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체 우주선 ព្រះធរណី와 소설 형식 본문
[게임 플레이어는 이 'SF' 게임이 육각형 타일 기반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평가가 'SF' 평론인가요?]
만약 평론가가 SF 소설,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관해 설명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 설명이 SF 평론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평론가가 SF 소설을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SF 장르는 SF 평론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습니다. 평론가는 어떤 SF 소설을 언급하고 부사 위치를 열심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는 의성어가 유치하다고 비판하거나,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낫다고 호평하거나, 현재 시제보다 과거 시제가 읽기에 편리하다고 두둔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SF 평론보다 일반적인 소설 평론입니다.
"케이랄 등급 우주선은 VVN-417 우주 구축함에게 커다란 가시들을 날렸다. 케이랄 우주선이 살아있기 때문에, 생체 우주선은 미사일들보다 가시들을 날렸다. 콰지직! 콰지직! 콰지직! 날카로운 가시들은 미하디움 합금 장갑판을 찌그려뜨렸다." 이 내용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생체 우주선, 우주 구축함, 가상의 합금은 SF 소재입니다. 하지만 평론가는 의성어(콰지직!)가 유치하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의성어보다 서술 문장은 훨씬 나을지 모릅니다. "커다란 가시들이 미하디움 장갑판을 찌그러뜨렸을 때, 고통스러운 비명처럼, 둔탁한 소리들은 퍼졌다." 이 서술 문장은 훨씬 낫습니다.
평론가는 SF 내용을 언급하고, 의성어들을 비판하고, 서술 문장을 호평하나, 이건 SF 평론보다 일반적인 소설 평론입니다. 비록 생체 우주선 가시들보다 평범한 쐐기들이 "콰지직!"거린다고 해도, 평론가는 의성어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케이랄 생체 우주선과 의성어 비판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래서 이건 SF 평론이 아닙니다. 분명히 SF 평론가는 케이랄 생체 우주선을 언급했고 의성어들을 비판했으나, 케이랄 생체 우주선은 SF 평론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습니다.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평론가가 SF 게임에 관해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그림은 어떤 소녀를 보여줍니다. 소녀는 길다랗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립니다. 소녀는 제복을 입었고, 제복은 기이한 파란 빛들을 뿜습니다. 소녀는 권총과 구부러진 장검을 들었습니다. 권총과 장검 역시 평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SF 등장인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아가씨는 서유리입니다. 서유리는 비디오 게임 <클로저스> 등장인물입니다. 클로저스는 위상 능력자, 초능력자를 가리킵니다. <클로저스>는 초인 게임입니다. 초인 소설 <파괴된 사나이>가 사이언스 픽션인 것처럼, 초인 게임 <클로저스>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비디오 게임 <클로저스>가 서유리를 비롯해 초능력자(위상 능력자)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클로저스>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론가가 <클로저스>를 줄창 떠든다고 해도, 이건 SF 평론이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클로저스>에는 서유리를 비롯해 여러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티나 역시 <클로저스> 등장인물입니다. <클로저스>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성우들은 등장인물들을 연기합니다. 티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김자연 성우는 티나를 연기합니다. 문제는 김자연 성우가 메갈리아 페이스북을 후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유명한 성우 교체 사건입니다.
페이스북 코리아는 성 차별적인 페이지들을 관리하지 않았으나, 페이스북 코리아는 메갈리아 페이지를 계속 폐쇄했습니다. (이렇게 메갈리아는 주장합니다.) 메갈리아는 페이스북 코리아를 고발하기 원했고, 그래서 메갈리아는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습니다. 펀딩 목표는 800만 원이었으나, 모금은 1억 4천 3백만 원에 도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나 헬조선 사회에서 여자들이 분노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솔직히 자랑스러운 자유 민주주의 남한은 그저 수구 꼴통 가부장 사회에 불과합니다. 김자연 성우 역시 메갈리아 펀딩에 참가했고, 김자연 성우는 펀딩 보답 티셔츠를 받았습니다.
