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 생물 다양성 속의 인간 본문
"어떻게 사랑이 바뀌니?" 이 대사는 이른바 수사 의문문입니다. 화자는 사랑이 바뀌는지 물으나, 이건 대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답을 듣기 위해 화자는 이것을 묻지 않습니다. 이 물음은 사랑이 바뀌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사랑이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하기 위해 화자는 (수사) 의문문을 말합니다. 왜 화자가 사랑이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하나요? 왜 화자가 수사 의문문을 말하고 사랑이 고정적이라고 강조하나요? 만약 사랑이 바뀐다면, 화자에게서 사랑은 떠날 겁니다. 만약 사랑이 떠난다면, 화자는 혼자가 될 겁니다. 화자가 혼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화자는 사랑에게 기대지 못합니다.
화자가 사랑에게 기대지 못하기 때문에, 화자는 기반을 잃습니다. 화자가 기반을 잃기 때문에, 화자는 추락할지 모릅니다. 사랑은 인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인생의 디딤돌이기 때문에, 비록 인생이 지치고 힘들다고 해도, 화자는 사랑에게 기대고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사랑이 인생의 디딤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화자는 사랑을 디딤돌이라고 판단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사랑이 디딤돌이라고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디딤돌이 안정적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지치고 힘든 인생을 위로하고 보듬는다고 판단합니다.
인생이 지치고 힘들 때, 인간은 사랑에게 기대고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화자 역시 이것을 100%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혼란스러운 폭풍처럼, 비록 인생이 어지럽다고 해도, 인간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안정을 찾기 때문에, 사랑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건 오직 사랑만 디딤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인 이외에 다른 것에게 의지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덕질'은 인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덕질이 무엇인가요? 덕질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아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대상들은 다양할 수 있으나, 분명히 덕후는 대상을 아주 사랑합니다.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고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어떤 대상을 아주 사랑하고 덕후가 됩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아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 디딤돌이 되는 것처럼, 덕질은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에서 덕질은 아주 든든한 안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 문화에는 많은 취향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취향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들을 읽고 책벌레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둑 고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도를 연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표들을 수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프라모델들을 조립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클래식들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돌 그룹에게 열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식가입니다. 문학부터 우표 수집까지, 바둑 고수부터 아이돌 팬 클럽까지,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취향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취향들은 덕질이 될 수 있고, 덕질은 지치고 힘든 인생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생이 너무 흔들린다고 해도, 덕후들이 문학을 읽고, 바둑을 두고, 아이돌 그룹에게 열광하는 동안, 덕후들은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덕후들이 안정을 찾기 때문에, 인생에서 덕질은 아주 중요하고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소중한 것처럼, 덕질은 소중합니다.
덕후가 뭔가를 덕질하는 동안, 덕후가 이것을 아~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덕질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덕질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덕후는 이 대상에게 너무 몰입할지 모릅니다. 만약 덕후가 대상에게 너무 몰입한다면, 덕후는 다른 대상들을 비웃을지 모릅니다. 만약 아이돌 팬이 아이돌 그룹에게 너무 몰입한다면, 아이돌 팬은 문학과 바둑과 우표 수집과 철도 연구가 시시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흥, 문학과 바둑과 우표 수집과 철도 연구는 열등해! 우리 판은 최고야! 우리 오빠들은 최고야! 다른 덕질들보다 우리 오빠들은 훨씬 우월해!"
아이돌 팬이 아이돌 그룹에게 너무 몰입하기 때문에, 아이돌 팬이 다른 취향들, 다른 덕질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만약 덕후가 너무 몰입한다면, 덕후는 우월과 열등을 판단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른바 취존중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취향을 존중해야 합니다. 취향에는 우월과 열등이 없고, 덕질에는 최고가 없습니다. 보편성 철학 서적 <판단력 비판>에서 임마누엘 칸트가 미학이 보편적이라고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심지어 임마누엘 칸트조차 취향이 논쟁 대상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우리는 취향을 존중해야 합니다. 취존중처럼, 덕존중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덕질을 존중해야 합니다.
