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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옴팔로스>와 새로운 생명 진화 역사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옴팔로스>와 새로운 생명 진화 역사

OneTiger 2019. 11. 10. 19:56

[이런 생태계 게임은 새로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새로운 진화가 사이언스 픽션을 뒷받침하나요?]



테드 창이 쓴 단편 소설 <옴팔로스>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니, 잠깐. 정말 테드 창이 사이언스 픽션을 썼나요? 많은 SF 독자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단편 소설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단편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에 속할 수 있나요? 이 단편 소설은 새로운 진화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진화 역사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에 속합니다. 진화 이론은 생명 진화 역사가 38억 년, 심지어 40억 년을 넘어간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지구 나이 역시 40억을 넘습니다.


진화 이론은 어떻게 생명체들이 나타나고, 멸종하고, 번성하고, 다양해지는지 설명합니다. 아직 진화 이론은 어떻게 최초 생명체가 나타나는지 밝히지 못하나, 진화 이론은 어떻게 생명체들이 살아왔고 어떻게 생명체들이 다양해지는지 설명합니다. 단편 소설 <옴팔로스>에서도 지구 생명체들은 진화하고, 과학자들은 이것을 연구합니다. 과학자로서 소설 주인공 역시 진화 이론을 연구합니다. 핵심은 소설 속의 생명 진화 역사와 현실 속의 생명 진화 역사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단편 소설 <옴팔로스>에는 새로운 진화 역사가 있고, 당연히 새로운 진화 역사는 새로운 생명체들을 낳습니다.



<옴팔로스>가 새로운 진화 역사, 새로운 생명체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현실에 이런 진화 역사, 이런 생명체가 없기 때문에, <옴팔로스>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옴팔로스>는 사변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변 장르에는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판타지와 공포 역시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무협 역시 사변 장르에 들어간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SF, 판타지, 공포와 달리, 무협은 서구 문화보다 중국 문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무협 소설들에서 주된 배경은 중국입니다. 사람들이 무협 장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무협 장르가 중국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SF, 판타지, 공포처럼, 무협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칩니다. 장풍과 사자후는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비약과 사악한 강시 역시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서구 공포 장르에 좀비가 있는 것처럼, 무협 장르에는 강시가 있고, 무협 장르는 강시를 이용해 공포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협 장르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폭넓은 사변 장르가 무협을 포함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옴팔로스>는 무협이 아닙니다. 이 단편 소설은 공포가 아닙니다. <옴팔로스>는 판타지와 비슷할 수 있으나, 많은 독자들은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느낄 겁니다.



왜 많은 독자들이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느끼나요? <옴팔로스>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서구 근대화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진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사실 진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를 대표합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근대화가 열심히 발달하는 동안, 진화 이론은 과학 혁명을 대표합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들은 진화 이론과 뉴턴 이론을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과학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과학'적인 사회주의가 진화 이론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진화'한다고 느꼈습니다. 분명히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공산주의는 도래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진화'하지 않습니다. 이건 엉터리 진화 이론, 엉터리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너무 팽배했기 때문에, 심지어 프리드리히 엥겔스조차 과학 이론을 잘못 적용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서구 근대적인 (이른바) 문명인들이 '19세기 과학'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찰스 다윈과 <종의 기원>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종의 기원>은 서구 근대화를 대표합니다.



무엇보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종교 세력은 진화 이론을 핍박했습니다. 과학자들은 핍박에 맞섰고, 진화 이론은 종교를 밀어냈고, 이건 유명한 '종교 대 과학'이 됩니다. 19세기 과학자들이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진화 이론이 종교를 밀어냈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사람들은 종교가 백해무익하고 과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21세기 초반을 지배하나, 이건 대중적인 편견입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 이론을 비난했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진화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오랜 동안 종교가 문화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종교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동안, 서구 지식인들은 문화가 흔들린다고 느꼈습니다.