트위터에서 김자연 성우는 펀딩 티셔츠를 인증했습니다. 이건 유명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입니다. 당연히 가부장적인 인터넷 유저들은 김자연 성우를 거칠게 힐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클로저스> 게시판에서도 그들은 김자연 성우를 엄청나게 힐난했습니다. 게임 회사 넥슨은 티나 성우를 교체했습니다. 네이버, Daum, 레진 코믹스 웹툰 작가들은 이 사건을 크게 비판했습니다. 파장은 커졌고, 이건 다른 사상 검증 사건들로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이 설명에는 여러 오류들과 헛점들이 있는지 모르나, 성우 교체 사건이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들과 헛점들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성우 교체 사건은 전국 여성 노동 조합 산하의 디지털 콘텐츠 창작 노동자 지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명칭이 너무 길기 때문에, 조합원들은 명칭을 디콘지회라고 줄여서 부릅니다. 사상 검증 피해자들과 레규연 중심 인원들은 디콘지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레규연'은 레진 불공정 규탄 연대입니다. 성우 교체 사건처럼, 2018년에 다발적인 사상 검증 사건들은 터졌고, 이것들에 대처하기 위해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연대를 결성했습니다. 사상 검증 사건들에서 웹툰 작가들 역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2019년 12월에 일러스트레이터 연대가 기자 회견을 연 것처럼, 사상 검증 사건들은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가부장적인 수구 꼴통 사회이고,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반드시 기생해야 합니다. 여자 무급 노동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굴러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반드시 착취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이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작동 원리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선량해진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은 자유 민주주의가 수구 꼴통이라고 보여줬습니다. 만약 이렇게 평론가가 <클로저스>를 줄창 떠든다면, 이게 SF 평론이 되나요? 분명히 <클로저스>는 초인 게임이고, <파괴된 사나이>가 SF 소설인 것처럼, <클로저스>는 SF 게임입니다. <클로저스>는 성우 교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평론가는 성우 교체 사건과 가부장 제도를 떠듭니다. 이게 SF 평론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SF 초인 게임 <클로저스>는 성우 교체 사건을 일으켰으나, 위상 능력자와 성우 교체 사건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위상 능력자들 없이, 평론가는 가부장 제도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서유리는 18세 아가씨입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수두룩한 18세 아가씨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8세 아가씨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서유리는 위상 능력자입니다. 서유리는 초능력자입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초능력자를 만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나, 적어도 21세기 초반 과학은 초능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18세 아가씨는 현실이나, 초능력자는 비(非)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초능력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초능력자는 현실이 아니고, 초능력자는 비(非)현실입니다. 위상 능력자 서유리는 비현실입니다. SF 장르에게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심지어 이건 형식 차이, 매체 차이조차 뛰어넘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는 소설입니다. <클로저스>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입니다. <파괴된 사나이>와 <폭풍의 언덕>은 똑같이 '소설'입니다. 양쪽은 언어, 글자들을 동원합니다. <클로저스>는 비디오 게임이고, 비디오 게임으로서 <클로저스>는 종합 영상 매체입니다. 김자연 성우가 티나를 연기한 것처럼, <클로저스>는 오직 글자들만 동원하지 않습니다. <파괴된 사나이>와 <폭풍의 언덕>은 등장인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나, <클로저스>는 들려줍니다. 그래서 <파괴된 사나이>와 <폭풍의 언덕>이 가깝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동시에 이건 비디오 게임입니다. 장르는 중요하나, 장르는 형식을 빌립니다.]
SF 관점에서 소설 <파괴된 사나이>는 소설 <폭풍의 언덕>보다 게임 <클로저스>에 가깝습니다. <파괴된 사나이>와 <폭풍의 언덕>은 글자들을 동원하고, 양쪽은 똑같은 '소설'이나, <폭풍의 언덕>이 초능력자들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SF 관점에서 소설 <파괴된 사나이>는 소설 <폭풍의 언덕>보다 게임 <클로저스>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SF 관점에서 비(非)현실은 가장 커다란 특성이고, 이 특성은 형식 차이, 매체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다른 무엇보다 비현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건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형식을 빌려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이 되거나, 만화가 되거나, 영화가 되거나, 테이블 게임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SF 덕후들이 잡담을 나눌 때조차, 사이언스 픽션은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형식 없이, SF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만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 대화, 게임 같은 형식들을 빌려야 합니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인간을 만나기 위해 유령이 육체를 빌리는 것처럼,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 역시 형식들을 빌려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형식들을 빌릴 때, 형식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 가끔 JoySF 회원들은 주말 오프라인 모임을 열었습니다. 주말 오프라인 모임은 저녁 술자리로 이어졌고, 저녁 술자리는 날밤 까기로 이어졌습니다. JoySF 회원들은 소주들과 맥주들을 싸들었고, 여관방을 잡았고, 온갖 SF 설정들을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표도기님 역시 이런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회원들이 소주들을 붓고, 과자들을 우적거리고, 날밤을 새는 동안, 근력 강화복부터 초거대 기계 행성까지, 회원들은 온갖 SF 설정들을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노가리 깐다'라고 부릅니다. 근력 강화복부터 기계 행성까지, 사이언스 픽션들은 노가리라는 형식을 빌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SF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SF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해도, SF는 노가리라는 형식을 빌립니다. 근력 강화복이 노가리 까는 형식을 빌리기 때문에, 근력 강화복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 뭐, 만약 SF 평론가가 진지한 학술 논문에 '소주를 붓고 노가리를 깐다'라고 쓴다면, 이건 진지한 학술 논문에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진지한 학술 논문을 위해 SF 평론가는 근력 강화복이 언어, 대화에 기반한다고 순화할 겁니다. 이건 틀린 서술이 아닙니다. 사실 노가리는 언어입니다. 노가리는 신나는 수다이고, 수다는 언어(구어체)에 기반합니다. 이런 노가리처럼, SF 소설들은 글자들에 기반합니다.