거대 괴수 역시 덕질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사이언스 판타지가 거대 괴수를 묘사하고, SF 팬이 거대 괴수를 아주 좋아한다면, 이건 거대 괴수 덕질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테고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와 스피노사우루스 같은 공룡들에게 열광하는 것처럼, 많은 화가들이 아라키스 모래벌레를 묘사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경이롭고 매력적입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모래벌레 같은 거대 괴수가 경이롭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이건 덕질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덕존중이 중요하기 때문에, 만약 거대 괴수 덕후가 이 덕질을 최고라고 내세운다면, 다른 덕후들은 크게 반박할 겁니다.
문학 덕후, 바둑 덕후, 철도 덕후, 아이돌 덕후는 거대 괴수 덕질이 최고가 아니라고 반박할 겁니다. "문학 덕질, 바둑 덕질, 철도 덕질, 아이돌 덕질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우월해! 거대 괴수 덕질은 최고야! 우하하하!" 만약 거대 괴수 덕후가 이것을 주장한다면, 다른 덕후들은 반박할 겁니다. 덕질에게 우월과 열등이 없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는 이 덕질이 최고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거대 괴수 덕후에게 거대 괴수가 경이롭고 매력적인 것처럼, 거대 괴수 덕후는 문학 덕질, 바둑 덕질, 철도 덕질, 아이돌 덕질을 존중해야 합니다. 취향이 논쟁 대상이 아닌 것처럼, 덕후는 덕존중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거대 괴수 덕질에게는 고유한 미덕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 덕질에게 고유한 미덕이 있기 때문에, 다른 덕질들이 이 미덕을 선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는 이 대상에게 심취합니다. 이 미덕이 무엇인가요? 거대 괴수 덕질에게 어떤 고유한 미덕이 있나요? 왜 거대 괴수 덕후가 문학과 바둑과 철도와 아이돌 그룹보다 거대 괴수에게 심취하나요? 그저께 7월 28일 <근본적인 서사 판타지와 거대 괴수>는 거대 괴수가 근본을 과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먹거리가 근본이고, 거대 괴수가 근본을 과장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질은 근본적일 수 있습니다. 이건 고유한 미덕입니다.
문학 덕질, 바둑 덕질, 철도 덕질, 아이돌 덕질은 근본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이돌 팬이 아이돌 그룹에게 열광한다고 해도, 아이돌 팬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근본을 과장한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언니들을 대단해! 스테이씨 언니들은 굉장해! 가창력, 안무, 팀워크에서 스테이씨는 아주 훌륭한 실력파야! 우하하하!" 스테이씨 팬들은 이것을 주장할 수 있으나, 그들은 스테이씨 멤버들이 근본을 과장한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관점에서 스테이씨 덕질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고유한 미덕(근본)을 선사합니다. 이 관점에서 아이돌 덕질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훨씬 근본적입니다.
그래서 이게 전부인가요? 근본이 전부인가요?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근본은 가장 우선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근본은 우선합니다. 아무리 스테이씨 팬들이 <ASAP>을 스밍하기 원한다고 해도, 그들이 스밍하기 전에, 그들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스테이씨 팬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그들은 굶어죽을 테고, 그들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ASAP>을 스밍하지 못할 겁니다. 스테이씨 팬들이 <ASAP>을 스밍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무엇보다 근본이 우선하고, 거대 괴수 덕질이 근본을 과장하기 때문에,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우선할 수 있습니다. 이 미덕은 고유합니다.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우선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취향에게 우월과 열등이 없다고 해도, 거대 괴수 덕후는 이 덕질이 우월에 수렴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다른 덕질들이 우선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는 이 덕질이 최고에 수렴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 덕질이 최고에 수렴할지 모르는 것처럼, 거대 괴수 덕질에서 근본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거대 괴수 덕질에서 근본이 전부인가요?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질이 오직 이것만 강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지구인입니다. 분명히 많고 많은 인간들은 지구인입니다.