문화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지식인들은 문학이 종교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여러 과학자들은 종교를 공격하나, 이런 과학자들 역시 종교인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신도들인지 모릅니다. 여러 과학자들은 종교를 쉽고 가볍게 비난하나, 종교는 쉽고 가벼운 영역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 종교가 인류 문화에 스몄기 때문에, 종교가 믿음, 신념, 영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종교를 진지하고 깊게 다루어야 합니다. 종교는 과학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불거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종교 대 과학' 논쟁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진화 이론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진화 이론은 수많은 것들을 엄청나게 바꿨습니다.



단편 소설 <옴팔로스>는 새로운 진화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진화 역사가 새롭기 때문에, 당연히 진화 이론 역시 새롭습니다. <옴팔로스>는 새로운 진화 역사와 새로운 진화 이론을 보여줍니다. 단편 소설 속에는 새로운 과학이 있습니다. <옴팔로스>는 신화, 전설, 민담보다 서구 근대화 과학을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칩니다. 그래서 <옴팔로스>는 판타지, 공포, 무협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하지만 만약 새로운 진화 역사, 새로운 진화 이론 때문에,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 된다면, 새로운 진화 역사, 새로운 진화 이론이 사이언스 픽션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건이 되나요?


만약 어떤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이 새로운 진화 역사를 제시한다면, 이것들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나요? 비디오 게임 <심라이프>는 새로운 진화 역사를 제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명체들을 합성하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니치> 역시 새로운 진화 역사를 제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형질들을 선택하고, 새로운 동물을 낳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인텔리젠트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Equilinox>는 이른바 평온한 '힐링'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진화 선택 요소가 있습니다.



고전적인 <심라이프>부터 21세기 초반 <Equilinox>까지,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새로운 진화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만약 새로운 진화 역사 덕분에, 단편 소설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 된다면, <Equilinox>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Equilinox>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이 생태계 게임 속에 SF 요소들이 어느 정도 있나요? 만약 <Equilinox>가 너무 일상적인 것 같다면, <심라이프>와 <니치>와 <인텔리젠트 디자인>은 어떤가요? <심라이프>와 <니치>와 <인텔리젠트 디자인>에서 일상적인 묘사들보다 비일상적인 묘사들은 훨씬 많습니다. 검치 오리너구리는 비일상적입니다.


사람들은 검치 오리너구리가 일상적인 묘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검치 오리너구리는 새로운 진화 역사, 새로운 진화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니치>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나요? 이게 SF 게임인가요? 여기에서 우리는 소설과 게임에서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를 향해 초점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왜 독자들이 SF 소설 <옴팔로스>를 읽기 원하나요? 독자들이 SF 소설 <옴팔로스>에게 무엇을 기대하나요? 왜 독자들이 <옴팔로스>에게 찬사를 보내나요? <옴팔로스>는 서구 근대화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칩니다. <옴팔로스>는 변화와 시대 격차를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지구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자연 생태계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인류 문명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 인류 문명은 특정한 역사들을 거쳤습니다. 특정한 역사들 속에서 지구, 자연 생태계,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지구, 자연 생태계,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뀐 것처럼, 앞으로 지구, 자연 생태계,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뀔 겁니다. 심지어 우주 그 자체조차 바뀔지 모릅니다. 어떻게 우주가 바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나, 분명히 우주는 바뀔 겁니다. 이건 엄청난 시대 격차입니다.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런 시대 격차에 주목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시대 격차는 아주 근본적인 특성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고, 사이언티픽 로망스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옴팔로스> 역시 새로운 진화 역사를 이용해 엄청난 시대 격차를 선사합니다. 독자는 시대 격차를 느끼고,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고정 관념을 깨뜨린다면, <니치> 역시 그럴 수 있나요? 네, 당연히 <니치>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검치 오리너구리를 합성하고 외칩니다. "우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명체가!"