SF 소설들은 글자들을 동원합니다. 문제는 이 글자들이 표준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이 게시글이 남한 표준 언어를 동원하는 것처럼, SF 소설들은 표준 언어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표준 언어는 표준적입니다. 이건 누구나 표준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에서 다들 표준 언어를 사용합니다. 6살짜리 아이는 표준 언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6살짜리 아이 역시 표준 언어를 사용합니다. 6살짜리 아이와 12살 소녀와 18세 아가씨와 34세 엄마와 73세 할머니는 똑같이 표준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표준 언어는 '표준'입니다. 다들 표준 언어를 사용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표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할 겁니다. "เ สือ ลูต่าก เทพี ะเลช."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건 우리가 논바이너리 성별을 인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이 문장은 표준 문법에 맞지 않고, 만약 누군가가 이것을 말한다면, 다른 남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태국 사람들 역시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언어보다 영어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영어 역시 원활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영어를 열심히 배우나, 남한 사회에서 영어는 표준 언어가 아니고, 남한 사람들은 영어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표준 언어는 지배적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나, 이건 착각입니다. 오히려 한국어는 남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한국어에 종속됩니다. 표준 언어에서 아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표준 언어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들 표준 언어를 사용합니다. 다들 표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표준 언어는 지겹습니다. 표준 언어가 너무 '표준'이기 때문에, 다들 이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오직 이것만 사용하기 때문에, 표준 언어는 너무 지겹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똑같은 음식을 계속 먹는다면, 사람들은 너무 질린다고 느낄 겁니다. 표준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표준 언어를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표준 언어는 너무 질립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어체보다 구어체는 낫습니다. 구어체는 훨씬 생생합니다. 문제는 문어체입니다. SF '소설'들은 표준 언어, 특히, 글자들을 동원해야 하고 문어체를 구사해야 합니다. 표준 언어 없이, 표준적인 문어체 서술 없이, SF 소설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2312년 외계 소행성과 대규모 바이오 돔과 야생 보호 구역을 묘사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2312년 언어를 동원하지 못합니다. 2020년 독자는 2312년 언어를 읽지 못합니다. SF 작가 역시 2312년 언어를 쓰지 못합니다. 아직 2312년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SF 작가가 2312년 언어를 쓸 수 있나요? 흔한 오해와 달리, SF 작가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SF 소설들은 표준 언어들을 씁니다.
SF 소설들이 표준 언어들을 쓰고, 표준 언어가 너무 지겹기 때문에, SF 소설들은 지겹습니다. 사실 수많은 소설들은 지겹습니다. 표준 언어가 너무 지겹고, 소설이 표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수많은 소설들은 지겹습니다. 심지어 어떤 웹소설 독자들은 오직 대화들(구어체)만 읽고 서술 문장들(문어체)을 읽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다릅니다. 비디오 게임은 그림들을 제시합니다. 표준 언어와 달리, 표준 그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표준 그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들은 지겹지 않습니다. 그림들에게는 고유한 매력들이 있습니다. 서유리 그림을 보세요. 이 그림은 표준 언어가 아닙니다. 이 그림에게는 고유한 매력이 있습니다. 서유리 그림처럼, 그림들에게는 고유한 매력들이 있습니다.
