명이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보색 효과를 연출합니다. 비현실 '배후'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어떤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하나, 토마소 캄파넬라와 마가렛 캐번디시가 <태양의 도시>와 <불타는 세계>를 쓴 것처럼, 보색 효과 문학은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색 효과 문학'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보색 효과 문학으로서 SF 장르는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이건 오직 보색 효과, 인식의 지평선만 SF 장르 미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 구축함이 포탄들을 쾅쾅 날리고 궤도 정거장을 때려부술 때, 여기에는 오직 보색 효과만 있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는 과장 효과(어마어마한 파괴)가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파괴를 과장하기 때문에, SF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행성 파괴를 목격하지 못하나, 스페이스 오페라는 행성을 간단하게 날려버립니다. SF 팬들은 과장된 파괴에 열광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파괴를 과장하는 것처럼, 바이오펑크는 외모 차별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레드 벨벳 아이린처럼, 아름다운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입니다. 이건 외모 지상주의, 외모 차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외모 지상주의는 그저 도덕적인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는 편견처럼, 사람들은 여자가 예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아스트로 차은우가 얼굴 천재라고 해도, 남자보다 여자에게 외모는 훨씬 중요한 기준입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고,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외모 지상주의 '배후'에는 막대한 이윤 창출이 있습니다. 이른바 뷰티 관련 동영상들 '배후'에는 온갖 화장품, 의류, 성형 수술 사업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뷰티 사업들은 외모 지상주의를 강화합니다. 만약 이런 뷰티 사업들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뷰티 관련 동영상들은 폭~싹 망할 겁니다. 바이오펑크 소설은 개조 미인을 내세우고 외모 지상주의를 강렬하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펑크 소설이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주제를 훨씬 강조하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가 수사학을 중시한 것처럼, 여전히 많은 문학 작가들이 기호와 비유와 상징을 동원하는 것처럼, 과장 효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보색 효과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처럼, 과장 효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SF 장르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하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은 거대하고 원초적이고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추상적입니다. 추상적인 '자연'보다 거대하고 원초적이고 살아있는 단일 개체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현실 속에서 고래 상어는 거대하고 살아있는 단일 개체이나, 고래 상어는 인류 문명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세콰이어 나무는 거대하고 살아있는 단일 개체이나, 세콰이어는 움직이지 않고, 그래서 세콰이어 나무는 역동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거대하고 원초적이고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단일 개체가 인류 문명을 초월한다면, 이 단일 개체는 '자연'을 상징할 겁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는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자연 환경을 정화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나, SF 장르에서 거대 괴수는 자연 환경을 보호합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새로운 자연을 제시합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새로운 자연을 제시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새로운 자연을 제시합니다. 거대 괴수에게는 이런 미덕이 있으나,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인류가 '자연'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은 이질적입니다. 거대 괴수 역시 이질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척추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척추 동물보다 무척추 동물, 절지류 동물이 훨씬 이질적이라고 느낍니다. 킹콩보다 모스라 애벌레는 훨씬 이질적일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벌레가 미물, 작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스라 애벌레 역시 벌레입니다.



하지만 모스라 애벌레는 아주 거대합니다. 모스라 애벌레는 사람들을 집어던지고, 고층 건물들을 부수고, 전차 포탄들을 씹어먹고, 짝퉁 울트라맨…, 아니, 제트 재규어에게 몸통 박치기를 날릴 수 있습니다. 비록 모스라 애벌레가 제트 재규어에게 몸통 박치기를 날린다고 해도, 모스라 애벌레는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모스라 애벌레가 '자연'을 상징하고, 서구 근대적인 문명이 원주민들을 자연 친화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모스라 애벌레는 원주민들을 보호합니다. 현실 속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원주민들을 수탈하나, SF 장르에서 모스라 애벌레는 원주민들을 보호합니다. SF 장르는 새로운 세상을 제시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과 여자가 똑같이 풍요롭다고 간주합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을 상징하기 때문에, 모스라 애벌레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모스라 애벌레에게는 여러 미덕들이 있습니다. 모스라 애벌레가 자연 환경을 정화하고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모스라 애벌레는 보색 효과를 연출합니다. 거대하고 역동적이고 초월적이고 살아있는 단일 개체로서 모스라 애벌레가 '자연'을 상징하기 때문에, 현실 속의 벌레들과 달리, 모스라 애벌레가 전차 포탄들을 씹어먹기 때문에, 모스라 애벌레는 과장 효과를 연출합니다. 거대한 모스라 애벌레처럼, SF 장르는 보색 효과이고, 동시에 SF 장르는 과장 효과입니다.



