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생체 탈것과 부족한 두 가지 생산 조건 본문
[SF 장르에서 상대적으로 생체 비행선을 비롯해 거대 생체 탈것들은 드뭅니다. 부족한 생산 조건 때문입니다.]
예전에 10월 22일 게시글(링크)은 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기계 우주선보다 생체 우주선이 드문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많은 창작물들이 그러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생산 조건이 필요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도 생산 조건이 필요합니다. 생체 우주선에게도 생산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자체로서 창작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가공하고, 특정한 형식을 이용해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창작물이 됩니다. 현실에서 작가가 특정한 형식을 이용하고 창작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작물에게는 생산 조건이 필요합니다.
19세기 유럽 작가는 산업 도시, 노동 조합 총파업, 성 해방 운동을 조합하고 유토피아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유토피아 문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나, 19세기 유럽 작가와 달리, 13세기 유럽 작가는 산업 도시, 노동 조합 총파업, 성 해방 운동을 조합하지 못합니다. 13세기 유럽 작가가 유토피아 문학을 쓴다고 해도, 13세기 유럽 유토피아 문학에는 산업 도시, 노동 조합 총파업, 성 해방 운동이 없을 겁니다. 13세기 유럽 유토피아 문학이 성 해방 시각을 드러낸다고 해도, 13세기 성 해방 운동과 19세기 성 해방 운동은 다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대답은 생산 조건입니다.
19세기 유럽은 서구 근대화를 거치고, 서구 근대화에서 산업 도시, 사회주의, 성 해방 운동은 비롯합니다. <공산당 선언>이 표명하는 것처럼,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도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뀔 겁니다. 자연 환경 역시 계속 바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적이고 순결하고 아름답고 낭만적인 자연 환경을 꿈꾸나, 진화 이론은 자연 환경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인류 역시 자연 환경에 속합니다. 인류와 자연은 변증법적으로 상호 작용하고,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은 계속 바뀔 겁니다. 19세기 유럽 유토피아 문학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에 산업 도시, 사회주의, 성 해방 운동, 진화 이론이 있기 때문에, 19세기 유럽 작가는 이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3세기 문학과 19세기 문학은 다릅니다. 문학에게 현실은 생산 조건이고, 13세기 현실과 19세기 현실은 다릅니다. 그래서 13세기 문학과 19세기 문학 역시 다릅니다. 19세기 유토피아 문학에게 산업 도시, 사회주의, 성 해방 운동, 진화 이론이 생산 조건이 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생체 우주선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다면, 이것이 무엇인가요? 생산 조건 때문에, 생체 우주선이 드문가요?
만약 SF 평론가가 생체 우주선을 논의하기 원한다면,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파악해야 할 겁니다. 성 해방 운동이 퍼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19세기 이후, 페미니즘 문학은 미래를 전망하기 시작합니다. 성 해방 운동이 페미니즘 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뭔가는 생체 우주선에게 영향을 미칠 겁니다. 생명 과학은 가장 커다란 영향일 겁니다. 생체 우주선은 문자 그대로 거대한 생명체이고, 그래서 생명 과학은 가장 커다란 생산 조건이 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생명 과학은 거대 탈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산업 문명 이전까지, 인류는 여러 동물들을 이용했으나, 산업 문명 이후, 기계들은 동물들을 밀어냅니다.
산업 동력으로서 동물들보다 기계들은 훨씬 효율적입니다. 서구 산업 근대화 이후, 기계는 크게 발달하고, 이제 더 이상 인류 문명에서 사역 동물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동물들은 동력이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어떤 지역들은 동물들을 이용하나, 전반적으로 산업 문명에서 동물들보다 기계들은 훨씬 효율적입니다. 거대 탈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코끼리가 대단하다고 해도, 서구 산업 근대화는 거대한 열차와 거대한 증기 선박을 만들 수 있고, 코끼리는 열차와 증기 선박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산업 문명이 동물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해도, 왜 산업 문명이 기계들을 버리고 동물들을 비롯해 생명체들을 이용해야 하나요?