그림들에게 고유한 매력들이 있고, 비디오 게임 <클로저스>가 서유리 그림을 제시하는 것처럼, 비디오 게임이 그림을 제시하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들에는 고유한 매력들이 있습니다. SF 비디오 게임 역시 고유한 매력을 자랑합니다. SF '소설'은 지겨우나, SF '비디오 게임'은 고유한 매력을 자랑합니다. 만약 이렇게 평론가가 설명한다면, 이게 SF 평론인가요? 이게 SF 평론에 속할 수 있나요? 이 평론은 2312년 언어를 언급했으나, 사실 이 평론은 SF 평론에 속하지 않을 겁니다. SF 없이, 비현실 설정 없이, 평론가는 표준 언어가 지겹고 그림이 고유한 매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표준 언어가 지겹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설들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소설에게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보다 비디오 게임이 반드시 나은가요? 소설에게 너무 치명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설이 너무 지겹기 때문에, 독자가 소설책을 펼치지 말아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철학, 사상, 이론, 심리가 있습니다. 철학, 사상, 이론, 심리는 추상적입니다. 이것들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변증법이 가시적인가요? 누가 변증법을 두 손에 쥘 수 있나요? 변증법은 추상적입니다. 언어 역시 추상적입니다. 언어는 추상적인 철학, 사상, 이론, 심리를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림보다 언어는 낫습니다.
언어가 추상적인 것들을 서술하기 때문에,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우주선 설정을 서술하기 원한다면, 그림보다 언어는 나을 테고,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은 나을 겁니다. 아무리 비디오 게임이 우주선 설정을 서술하기 원한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은 그림보다 언어를 빌려야 합니다. 소설은 매력적입니다. 소설은 지겨우나, 한편으로 소설에는 이런 매력이 있습니다.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철학, 사상, 이론, 심리를 설명할 때, 그림보다 언어는 낫고,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은 낫습니다. 비현실 설정 없이, 평론가가 그림보다 언어를 칭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건 SF 평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글자와 그림 같은 형식들을 반드시 빌려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평론가가 비현실 설정에 치중하기 원한다고 해도, 평론가는 글자와 그림 같은 형식들을 건드려야 합니다. 비록 이게 SF 평론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직 비현실 설정만 사이언스 픽션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화재 감시원>은 시간 여행 소설이고, 비단 비현실 설정(시간 여행)만 아니라 소설 역시 <화재 감시원>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평론가는 비단 시간 여행만 아니라 소설, 글자, 언어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만약 2545년 인류 문명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건조한다면, 우주선은 폐쇄 인공 생태계가 될 겁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바이오 돔, 생태 구역이 있습니다. 바이오 돔에서 우주선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자연 생태계를 관리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고, 냉동 수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230년 동안, 우주선에서 개척자들은 먹고, 살고, 세대를 이어야 합니다. 먹고, 살고, 세대를 잇기 위해 우주선 사람들에게는 자연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먹고 삽니다. 바이오 돔 덕분에, 가혹한 우주에서 개척자들은 먹고 삽니다. 여러 인류 문화들이 대지 모신을 예찬한 것처럼, 개척자들은 바이오 돔 생태계가 풍요롭다고 느낍니다.
[만약 이런 바이오 돔이 장거리 개척 우주선에 들어간다면,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낭랑 18세인가요?]
우주선 개척자들이 바이오 돔 생태계가 풍요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우주선 이름이 적절하다고 느낍니다. 우주선 이름은 '프레아 토라니'입니다.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프레아 토라니'입니다. 왜 우주선 이름이 프레아 토라니인가요? 영화 <선샤인>에서 특수 임무 우주선이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빌리고 우주선을 이카루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가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영화 <선샤인>에서 특수 임무 우주선이 태양에 정말 다가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주선을 이카루스라고 부릅니다. 2545년 과학자들 역시 불교 설화를 빌립니다.
불교 설화에서 프레아 토라니(ព្រះធរណី)는 어머니 지구 여신, 대지 모신을 가리킵니다. 풍요로운 자연 생태계를 예찬하기 위해 여러 인류 문화들이 대지 모신을 만든 것처럼, 장거리 개척 우주선에서 사람들이 풍요로운 자연 생태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우주선 이름은 프레아 토라니입니다. 하지만 몇몇 우주선 개척자는 이 이름이 어색하다고 느낍니다. 프레아 토라니는 어머니 지구 여신입니다. 지구는 행성입니다. 반면, 장거리 우주선은 탈것입니다. 행성 생물권은 광활한 열린 생태계이나, 우주선 바이오 돔은 국지적인 폐쇄 생태계입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키우지 못합니다.