보색 효과와 과장 효과는 SF 장르 미덕이 함께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SF 팬들에게 보색 효과보다 과장 효과는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보색 효과처럼 과장 효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장 효과 이외에 SF 장르에는 다른 여러 미덕들이 있습니다. SF 장르에는 오직 한 가지 미덕만 있지 않으나, SF 장르에서 보색 효과는 아주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보색 효과 덕분에, SF 팬들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SF 장르 '배후'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만약 이미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 바이오 돔들을 건설했다면, 그림 <Hydroponics Lab>은 시대 격차를 제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현실에서 외계 행성 바이오 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 <Hydroponics Lab>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SF 팬들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때, SF 팬들은 현실을 인식합니다. SF 팬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것처럼, 마가렛 캐번디시가 소설 <불타는 세계>를 쓰는 동안, 남자 과학자들이 여자 과학자를 너무 차별했기 때문에, 마가렛 캐번디시는 현실, 가부장적인 편견을 너무 뚜렷하게 인식해야 했습니다. 소설 <불타는 세계>처럼, SF 장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보색 효과 문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습니다. SF 장르는 '보색 효과 문학'에 속합니다. 이건 <불타는 세계>가 SF 소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소설 <불타는 세계>와 그림 <Hydroponics Lab>은 보색 효과를 똑같이 선사하나, SF 팬들은 <불타는 세계>보다 <Hydroponics Lab>이 SF 장르에 훨씬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불타는 세계>는 SF 장르에 속하지 않거나, 비록 <불타는 세계>가 SF 장르에 속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너무 원형적인 SF 소설입니다. <Hydroponics Lab>이 자연 과학 지식들을 훨씬 많이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가렛 캐번디시가 과학자에 가까웠음에도, <불타는 세계>는 자연 과학 지식들을 많이 동원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불타는 세계>보다 <Hydroponics Lab>은 자연 과학 지식들을 훨씬 많이 동원합니다.


<Hydroponics Lab>과 달리, 왜 <불타는 세계>가 자연 과학 지식들을 많이 동원하지 못하나요? 마가렛 캐번디시가 그저 멍청한 계집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멍청한 마가렛 캐번디시가 함부로 깝쳤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자연 과학 기술들이 훨씬 발달했고, 그래서 21세기 초반 SF 그림은 자연 과학 지식들을 훨씬 많이 동원할 수 있습니다. 이건 서구 근대화가 SF 장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서구 근대화 덕분에, SF 장르는 여러 보색 효과 문학들과 다릅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는 보색 효과를 선사합니다.



모스라 애벌레는 벌레 괴수입니다. 모스라 애벌레는 SF 설정입니다. 적어도 모스라 애벌레는 Science Fantasy 설정입니다. 하지만 오직 SF 설정만 벌레 괴수를 이야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프롬 더스트>가 장갑 꿈틀이들과 녹색 꿈틀이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고대 신화 판타지 역시 벌레 괴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대 신화 판타지에서 녹색 꿈틀이들은 자연 환경을 표현하기 위한 보색 효과(와 강조 효과)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스라 애벌레와 녹색 꿈틀이는 다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생명 진화 역사를 언급할 수 있으나, 고대 신화 판타지는 언급하지 못합니다.


비디오 게임 <프롬 더스트>가 원초적인 자연 환경을 제시하는 것처럼, 고대 신화 판타지는 보색 효과를 선사합니다. 어쩌면 진부한 사이언스 판타지들보다 <프롬 더스트>는 훨씬 강렬한 보색 효과인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원초적인 자연 현상을 바라보고 근대 인류 문명을 다시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와 고대 신화 판타지는 보색 효과를 똑같이 연출하나, 양쪽은 다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생명 진화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으나, 고대 신화 판타지에서 아무리 원시 부족민들이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분다고 해도, 부족민들은 생명 진화 역사를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와 고대 신화 판타지는 벌레 괴수, 새로운 자연 환경을 제시하나, 양쪽은 다릅니다.]



서구 근대화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이언스 판타지는 생명 진화 역사를 언급할 수 있고, <프롬 더스트>는 언급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는 아주 막대한 생산 조건입니다. 어쩌면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는 (다른 보색 효과 문학들을 구분하기 위한) 결정적인 생산 조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만약 SF 팬들이 SF 장르를 근본적으로 논의하기 원한다면, SF 팬들은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는가?" 이런 물음 없이, SF 팬들은 SF 장르를 근본적으로 논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SF 팬들이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서구 제국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관념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 국가들을 비판합니다. 여기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예외입니다. 아무리 서구 강대국들이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를 짓밟고, 학살하고, 고립시킨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서구 강대국들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서구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탄압한다고 해도, 서구 시장 경제가 인디언들을 망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재 국가들은 나쁘나, 자랑스럽고 우월한 서구 강대국들은 예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폭력적입니다. 이미 17세기 이후, 서구 문명은 여러 식민지들을 악랄하게 수탈했고, 그래서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대숙청을 저질렀고 지랄발광했다고 해도, 서구 문명 폭력에게 감히 소비에트 연방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서구 문명 폭력을 절대 뛰어넘지 못합니다. 심지어 서구 문명 폭력 속에서 소비에트 연방조차 나타났습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서구 문명이 혁명을 그냥 놔뒀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가 훨씬 악랄하게 수탈하고, 훨씬 잔혹하게 침략하고, 훨씬 끔찍하게 학살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 독재 국가라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서구 제국주의에서 소비에트 연방조차 절대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오직 소비에트 연방만 온갖 조롱들과 비난들을 감수해야 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구 제국주의가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악랄한 영향을 미침에도, 많은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침묵합니다. 이건 너무 황당무계합니다. 외계 행성 바이오 돔과 금속 종족 승무원과 모스라 애벌레보다 서구 제국주의 편견은 훨씬 황당무계합니다.



서구 강대국들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입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자본주의 강대국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는지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고 발달했고 이어졌나요? 하늘에서 갑자기 부유하고 자유로운 자본주의가 뚝 떨어졌나요? 많은 사람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그들은 우월하고 똑똑한 백인 남자들이 부유하고 자유로운 자본주의를 뚝딱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이것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우월한 백인 남자들이 부유한 자본주의를 뚝딱 만들었나요? SF 팬들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 그림 <Hydroponics Lab> 출처: Alan O Brien,

https://www.artstation.com/artwork/nmBzO


※ 게임 <프롬 더스트> 스크린샷 출처: ShuttleRoque,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751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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