이미 기계가 효율적임에도, 왜 산업 문명이 동물들을 구태여 이용해야 하나요? 기계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기계에게는 신진 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특정한 목적만을 위해 기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동물을 비롯해 생명체는 생존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체에게 다른 특정한 목적보다 생존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커다란 생명체들은 오직 어떤 특정한 목적에만 치중하지 못합니다. 만약 산업 문명이 동력을 이용해야 한다면, 생명체보다 기계는 훨씬 나을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동물들을 비롯해 생명체들은 산업 동력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 과학 분야는 거대 탈것 공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생명 과학 분야에서 대표적인 사업들은 식량 사업, 의료 및 보건 사업입니다. 오랜 예전부터 인류에게 자연, 생명체들은 식량과 의약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꿀벌들을 쳤고 약초들을 뜯었습니다. 여전히 식량과 의약을 얻기 위해 인류에게는 자연, 생명체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기계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는 기계를 먹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계를 먹을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별로 효율적이지 않거나, 기계는 생명체를 모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로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먹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에는 생물 다양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 생명력, 번성, 풍요로움을 예찬합니다.
자연을 예찬하기 위해 우리는 온갖 미사여구들을 덧붙일 수 있으나, 어쩌면 먹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인지 모릅니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할 때, 작물들과 가축들 역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의약와 보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약을 먹습니다. 약은 우리 몸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체를 이용해 약을 만듭니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할 때, 우리는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기계들이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는 기계를 직접 먹거나 기계를 몸에 직접 집어넣지 못합니다. 기계들은 식량과 의약과 보건에 많은 도움들을 줄 수 있으나, 우리는 기계를 직접 먹거나 직접 집어넣지 못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아직 기계는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래에는 기계 식량, 기계 의약, 기계 환경이 나타날지 모르나, 21세기 초반 오늘날에 이런 것들은 시기상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생명 과학 분야는 거대 탈것보다 식량과 의약 및 보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만약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진다면, 생명 과학 분야는 오직 이윤 창출만 추구하지 않을 겁니다. 생명 과학 분야는 시선을 돌리고 다른 것들에 초점을 맞출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생명 과학 분야가 이윤 창출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 과학은 거대 생체 탈것을 쉽게 만들지 못할지 모릅니다. 동물들을 비롯해 생명체보다 기계가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생명 과학이 거대 생체 탈것을 만들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난해한 작업이 될 겁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생명 현상은 존재했습니다. 생명 현상은 원초적입니다. 그래서 생명 과학은 생명 현상을 쉽게 가공하거나 통제하거나 지배하지 못합니다. 생명 과학이 생명 현상을 가공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 제한이 있습니다. 만약 생명 과학이 한계, 제한을 함부로 넘어간다면, 여러 바이오펑크 소설들이 경고하는 것처럼, 이건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이런 재앙은 오직 거대 생체 탈것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만약 생명 과학이 아주 거대한 생체 열차를 만들기 원한다고 해도, 이게 너무 난해한 작업이기 때문에, 생명 과학은 섣불리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현실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생체 열차를 타지 못합니다. 거대한 증기 열차는 서구 산업 근대화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 장르에서 열차가 대표 상징이 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열차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는 비단 열차만 아니라 다른 많은 거대 탈것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래에는 훨씬 거대한 기계 탈것들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들은 현실 속의 거대 기계 탈것들을 과장하고 미래 거대 기계 탈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미 현실 속에 거대 기계 탈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 기계 탈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차부터 화물선까지, 현실 속에는 거대 생체 탈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생체 우주선에게 생산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상대적으로 기계 우주선보다 생체 우주선이 드물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SF 평론가는 생명 과학 이외에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생명 과학 분야는 근대적인 이유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생명 과학은 나타났습니다. 20세기 소설은 생명 과학을 떠들 수 있으나, 14세기 소설은 생명 과학을 알지 못합니다. 생체 우주선에게 생명 과학은 서구 근대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는 근대적인 생산 조건 이외에 전근대적인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신화는 전근대적입니다. 신화가 전근대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과 신화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종교과 과학이 대립한 것처럼, 전근대적인 신화와 근대적인 사이언스 픽션은 대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근대적인 사이언스 픽션이 신화를 추구하고 영웅과 전설과 정령과 요정을 떠들어야 하나요? 