생태계 최고 포식자, 알파 프레데터로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드넓은 영역을 확보하기 때문에, 국지적인 폐쇄 생태계는 수마트라 호랑이를 키우지 못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은 오직 생산자들과 분해자들만 키울 뿐입니다. 게다가 우주선 바이오 돔이 너무 폐쇄적이기 때문에, 비록 작은 생태계 구성 요소가 어긋난다고 해도, 이건 전체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생태계 순환은 먹이 그물망이고, 그물망은 포괄적인 체계입니다. 작은 부분은 전체 체계에 포괄적인 영향들을 미칠지 모르고, 우주선 바이오 돔은 너무 민감합니다. 어머니 자연은 넉넉한 젖가슴이나, 우주선 바이오 돔은 민감합니다.
그래서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생체 우주선입니다. 국지적인 폐쇄 생태계에서 생물 다양성은 부족하고, 이런 상황에서 전염병 사태는 깡패가 됩니다. 최근에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하다고 난리법석이나,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환경 전문가들은 전염병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많은 무역량들을 부추기고, 너무 많은 무역량들이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하고, 생태계 교란들이 대대적인 생물 다양성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전염병 사태를 막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유 시장 경제를 없애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직 코로나 19 사태만 열심히 떠듭니다.
아무리 생태계 교란들이 심각하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오직 코로나 19 사태만 열심히 떠들고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저 두 눈 앞의 위기를 떠벌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2545년 미래 과학자들은 국지적인 폐쇄 생태계가 취약하다고 인식했습니다. 취약한 우주선 바이오 돔을 보충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개척 우주선에 생체 조직들을 덧붙입니다. 우주선 외벽들과 몇몇 기관에는 생체 조직들이 있고, 만약 바이오 돔이 전염병 사태에 부딪힌다면, 우주선 개척자들은 생체 조직들을 바이오 돔에 집어넣고 생물 다양성을 늘릴 겁니다. 그래서 개척 우주선은 살아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국지적인 폐쇄 생태계는 취약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이 폐쇄적이고 민감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몇몇 우주선 개척자는 우주선 이름(ព្រះធរណី)이 어색하다고 느낍니다.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자연'이 너무 많은 개념들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어떤 개척자는 바이오 돔이 어머니보다 아가씨라고 느낍니다. 서유리가 어머니보다 18세 아가씨인 것처럼, 바이오 돔은 아가씨입니다. 이런 용어가 우스꽝스럽지 않나요? 아가씨 바이오 돔? 어머니 자연은 웅장한 용어이나, 아가씨 바이오 돔은 너무 유치합니다. 우주선 개척자들은 이런 것들을 논의합니다. 이런 논의는 다른 형식들보다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 게시글이 언어를 이용하고 장거리 개척 우주선, 바이오 돔, 생태계 순환, 생물 다양성, 어머니 지구 여신, 아가씨 바이오 돔을 설명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이것들을 논의하는 동안, 사람들은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이것들을 논의해야 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같은 형식들보다 소설을 빌려야 합니다. 다른 형식들 역시 생체 우주선과 아가씨 바이오 돔을 논의할 수 있으나, 소설은 훨씬 낫습니다. 만화가 길다란 대화들을 연이어 서술할 수 있나요? 만화에서 이건 어색한 연출이나, 소설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이 스크린샷(링크)은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입니다.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은 종합 영상 매체입니다. 비디오 게임이라는 이름처럼, 비디오 게임에서 '비디오'는 아주 중요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산소 미포함>이 '비디오' 게임이라고 해도, <산소 미포함>을 논의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생태학 SF 관점에서 프레아 토라니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은 비슷합니다. 프레아 토라니는 장거리 '개척' 우주선입니다. <산소 미포함>은 우주 '생존' 게임입니다. 가혹한 우주/외계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개척자들/생존자들은 생태계 순환 요소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틀 전에, 4월 6일 게시글이 개척과 생존을 비교한 것처럼, 우주 개척과 우주 생존은 비슷한 위상입니다. 개척하고 생존하기 위해 우주선 개척자들과 외계 생존자들은 생태계 순환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주선 개척자들이 폐쇄 생태계 순환을 파악할 때, 그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외계 생존자들이 우주 거주지 순환을 파악할 때, 그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산소 미포함>은 여러 작물들, 야생 동물들, 온도, 수분 순환, 부산물들과 배설물들, 산소와 이산화탄소 교환, 미생물들을 제시합니다. 외계 생존자들은 이것들을 조합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장거리 우주선 바이오 돔에도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은 비슷합니다. 생태학 SF 관점은 양쪽이 비슷한 위상이라고 묶을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관점은 프레아 토라니 우주선에서 <산소 미포함>을 이끌어내고 <산소 미포함>에서 프레아 토라니 우주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언어에 기반합니다. 생태학 서적들이 생태계 순환 모식도들을 그리는 것처럼, 생태학 SF 평론 역시 생태계 순환 모식도들을 이용하고 프레아 토라니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서적들이 도표와 그래프, 모식도를 좋아하는 것처럼, 도표와 그래프, 모식도는 생태학 SF 평론을 뒷받침할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 서적들에서 언어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생태학 SF 평론에서 언어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평론가는 글쟁이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을 분류하기 위해 생태학 SF 평론은 언어에 기반해야 합니다. 이런 사례처럼, 사이언스 픽션이 생태적인 상상력을 펼칠 때, 사이언스 픽션은 다른 형식들보다 언어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언어를 고려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이 될 겁니다. 게다가 장거리 우주선에서 개척자들은 바이오 돔이 풍요로운 프레아 토라니, 어머니 자연, 대지 모신이라고 느꼈습니다.