그 어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지구인입니다. 심지어 국제 우주 정거장 승무원들조차 지구에 속합니다. 지구는 생명의 요람입니다. 이건 SF적인 표현이나, 지구는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입니다. 지구는 아주 웅장한 바이오 돔입니다. 모든 인간이 지구인이고, 지구가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이기 때문에, 이건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류가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주 거대하고 웅장한 생체 우주선, 바이오 돔,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바둑 덕질과 아이돌 덕질은 생체 우주선을 강조하지 않으나,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문학 덕질과 철도 덕질은 바이오 돔을 강조하지 않으나,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지구에서 우리는 유일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척추)동물계에 속하나, 생물 다양성이 다양한 동물들을 낳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유일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유일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생체 우주선 지구가 아주 다양한 동물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대조할 때, 대조는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은 이른바 보색 효과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주황 해바라기와 파란 배경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대조는 상대를 강조합니다. 이 그림(링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은 오렌지들과 시원한 배경을 대조합니다. 대조가 상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두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미술에서 보색 효과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요리사가 빨간 접시 위에 녹색 야채들을 올린다면, 빨간 접시는 녹색 야채들을 훨씬 강조할 겁니다. 파란 배경이 주황 해바라기를 강조하고, 시원한 배경이 오렌지를 강조하고, 빨간 접시가 녹색 야채를 강조하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대조한다면, 동물들은 인간이 누구인지 강조할 겁니다.
동물이 인간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새롭게 조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과 대왕 오징어를 대조한다면, 인간과 대왕 오징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대왕 오징어는 우리가 누구인지 강조할 겁니다. 생물 다양성은 인간이 누구인지 강조할 수 있습니다. "와, 대왕 오징어를 봐! 대왕 오징어는 아주 놀라워! 어떻게 자연이 이 야생 동물을 만들었지?" 인간과 대왕 오징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감탄합니다. 만약 인간과 대왕 오징어가 똑같다면, 인간은 감탄하지 않을 겁니다. 다양성(차이)은 놀라움으로 이어집니다. 다양성(차이)이 대조하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과 토끼를 비교할 수 있으나, 인간과 토끼보다 인간과 대왕 오징어는 인간을 부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토끼보다 대왕 오징어가 인간을 부각하나요? 대왕 오징어가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토끼는 똑같은 육상 동물입니다. 인간과 토끼는 똑같은 포유류입니다. 반면, 대왕 오징어는 해양 동물, 두족류입니다. 인간과 토끼에게는 공통점이 있으나, 인간과 대왕 오징어에게는 차이가 있습니다. 토끼보다 대왕 오징어가 이질적이기 때문에, 대왕 오징어는 훨씬 놀랍고, 대왕 오징어는 인간이 누구인지 부각합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무엇보다 대왕 오징어는 '거대'합니다.
우리는 토끼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토끼가 작기 때문에, 우리는 토끼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대왕 오징어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우리보다 대왕 오징어가 거대하기 때문에, 아무 장비 없이, 우리는 대왕 오징어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대왕 오징어는 우리를 압도합니다. 대왕 오징어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대왕 오징어는 압도적입니다. 압도적인 것은 놀랍습니다. 대왕 오징어는 비단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압도적입니다. 우리가 토끼를 통제하기 때문에, 토끼는 인간을 부각하지 못합니다. 대왕 오징어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각합니다.
바이오펑크는 생체 비행선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펑크가 유전 공학을 과장하기 때문에, 생체 개조 기술은 거대 괴수를 키우고 생체 비행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체 비행선은 흔한 소재가 아닙니다. 생체 비행선과 달리, 인조인간은 흔한 소재입니다. 바이오펑크가 유전 공학을 과장하기 때문에, 생체 개조 기술은 인조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생체 비행선과 인조인간은 똑같은 바이오펑크 설정이나, 왜 생체 비행선이 드문 소재이고, 왜 인조인간이 흔한 소재인가요? 고대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이질적인 인간들(이방인들)을 이야기합니다. 이질적인 인간은 아주 흔한 소재입니다.