하지만 원더 우먼이 그리스 아마존 신화를 이용하고, 마이티 토르가 북유럽 토르 신화를 이용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비단 원더 우먼과 마이티 토르만 아니라 소설 <신들의 사회>와 <미사고의 숲>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신화, 전설, 민담은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 바다 괴수들에게 레비아탄, 크라켄, 베헤모스 같은 이름들을 붙이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는 중요한 영감입니다. 신화는 정말 뮤즈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진보와 계몽은 신화와 종교가 구닥다리라고 취급하나, 우리가 종교적이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아직 계몽주의는 완전하지 않고, 여전히 신화와 종교 시대에서 우리는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신화와 종교 시대에서 우리는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신화와 종교에서 사이언스 픽션 역시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만듭니다. 신화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신화에서 사이언스 픽션 역시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20세기 이후, 신화 시대에서 서구 근대화가 벗어났다고 해도,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는 중요한 영감과 뮤즈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는 전근대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에게 신화가 전근대적인 생산 조건이라면, 생체 우주선에게도 신화가 전근대적인 생산 조건이 될 수 있나요?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유명한 여러 신화들에는 거대 생체 선박, 거대 선박을 이끌기 위한 생체 동력원이 없습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서 이집트 신화 괴수 레비아탄은 생체 철갑 수송선입니다. 하지만 이건 오리지널 설정입니다. 신화 속에서 레비아탄은 생체 철갑 수송선보다 그저 거대 바다 괴수에 불과합니다.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의 레비아탄처럼, 유명한 신화들이 생체 철갑 수송선을 이야기하나요? 신화들이 거대 생체 선박들, 거대 선박들을 이끌기 위한 생체 동력원들을 이야기하나요? 아르고는 아주 유명한 선박이나, 아르고가 거대 생체 선박인가요? 아르고를 이끌기 위해 거대 바다 괴수가 헤엄치나요? 그건 아닙니다. 신화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거대 생체 선박들은 드뭅니다. 신화들은 여러 거대 괴수들을 이야기하나, 거대 괴수들은 거대 선박들을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대 괴수는 적대적입니다. 거대 괴수는 거대 야수입니다. 히드라가 독사이고, 만티코어가 호랑이고, 펜리르가 늑대인 것처럼, 거대 괴수는 야수입니다.
야수는 문명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수와 문명은 적대적입니다. 문명은 야수를 때려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야수는 위험합니다. 거대 야수는 훨씬 위험합니다. 그래서 문명은 영웅을 요구합니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 토르 같은 영웅은 히드라와 펜리르 같은 거대 야수를 때려잡습니다. 신화들에서 거대 야수들은 적대적이고,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도 거대 괴수들은 적대적입니다. 신화들에서 거대 야수들이 거대 선박들을 이끌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에서도 거대 괴수들은 거대 우주선들을 이끌지 않습니다. 신화들이 거대 생체 선박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들 역시 생체 우주선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생체 우주선이 있다고 해도, 생체 우주선은 문명적이기보다 야만적일지 모릅니다.]
생체 우주선에게 신화는 생산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고지라 같은 파괴적인 거대 괴수에게 신화는 생산 조건이 될 수 있으나, 생체 우주선에게 생산 조건으로서 신화는 다소 부족합니다. 아무리 거대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다고 해도, 거대 물고기는 본격적인 생체 수송선이 아닙니다. SF 작가가 고대 신화들을 읽는다고 해도, SF 작가는 생체 우주선을 설정하기 위한 뮤즈를 만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생체 우주선에게 근대적인 생산 조건(생명 과학)과 전근대적인 생산 조건(고대 신화)은 모두 부족합니다. SF 평론가는 부족한 두 가지 생산 조건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계 우주선보다 생체 우주선이 드물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배틀플릿 고딕: 아르마다 2>에서 타이라니드 진영이 생체 우주선들을 운영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외계인들은 생체 우주선들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계인들은 이른바 문명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야만적입니다. 문명적인 인류는 생체 우주선보다 기계 우주선을 이용합니다. 문명적인 외계인들은 생체 우주선보다 기계 우주선을 이용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생체 우주선이 나타난다고 해도, 생체 우주선은 파괴적인 거대 괴수가 되거나 문명보다 야만을 강조할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이 기계들을 이용하기 때문에, 기계 탈것은 훨씬 문명적입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들이 생체 우주선을 비롯해 거대 생체 탈것들을 반드시 외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문명적인 인류, 문명적인 외계인들은 거대 생체 탈것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들은 주연이 됩니다. 소설 <레비아탄> 3부작에서 부유 고래 비행선 레비아탄은 좋은 사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상대적으로 생체 우주선들보다 기계 우주선들은 훨씬 많을 겁니다. 두 가지 생산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론가가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을 평가할 때,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실 속에서 SF 설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그리고 SF 장르 전체에서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생산 조건은 서구 근대화일 겁니다. <공산당 선언>이 표명하는 것처럼, 둘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서구 근대화를 파악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도대체 어디에서 서구 근대화라는 것이 튀어나왔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이것을 근본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SF 평론가는 헛소리들을 열심히 지껄일지 모릅니다.
※ 그림 <leviathan> 출처: gorrin, https://www.deviantart.com/gorrin/art/leviathan-187996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