우주선 개척자들이 바이오 돔을 대지 모신이라고 느낀 것처럼, <산소 미포함>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대지 모신을 느끼나요? 생태학 SF 관점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이 비슷한 위상이라고 분류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대지 모신 분위기를 풍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이 비슷한 위상이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대지 모신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산소 미포함>이 대지 모신 분위기를 연출하나요?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느낄 수 있나요? 이 스크린샷(링크)처럼, <Among Ripples>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대지 모신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만약 개척 우주선 바이오 돔이 아가씨라면, 외계 거주지의 생태계 순환 요소들 역시 낭랑 18세인가요?]
<Among Ripples>는 힐링 게임입니다. 이 게임과 달리, <산소 미포함>은 어려운 코믹 게임이고, 어려운 코믹 게임과 풍요로운 대지 모신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소 미포함>은 비슷한 위상이나, <Among Ripples>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대지 모신 분위기를 풍길 수 있고, <산소 미포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산소 미포함>을 바라보고 대지 모신을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주관적인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산소 미포함>에서 대지 모신을 이끌어낸다고 해도, 게임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주선 바이오 돔이 폐쇄 생태계인 것처럼, <산소 미포함>에서 외계 거주지는 국지적입니다. 외계 거주지는 드넓은 열린 생태계가 아닙니다. 외계 생존자들은 굴착하고, 굴착하고, 굴착하고, 계속 굴착합니다. 외계 거주지는 갑갑한 생물권입니다. 외계 거주지가 갑갑한 생물권이기 때문에, 우주선 개척자들이 바이오 돔을 18세 아가씨라고 느낀 것처럼,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산소 미포함>이 18세 아가씨를 묘사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것 역시 주관적인 해석이고,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건 오류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는 너무 치명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서 항상 빠르고 편리한 것만 추구할 때, 아마존 원주민들은 어머니 품 같은 따스한 대자연 속에서 느리지만 자유롭고 신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여자 고등학생은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를 읽었고 이런 소감문을 적었습니다. 이 소감문은 너무 낭만적이나, 이 소감문이 어머니 품 같은 따스한 대자연을 비유하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은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어머니 자연이 아주 유명한 비유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장거리 개척 우주선을 ព្រះធរណី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건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대지 모신을 연출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는 것처럼, 장거리 우주선에서 바이오 돔은 작물들을 키우고 개척자들을 먹입니다. 개척자들에게 바이오 돔은 엄마입니다. 여고생 소감문부터 하드 SF 소설까지, 어머니 자연은 유용한 개념이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 자연은 여자가 엄마라고 각인합니다. 여자는 엄마입니다. 여자가 엄마이기 때문에,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편견은 이것을 왜곡할지 모릅니다. 이 게시글에서 다섯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수구 꼴통 가부장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수구 꼴통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수구 꼴통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머니 자연이 여자가 엄마라고 각인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과 수유와 육아는 태생적인 의무가 될지 모릅니다. "당연히 여자는 시집을 가고 아기를 낳아야지." 다른 가부장 사회들처럼,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건 지배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게다가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과 수유와 육아가 태생적인 의무이기 때문에, 육아는 노동이 되지 못하고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밖에서 남자는 힘들게 일하고, 집에서 여자는 아기를 편하게 돌본다." 이 사고 방식은 육아가 노동이 아니라고 무시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만약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남자들 역시 (좆 같은 회사 사장들에게 사표들을 내던지고) 육아 노동에 참가할지 모릅니다. 여자와 남자는 모성이 함께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남자들이 회사 사장들에게 사표들을 내던진다면, 영리 기업들은 높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할 겁니다. 비록 남자들이 사표들을 내던지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사회 재화들, 잉여 생산물들을 독차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육아 노동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육아 노동자들은 여자들입니다. 