인류 문명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협력하고, 갈등하고, 소통하고, 대립하기 때문에, 이질적인 인간들은 아주 흔한 소재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어떤 인간들을 우상화하거나 폄하할 때, 우리는 이질적인 인간(이방인)을 비유합니다. 반면, 고대 사람들은 거대 해양 동물과 선박을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거대 해양 동물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거대 해양 동물과 선박을 연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은 생체 선박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이언스 판타지에서도 생체 비행선은 드문 소재인지 모릅니다. 생체 비행선이 드문 것처럼, 대왕 오징어는 압도적입니다.
"아아, 인간은 대왕 오징어를 당해내지 못해! 생물 다양성은 아주 압도적이야!" 인간이 감탄하는 것처럼, 대왕 오징어는 생물 다양성이 압도적이라고 부각합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때문에, 압도적인 경이로움 속에서 인간은 새롭게 자각합니다. 대왕 오징어가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에, 만약 사이언스 판타지가 50m짜리 거대 바다 괴수를 묘사한다면, 이건 훨씬 압도적이고 경이로울 겁니다. 거대 괴수가 훨씬 압도적이고 경이롭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는 거대 괴수를 아~주 사랑합니다. 이건 오직 거대 괴수만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사이언스 판타지가 아주 거대한 나무, 아주 거대한 버섯을 묘사한다면, 아주 거대한 나무, 아주 거대한 버섯은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입니다.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대왕 오징어는 (커다란 눈동자로) 우리를 응시할 수 있고, 우리 역시 대왕 오징어(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볼 수 있으나, 나무와 버섯은 우리를 응시하지 않고, 우리는 나무와 버섯을 마주볼 수 없습니다. 인간과 나무, 버섯이 서로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나무와 버섯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무와 버섯은 동물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과 가니메데는 똑같지 않습니다. 인간과 가니메데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가니메데가 인간을 부각하나요? 하지만 외계 위성은 동물이 아닙니다. 외계 위성이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범주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가니메데는 인간을 부각하지 않습니다. 주황색과 파란색이 똑같은 범주(색깔)에 속하기 때문에, 파란색이 주황색을 강조하는 것처럼, 두 대상이 똑같은 범주에 속하고, 똑같은 범주 속에서 두 대상이 대조적일 때, 이건 강조 효과를 유발합니다. 인간과 대왕 오징어는 똑같은 범주(동물)에 속하나, 인간과 외계 위성은 똑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 과학 기술이 대형 우주 구축함을 건조한다면, 우주 구축함 역시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가니메데가 똑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과 우주 구축함은 똑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주 구축함이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 구축함은 인간을 부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주 구축함이 인간을 부각한다고 해도, 이건 원초적인 부각이 아닙니다. 왜 대왕 오징어가 경이로운가요? 우주 구축함과 인간이 다른 것처럼, 대왕 오징어와 인간은 다릅니다. 하지만 인류는 대왕 오징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원초적인 자연은 대왕 오징어를 낳았습니다.
인류가 대왕 오징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보다 대왕 오징어가 원초적인 영역, 초월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대왕 오징어와 선박을 연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대왕 오징어는 경이롭습니다. 반면, 인간이 과학을 연구하고, 과학이 우주 구축함을 건조하기 때문에, 우주 구축함은 인류 문명에 속합니다. 우주 구축함이 동물이 아니고, 우주 구축함이 인류 문명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대왕 오징어보다 우주 구축함이 강력하다고 해도, 가니메데가 인간을 부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주 구축함은 인간을 부각하지 않습니다. 가니메데와 우주 구축함과 달리, 대왕 오징어는 범주(동물)를 제시합니다.
자연 정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판타지 소설이 번개 정령, 강물 정령, 바위 정령을 묘사한다면, 만약 이 정령들이 아주 웅장하다면, 이 자연 정령들은 자연 환경을 과장할 겁니다. 거대 괴수가 자연 환경을 과장하는 것처럼, 자연 정령들은 자연 환경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 괴수와 자연 정령이 비슷하다고 해도, 양쪽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과 거대 괴수와 달리, 자연 정령은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 정령은 똑같은 범주(동물)에 속하지 않습니다. 범주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인간과 정령을 대조한다고 해도, 이 대조는 희미합니다.