만약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가 외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진화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하늘에서 자연 생태계가 뚝 떨어지지 않았고 자연 생태계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얄팍한 환경 운동가들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이상적인 자연을 떠드나, 아름답고 순결하고 이상적인 자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치 오리너구리는 날카롭고 길다란 검치를 이용해 얄팍한 환경 운동가들의 똥꼬들을 깨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기후 변화를 해결하고 자연 생태계를 제대로 연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얄팍한 환경 운동에서 벗어나야 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검치 오리너구리를 보고 얄팍한 환경 운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니치>는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심라이프>와 <인텔리젠트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Equilinox>조차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시대 격차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옴팔로스>와 <니치>가 똑같은 시대 격차를 제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옴팔로스>와 <니치>가 새로운 진화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도, <옴팔로스>와 <니치>는 새로운 진화 역사를 이용해 다른 주제를 펼칩니다. <니치>는 턴 방식 전략 게임에 가깝습니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턴 방식 전략 게임인 것처럼, <니치>는 턴 방식 전략 게임에 가깝습니다. <니치>는 새로운 진화 이론을 턴 방식 게임에 덧붙입니다. <옴팔로스>는 전략 게임이 아닙니다. <옴팔로스>에서 주된 재미는 전략/전술보다 논리와 신념입니다. '종교 대 과학'이 아주 유명한 논쟁이기 때문에, 진화 이론과 종교는 쉽게 떨어지지 못합니다. 종교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오직 종교만 믿음인가요? 과학이 믿음이 아닌가요? 과학자들이 과학을 믿지 않나요? 과학자들이 정말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과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하나요? 만약 과학 연구가 통념을 깨뜨린다면, 과학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옴팔로스>는 새로운 진화 역사를 제시하고, 이건 놀라운 시대 격차입니다. 하지만 감동적인 SF 소설로서 <옴팔로스>는 시대 격차를 훨씬 밀고 나갑니다. 훨씬 머나먼 시대 격차는 소설 주인공의 믿음을 시험하고, 소설 주인공 과학자는 시험에 빠져야 합니다.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소설 주인공이 기도한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시험에 빠져야 합니다. 과학자로서 소설 주인공이 시험을 이길 수 있나요? 아니, 과학자 이전에 소설 주인공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소설 주인공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수 있나요? 뛰어난 SF 소설로서 <옴팔로스>는 오직 신기한 생명체들만 늘어놓지 않습니다.



<옴팔로스>는 시대 격차를 훨씬 멀리 밀어붙이고 소설 주인공을 시험합니다. 새로운 시대 격변은 소설 주인공을 시험 속에 빠뜨립니다. 소설 주인공 과학자는 영혼이 무너지고 흔들린다고 느낍니다.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은 이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옴팔로스>가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이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자신의 믿음을 숨기지 못합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면, 소설 주인공은 좀 더 객관적인 척했을지 모릅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내면 속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에서 소설 주인공은 내면을 제대로 숨기지 못합니다.


이것 때문에, 어떤 추리 소설들은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을 선택합니다.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에서 소설 주인공이 내면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추리 소설들은 이것을 트릭으로 바꿉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트릭이 작가의 농간이라고 느끼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추리 장르 공식입니다. 일반적으로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에서 소설 주인공이 내면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들은 이것을 트릭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다른 시점들을 보여준다면, 소설 분위기는 크게 바뀔 겁니다.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에서 독자는 흔들리는 영혼을 직접 만납니다.



[이런 게임에도 새로운 진화, 새로운 생명체들이 있으나, 게임 속의 시대 격차와 <옴팔로스>는 다릅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소설, 글자 매체보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같은 시각적인 매체라면, 소설 주인공이 흔들리는 믿음을 직접 드러낼 수 있을까요? 글자 매체는 추상적입니다. 하지만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사상과 내면과 감정을 직접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과가 (별로) 없습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소설 주인공 내면을 직접 만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에서 글자들보다 시각적인 정보들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어떤 게임은 텍스트 기반 게임이나, 상당히 많은 게임들은 시각적인 정보들을 중시합니다.