자본주의가 육아 노동을 착취하고, 많은 육아 노동자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반드시 기생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반드시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형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 자연은 여자가 엄마라고 각인합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뒷받침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여자들조차 가부장 편견들을 떠받들지 모릅니다. '여자' 고등학생이 어머니 품 같은 따스한 대자연을 언급했을 때, 여자 고등학생은 가부장 편견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여고생 소감문이 어머니 자연을 비유하는 것처럼, 어머니 자연은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만약 성 해방 운동이 어머니 자연에 반대한다면, 이 운동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어머니 자연이 아주 유명한 비유이기 때문에, 아무리 성 해방 운동이 반대한다고 해도, 여고생부터 하드 SF 작가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어머니 자연을 계속 비유할 겁니다. 게다가 만약 성 해방 운동이 어머니 자연에 반대한다면,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겁니다. 어머니 자연은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상징은 반영입니다. 상징은 설명이 아닙니다. 어머니 자연은 여자 무급 노동이 옳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주민들은 어머니 품 같은 따스한 대자연 속에서 신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문장은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한다고 분석하지 않습니다. 상징은 과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레고 블록들을 조립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상징들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녹색 나뭇잎 문양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가리키거나, 밸 플럼우드 서적을 가리키거나, 우드 엘프 정찰병을 가리키거나, 유기농 비누 제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상징은 다양한 조합들이고, 상징은 뭔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 해방 운동이 상징을 비판한다면,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겁니다. 남자들은 똑똑한 남자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를 똑똑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똑똑한 남자는 똑똑한 사람이 되나, 똑똑한 여자는 사람보다 여자입니다. 남자는 인간이 되나,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남자 고등학생은 고교생이나, 여자 고등학생은 여고생입니다. (헬조선 언론들은 '여고생'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합니다.) 남자 전사는 남전사가 아니나, 여자 전사는 여전사입니다. 남자 작가는 선생님이나, 여자 작가는 여사님입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보조적이고 열등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흑인 노예가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똑똑한 여자라는 표현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경제 현상입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 동영상(링크)은 비디오 게임 <월드 오브 워쉽> 예고편입니다. 예고편 동영상은 처절한 해상 전투를 보여줍니다. 처절한 해상 전투와 안락한 가정은 대조적입니다. 남자는 처절한 해상 전투에 참가하고, 평온한 가정에서 여자는 (아이와 함께) 안락하게 지냅니다. 남자는 고생하고, 여자는 안락합니다. 남자는 해상 전투에 참가하고 고생하나, 여자는 그저 남자를 기다릴 뿐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예고편을 보고 남자가 문명을 떠받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처절한 전쟁에 참가하나, 여자는 그저 남자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 예고편은 남자가 주된 존재이고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지역 유럽은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으나, 이 예고편은 서구 제국주의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성 해방 운동에게 이 예고편은 불쾌할지 모르나, 이 예고편은 그저 반영일 뿐입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예고편을 보고 가부장 편견에 빠진다고 해도, 자본주의 지역이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예고편은 존재합니다. <월드 오브 워쉽>이 그저 창작물, 게임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 해방 운동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대지 모신 상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 장면이 어머니 자연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징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 해방 운동은 어머니 자연보다 자본주의를 막아야 합니다. 대지 모신 상징보다 자본주의는 훨씬 심각한 문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 변호사들은 저작권이 중요하다고 나불거립니다. 그들은 저작권이 노동 가치를 보호한다고 주절거립니다. 하지만 만약 노동 가치가 정말 소중하다면, 경제학자들, 변호사들이 육아 노동 가치를 주장하나요? 그들이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한다고 비판하나요? 저작권, 소설, 만화, 영화, 게임 소유 권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대 인류 부족들은 여러 민담들을 지었으나, 저작 권리 없이, 그들은 잘 먹었고 잘 살았습니다. 저작 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여러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을 분류합니다. 이 게시글이 소설 형식을 줄줄이 설명하는 것처럼, <SF 생태주의>에서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 같은 창작물들은 중요한 논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비록 고작 저작 권리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소로운 저작 권리 없이, 고대 인류 부족들은 잘 먹었고 잘 살았습니다. 반면, 육아 노동 가치는 소중합니다. 육아 노동 가치는 아주 원초적입니다. 만약 아무도 육아를 맡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종할 겁니다. 만약 아무도 육아를 맡지 않는다면, 200년 이내에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할 겁니다. 이건 사실, 팩트입니다.