만약 문학 강사가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메리 앤 에번스)을 비교하고 대조한다면, 학생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반면, 만약 문학 강사가 제인 오스틴과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키리를 비교하고 대조한다면, 학생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마리 퀴리(과학자)가 범주(문학 작가)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 퀴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똑같은 범주 속에서 대조(차이)는 의미를 얻습니다. 어떤 문학 작가들은 오직 타자성, 정체성만 열심히 부르짖으나, 마리 퀴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문학 작가느님들은 한심합니다. 똑같은 범주(동물) 속에서 대왕 오징어는 인간을 부각합니다.
거대한 나무, 우주 구축함, 외계 위성, 자연 정령보다 거대 괴수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에서 거대 괴수가 장대하게 솟구치고 포효할 때, 이건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선사합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거대 괴수가 경이롭다고 똑같이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학이 주관적인 것처럼, 느낌은 주관적입니다. 느낌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압도적인 경이로움이라고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덕후는 왜 거대 괴수가 경이로운지 설명할 수 있고, 여기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없습니다.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을 과장합니다.
"우와, 거대 괴수를 봐! 거대 괴수는 압도적이야! 어떻게 진화 과정이 이 거대 괴수를 만들었지? 생물 다양성은 경이로워!" 이 감탄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없습니다. 이 감탄처럼,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을 과장합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 아주 웅장한 바이오 돔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만약 생물 다양성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만약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 아주 웅장한 바이오 돔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진화하지 않았을 테고, 우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아주 웅장한 바이오 돔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문학, 바둑, 철도, 아이돌 그룹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어머니 자연은 원초적입니다. 하지만 문학 덕질, 바둑 덕질, 철도 덕질, 아이돌 덕질은 이 원초적인 놀라움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이 덕질들은 어떻게 우리가 비롯했고 진화했고 나타났는지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이돌 덕후들은 어떻게 인간들이 나타났는지 과장하지 않습니다. 이 덕질들은 이미 인간들이 존재한다고 판단합니다.
거대 괴수가 아주 원초적인 경이로움을 과장하기 때문에, 다른 덕질들과 달리, 거대 괴수 덕질은 무엇이 우선하는지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이돌 덕질과 달리, 거대 괴수 덕질은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간이 살아간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무엇이 우선하는지 강조하기 때문에,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우선할 수 있습니다. 문학 덕질, 바둑 덕질, 철도 덕질, 아이돌 덕질보다 거대 괴수 덕질은 우선할 수 있습니다.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우선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는 이 덕질이 우월에 수렴하고 최고에 수렴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거대 괴수가 오직 생물 다양성 속의 인간만 강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 없이, 인간이 대왕 오징어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대왕 오징어가 인간을 압도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이건 과장된 폭력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우주 바이오 돔을 묘사한다면, SF 독자는 과장된 폭력을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우주 바이오 돔 속에서 호랑이가 토끼를 사냥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과장된 폭력보다 인공 생태계 순환을 기대할 겁니다. 우주 바이오 돔과 달리, 만약 SF 소설이 거대 괴수를 묘사한다면, SF 독자는 과장된 폭력을 기대할 겁니다.
SF 독자가 과장된 폭력을 기대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오직 생물 다양성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만약 거대 괴수가 오직 생물 다양성만 강조한다면, 거대 괴수는 커다란 인기를 끌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과장된 생태계 순환보다 과장된 폭력과 학살을 가리킨다고 느낍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만약 SF 소설이 거대 괴수와 과장된 폭력을 연결하지 않는다면, SF 독자는 크게 실망할지 모릅니다. "아니, 이게 뭐야? 거대 괴수는 뭔가를 신나게 때려부숴야 해! 왜 거대 괴수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지? 이건 거대 괴수 미덕이 아니야! 이 소설은 엉터리야!"