1) 쇼타가 나를 볼 때마다, 나는 심장이 멈춘다고 느낀다.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2) 카제하야 쇼타는 쿠로누마 사와코를 쳐다본다. 사와코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1번 문구는 1인칭 화자 시점이고, 2번 문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1번 문구와 2번 문구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나,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1번 문구에서 독자는 쿠로누마 사와코 내면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1번 문구에서 독자는 사와코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2번 문구에서 독자는 오직 시각적인 정보들만 관찰합니다. 영화 같은 시각적인 매체는 1번 문구보다 2번 문구에 가깝습니다. 단편 '소설' <옴팔로스>는 2번 문구보다 1번 문구에 가깝습니다. 만약 <옴팔로스>가 실사 영화가 된다면, 분위기 역시 크게 바뀔 겁니다. <옴팔로스>에서 내면 시험과 1인칭 화자 시점은 유기적입니다.



유기적인 주제와 형식, 내용과 매체는 믿음과 과학 사이를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과 믿음이 대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믿음이 아닙니다. 과학은 오직 논리만 추구합니다. 하지만 정말 과학이 오직 논리만 추구하나요? 과학이 논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과학에서 또 다른 신념이 파생하지 않나요? 만약 과학이 통념을 깨뜨리고 보편적인 신념을 깨뜨린다면, 어떻게 과학자가 반응해야 하나요? 과학자 이전에 어떻게 인간이 통념을 버리고 보편적인 신념을 깨뜨리고 과학을 따를 수 있나요? 이런 주제는 또 다른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건 훨씬 중요한 물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학이 과학이라고 믿으나, 이게 사실인가요? 과학은 그저 믿음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과학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논리들을 덧붙이는지 모릅니다. 과학보다 믿음을 위해 우리는 논리들을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과학에서 믿음은 비롯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가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19세기 서구에서 진화 이론이 충격이었기 때문에, 우생학,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진화 이론을 이용해 약자들을 차별합니다. 여자들이 태생적으로 조신하다고 사회 생물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을 위해 우리는 과학을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라고 지랄 지랄 개지랄을 떱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홀로세 대멸종을 부채질하고 행성급 환경 범죄 기후 변화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서구 제국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지랄 지랄 개지랄을 떠나요? 아니, 오히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찬양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가 훨씬 심각한 문제, 행성급 환경 범죄임에도, 자본주의를 숭배하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게 논리적인 비판인가요? 아니,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게는 논리 따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빨갱이들이 나쁘다고 지랄거리기 원할 뿐입니다. 이건 논리가 아닙니다. 이건 믿음, 특히, 잘못되고 맹목적인 믿음입니다. 물론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 역시 믿음, 특히, 잘못되고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아무리 여기에서 제가 논리와 과학을 떠든다고 해도, 어쩌면 저는 녹색 빨갱이 광신도 계집년인지 모릅니다. 저에게 외부 시각이 없기 때문에, 저는 저를 스스로 검증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과학을 빙자하지 않고 광신에 빠지지 않는다고 검증하지 못합니다. 저는 정말 제가 과학적인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변증법과 역사 유물 이론은 아주 논리적인 것 같으나, 이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저를 검증하지 못한다면, 제가 과학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다면, 왜 제가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하나요? 만약 생태 사회주의가 논리보다 그저 믿음에 불과하다면, 왜 제가 이것을 지지해야 하나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다른 환경 운동들보다 생태 사회주의가 밑바닥 사람들을 훨씬 많이 떠들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가 식민지 수탈에 찬성했을 때, 이미 사회주의는 밑바닥 사람들을 떠들었습니다.


생태 사회주의(와 에코 페미니즘, 세계 체제 이론) 이외에 다른 환경 운동들은 밑바닥 사람들을 외면합니다. 변증법과 역사 유물 이론은 그저 뚱딴지 말장난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변증법과 역사 유물 이론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해도, 생태 사회주의에게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훨씬 먼저, 훨씬 많이 사회주의가 밑바닥 사람들을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 게임 <니치> 스크린샷 출처: JessiMew, https://www.youtube.com/watch?v=VoDIZpg7S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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