230년 동안,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우주선 개척자들이 아기들을 낳지 않고 돌봐주지 않는다면,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유령선이 될 겁니다. 개척 우주선이 유령선이 되는 것처럼, 육아 노동 가치는 생물종 유지 문제로 이어집니다. 육아 노동 가치는 호모 사피엔스 멸종을 판가름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경제학자들, 변호사들이 육아 노동 가치를 옹호하나요? 대단하신 경제학자들, 변호사들께서 돌봄 노동 사회화를 지지하나요? 아니, 그들은 그저 합의금들을 뜯기 원할 뿐입니다. 저작 권리는 노동 가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미친 돈벌이 수단에 불과합니다.
만약 대단하신 저작 권리가 정말 소중하다면, 왜 디콘지회 조합원들이 힘들게 투쟁해야 하나요? 왜 많은 경제학자들, 변호사들이 디콘지회 조합원들을 응원하지 않나요? 왜 여자 전자책 작가들이 힘들게 연대해야 하나요? 대단하신 경제학자들, 변호사들께서 창작 노동 가치를 정말 옹호하나요? 아니, 그들은 그저 합의금들을 뜯기 원할 뿐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오직 이윤 창출만 유일무이한 목적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 변호사들 역시 두 눈을 까뒤집고 미친 돈벌이에 달려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태학 SF 평론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대지 모신과 돌봄 노동 사회화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언어에 기반합니다. 이 게시글이 표준 언어를 이용하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대지 모신과 돌봄 노동 사회화를 설명하는 것처럼, 언어는 추상적인 철학, 사상, 이론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장르에게도 다른 형식들보다 언어, 글자, 소설은 좋은 형식일 겁니다. 이건 오직 소설만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표준 언어가 너무 지겨운 것처럼, 소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노련한 작가들은 광범위한 어휘력들을 조합하고 이것을 극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련한 작가들이 어휘력들을 조합한다고 해도, 소설 작가들은 고유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들이 표준 언어를 조합하는 동안, 심지어 소설 작가들은 실수할지 모릅니다. "그 남자의 입술에서 싸늘한 냉기는 언어라는 형태로 뿜어져 나왔다." 이 문장은 너무 작위적입니다. 작가가 기교에 너무 치중했기 때문에, 이 문장은 유연한 독서를 방해합니다. 심지어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대가들조차 이런 유치한 문장을 지었습니다. 불쌍한 소설 작가는 고정적인 단어들을 조합하고 유치한 문장을 짓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런 고정적인 문어체에 저항합니다.)
어떤 SF 팬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보다 거대 괴수 싸움박질을 좋아할 겁니다. 언어, 소설은 거대 괴수 싸움박질을 생생하게 묘사하지 못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와 라돈은 치고 박고 싸웁니다.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 <고지라: 괴수왕>은 비싼 시각 효과들을 퍼붓습니다. 소설은 이것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만약 <고지라: 괴수왕>이 소설이라면, 독자는 요란하고 화려한 싸움박질을 구경하기보다 지겹고 질리는 표준 언어를 읽어야 합니다. 서유리 그림이 고유한 매력을 자랑하는 것처럼, 비싼 시각 효과들은 고유한 매력들을 자랑하나, 표준 언어는 지겹고 질립니다.
개척 우주선과 대지 모신과 돌봄 노동 사회화는 소설에 어울리고, 괴수 공중 전투는 영화에 어울립니다. 만약 SF 문화가 소설, 만화, 영화, 연극, 애니메이션, 게임을 골고루 포함한다면, 이건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렇게 평론가는 어떻게 형식이 비(非)현실에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는 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소설이 어울리고 왜 모스라와 영화가 어울리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평론은 형식과 내용(비현실)을 함께 논의하고, 그래서 이건 바람직한 (생태학) SF 평론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