비디오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하드 SF 소설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우주 바이오 돔을 건설하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담수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이 관점에서 바이오 돔 과학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는 비슷합니다.) 이 담수 생태계 게임은 폭력을 묘사합니다. 만약 수달이 강꼬치고기를 사냥하고 잡아먹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이게 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달이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생태계 게임의 핵심 주제가 폭력보다 먹이 그물망이라고 느낄 겁니다.
심지어 게임 제작자들은 <Among Ripples>가 생태학 교육 소트프웨어라고 홍보할 수 있습니다. 담수 생태계 게임은 교육 소프트웨어가 되나, 만약 SF 소설이 거대 괴수를 묘사한다면, 거대 괴수는 폭력을 동반할 겁니다. 아니, 폭력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수달들을 풀어놓고 황어들과 퍼치(perch)들을 학살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 게임들은 폭력을 연출합니다. 동물원 게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호랑이들을 의도적으로 풀어놓고 관람객들을 학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육 소트프웨어조차 신나는 폭력을 연출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와 폭력은 훨씬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태계 게임 플레이어가 수달들을 풀어놓고 퍼치 학살을 즐기는 것처럼, SF 독자는 거대 괴수가 기갑 부대를 깔아뭉개고 도시를 파괴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비록 생태계 게임 플레이어가 학살을 즐긴다고 해도, 적어도 생태계 게임에서 핵심 주제는 폭력, 학살보다 먹이 그물망입니다. 비록 동물원 게임 플레이어가 호랑이들을 풀어놓고 학살을 즐긴다고 해도, 적어도 동물원 게임은 폭력, 학살보다 생태학을 묘사합니다. 반면, 거대 괴수와 과장된 폭력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계 시뮬레이션 예고편을 보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먹이 그물망보다 폭력,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반면, 만약 SF 소설이 거대 괴수를 홍보하고, SF 독자가 소설 홍보 문구들을 읽는다면, SF 독자는 생태계 순환보다 거창한 폭력을 떠올릴 겁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와 비디오 게임 <테라 닐>이 학살을 묘사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테라포밍 마스>와 <테라 닐>을 기대할 때, 그들은 수달이 강꼬치고기를 무참하게 죽인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생명력을 기대합니다. <테라 닐>과 달리, 거대 괴수가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오직 근원적인 범주 속의 차이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대 괴수가 자연 생태계를 강조한다고 해도, 과장된 폭력 관점에서 우주 바이오 돔과 거대 괴수는 너무 다릅니다. 하지만 대왕 오징어와 크라켄이 이어지는 것처럼, 생물 다양성에서 거대 괴수가 비롯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에게는 생물 다양성을 과장하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인 오스틴과 조지 엘리엇이 세계적인 문학 작가라고 해도, 아무리 스테이씨 멤버들이 아주 훌륭한 실력파라고 해도, 그들보다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을 과장합니다. 다른 여러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는 원초적인 자연의 여신, 생물 다양성을 과장합니다. 거대 괴수 덕질은 매력적입니다.
이건 오직 거대 괴수만 생물 다양성 속의 인간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와 거대 괴수 없이, 진화 생물학, 자연 생태학, 계통 분류학은 무엇이 우선하는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 속의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거대 괴수가 필수적인가요? 무엇이 우선하는지 표현하기 위해 사이언스 판타지가 필수적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물 다양성이 놀랍다고 과장할 때, '불가능(비현실)'은 '과장'할 수 있습니다. 그저께 7월 28일 게시글이 설명했던 것처럼, 스테이씬 팬은 스테이씨 아이사가 여신이라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여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와, 아이사 언니는 여신이야. 채영 언니, 싸랑해용~♡" 이 감탄사는 스테이씨 아이사가 여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이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신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신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불가능입니다. 어머니 자연, 자연의 여신이 원초적인 것처럼, (여)신이 가장 초월적이기 때문에, 스테이씨 팬은 가장 초월적인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건 과장입니다. 불가능은 감정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너무 격렬하게 흐르기 때문에, 현실은 이 엄청난 감정 흐름을 담지 못합니다. 격렬한 감정은 비(非)현실로 확장합니다.
감정이 흘러넘칠 때, 현실이 너무 좁기 때문에, 감정은 현실을 넘어가고 비현실로 확장합니다. 현실에서 비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불가능입니다. 거대 괴수 역시 비현실 세계에 속합니다. 스테이씨 아이사가 여신이 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놀라운 감정("생물 다양성은 아주 경이로워!")을 과장합니다. 현실에서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 괴수가 첫째 세계(현실)보다 둘째 세계(가상의 외계 행성)에 속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거대 괴수가 황당무계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판타지가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비난합니다. 이게 타당한가요?
이 비난이 타당한가요? 아니, 만약 사이언스 판타지가 황당무계한 공상이라면, 스테이씨 팬 역시 아이사가 여신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겁니다. 비단 스테이씨 팬만 아니라 문학 작가들 역시 비유들과 과장들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문학 작가들은 비유들과 과장들을 선호합니다. 심지어 독자들은 이것들이 뛰어난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칭찬합니다. 비유들과 과장들이 뛰어난 문학적인 표현인 것처럼, 스테이씨 팬이 불가능을 표현하고 감정을 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사이언스 판타지는 생물 다양성 속의 인간,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과장하고 외계 행성 생태계와 거대 괴수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문학들, 예술들, 문화들은 이것, 생물 다양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생물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만약 생물 다양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자연 속에서 문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물 다양성 속에서 문명이 존재한다고 해도, 많은 문학들, 예술들, 문화들은 오직 인간만 말합니다. 아무리 어떤 문학이 세계적인 걸작이라고 해도, 이 세계적인 걸작 문학은 오직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만 열~심히 말할지 모릅니다. 이건 너무 비좁은 시각입니다. 웅장하고 거대한 자연과 달리, 이 문학들, 예술들, 문화들은 갑갑합니다.
단편 소설 <허기>에서 반다나 싱은 다양하고 살아있는 세계가 인류 사회를 둘러쌌다고 암시합니다. 반다나 싱의 <허기>와 달리, 많은 문학들, 예술들은 이 세계를 외면하고 오직 좁은 시각에만 치우칩니다. 이것들은 오직 좁은 것,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만 주구장창 떠듭니다. 아, 네, 좋습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 사회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많은 문학들, 예술들이 오직 인간만 주구장창 떠들기 때문에, 이것들이 인류 사회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문학들, 예술들은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충성~하고 환경 오염들을 떠받들기 바쁩니다.
거대 괴수가 생물 다양성을 과장하기 때문에, 만약 SF 팬이 거대 괴수 덕후라면, SF 팬은 생물 다양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은 심각한 위기에 빠집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돈벌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돈벌이는 가장 중요합니다. 돈벌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 역시 그저 돈벌이에 불과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자연 환경보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심각한 위기에 빠집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기 때문에, 만약 SF 팬이 거대 괴수 덕후라면, SF 팬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사랑이 인생의 디딤돌인 것처럼, 덕질은 인생의 디딤돌일 수 있습니다.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최고에 수렴하고 우월에 수렴하는 것처럼, 적어도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가장 우선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 덕질은 가장 우선하는 인생의 디딤돌일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덕질이 고정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랑이 바뀌니?" 이 물음은 사랑이 고정적이라고 반박하나, 사랑은 바뀔 수 있고, 덕질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언젠가 SF 팬은 거대 괴수를 때려치우고 다른 것을 덕질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SF 팬은 SF 장르를 때려치우고 다른 것을 덕질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최고에 수렴하고 우월에 수렴하기 때문에, 적어도 다른 덕질들보다 거대 괴수 덕질이 우선하기 때문에, SF 팬이 거대 괴수를 덕질하는 동안, SF 팬은 압도적인 경이로움에 심취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 아주 거대한 생체 우주선, 아주 웅장한 바이오 돔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가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파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너무 악랄합니다. 만약 SF 팬이 압도적인 경이로움에 심취한다면, SF 팬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악랄하다고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듄 2000> 스크린샷 출처:
https://www.mobygames.com/game/windows/dune-2000/promo
※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 스크린샷 출처: Sampstra Ga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