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개조 생명체들의 사회주의 운동 본문
소설 <십브레이커>는 폐선을 해체하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입니다. 폐선 해체는 상당히 위험한 작업입니다. 낡은 배가 해안에서 좌초하면, 빈민들이 거기에서 각종 부품이나 금속을 뜯고, 그걸 시장에 내다팔죠. 당연히 별별 사고가 벌어집니다. 배 안으로 들어간 '아동' 노동자들은 유독한 가스를 들이마시거나, 좁은 틈에 끼이거나, 물에 빠지거나, 부품에 머리를 두들겨 맞는 등등 각종 사고를 당합니다.
사실 폐선 해체 작업은 정상적인 노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저 빈민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행위에 불과하죠. 그래서 대부분 폐선 해체 작업은 이른바 제3세계에서 벌어지거나 아주 가난한 이들의 작업이 되기도 합니다. <십브레이커>의 주인공 아이도 그렇게 아주 가난한 계급이죠. 그런데 이 소설은 제3세계의 비극을 고발하거나 그런 책이 아닙니다. 겉보기는 그런 것 같지만, 알맹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세상은 풍비박산이 났고, 주인공 아이는 그런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이런 불합리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연명하던 도중 어떤 계기로 탈출합니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도시로 떠납니다. 하지만 혼자 떠나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홀로 여행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테니까요. 동반자가 한 명 있는데, 이 동반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비견'입니다. 하지만 그냥 경비견이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처럼 똑똑합니다. 사람처럼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옷을 입고, 두 손으로 도구를 사용합니다.
유전자 조작 경비견은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한편으로 동물의 성향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유전 공학 기술자들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겠죠. 이 경비견은 사람에게 본능적인 충성을 바치고, 사람을 함부로 떠나지 못합니다. 덕분에 대기업 고위층이나 조직 폭력배 두목 등도 이런 경비견을 고용합니다. 인간 똘마니는 두목의 뒷통수를 칠 수 있지만, 경비견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경비견도 주인을 배신할 수 있지만, 인간 하수인보다 배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인공은 이런 경비견을 사귀고 여러 도움을 받습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런 경비견을 그냥 동물로 대하지 않습니다. 유전자 조작 경비견은 똑똑하고, 말도 하고, 옷도 입고, 도구를 사용합니다. 게다가 다양한 도움을 줍니다. 이 경비견은 주인공의 목숨을 몇 번 구해줍니다. 사실 사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득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기더군요. 과연 이 경비견은 자신을 무엇으로 인식할까? 아마 <십브레이커>의 세상 속에서도 '진짜 개'가 있을 겁니다.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은, 천연적인 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키우는 그런 개가 저 소설의 세상 속에도 존재할 겁니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 경비견은 그런 진짜 개를 보고, 무엇을 느낄까요. 설마 동족이라고 여기지 않겠죠. 경비견과 진짜 개는 전혀 다른 생명체니까요. 아마 그 경비견은 진짜 개를 생물학적 선조 정도로 여길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른 인간 종들을 생물학적 선조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그 경비견이 진짜 개를 존중한다거나 그러지 않겠죠. 인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그냥 좀 특별한 동물로 바라볼 뿐이고, 같은 영장류로 인식하지 않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십브레이커>의 경비견은 진짜 개를 하찮게 여기겠죠. 인간이 고릴라를 그냥 동물로 대하는 것처럼 경비견도 진짜 개를 동물 따위로 여기겠죠. 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보죠. 만약 소설 속의 세상에서 누군가가 동물 권리를 외친다면, 그 경비견의 권리는 어떻게 될까요. 동물 권리 운동은 현실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운동입니다. 만약 소설 속의 인물이 그런 운동을 펼친다고 가정하죠. 누군가가 개와 고양이, 돼지, 호랑이, 참다랑어의 권리를 외친다면, 유전자 조작 동물들의 권리는 어떻게 될까요. 진짜 개의 권리와 유전자 조작 경비견의 권리가 함께 신장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간과 고릴라의 권리가 인권과 동물 권리로 나뉘는 것처럼 유전자 조작 경비견과 진짜 개의 권리는 별개의 것이 되겠죠. 도대체 이런 경비견의 권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전자 조작 생명체의 권리? 개조 동물의 권리? 아마 이런 비슷한 용어가 생길 수 있겠죠. 아니면 그들은 인간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개조 경비견의 권리를 그냥 인권에 통합할 수 있겠고요. 이런 개조 생명체들이 등장한다면, 이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테고, 그것도 하나의 사상과 철학과 운동으로 발전할 겁니다.
어쩌면 이런 운동은 결국 창조주에게 반발하는 운동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로섬의 만능 로봇>처럼 말입니다. 개조 생명체들은 인간이 경비견을 '소유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신들이 자유로운 생명체라고 주장할 수 있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비견은 인간에게서 그리 쉽게 독립하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경비견은 인간에게 충성하도록 태어났거든요. 경비견은 특정한 목적 때문에 탄생한 존재입니다. 인간처럼 아무 목적 없이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게 인간과 경비견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냥 세상에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어떤 초월자나 절대자가 뚜렷한 목적 때문에 인간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그렇다고 믿는 광신도들이 너무 많죠.) 하지만 유전자 조작 경비견은 내동댕이쳐지지 않았습니다. 경비견은 기술자들이 세심하게 작업한 결과물입니다. 아니, 아예 기술자들은 개조 생명체가 권리 운운하지 못하도록 태생적인 제약을 걸어놓을 수 있겠죠.
로봇의 반란은 꽤나 유명한 설정입니다. 반면, 개조 생명체의 반란은 로봇의 반란만큼 유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리우스>나 <모로 박사의 섬>처럼 고전적인 사례가 있음에도 개조 생명체의 반란은 로봇의 반란만큼 유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인류가 개조 생명체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컴퓨터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생활 속에 자리잡았지만, 개조 생명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늘상 컴퓨터를 만지지만, 유전자 조작 생명체를 자주 만나지 못하죠. 밥상에서 유전자 조작 생명체를 먹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저런 SF 개조 동물과 다르죠.
우리는 개조 식품을 자주 먹지만, 그건 평범한 곡물이나 채소처럼 보이기 때문에 뭔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유전 공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함에도 이런 대중적 인식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때, 인간에게 충성하도록 제약을 걸 수 있습니다. 로봇 3원칙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브레이커>의 인간들도 개조 생명체에게 그런 제약을 걸 수 있겠죠. 경비견이 인간에게 독립하기 원해도 유전자 수준에서 그걸 거부할지 모릅니다.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런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십브레이커>의 경비견은 주인을 떠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이 경비견은 유전적인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개조 생명체들도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조 생명체들이 모이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죠. 사람처럼 똑똑하고 말하는 고양이나 돼지나 호랑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생명체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 하나로 뭉칠지 모르죠. 아니, 서로 파벌을 가르고 싸울 수 있겠군요. 파벌과 분열은 이런 저항 운동에서 드물지 않은 현상이니까요.
그래도 만약 이런 개조 생명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고 가정하죠. 그래서 결국 개조 생명체가 제도적으로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가정하죠. 인간은 더 이상 개조 생명체에게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제약을 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개조 경비견은 그야말로 자유인이 될 수 있겠죠. 아마 몇몇 개조 생명체들은 동물 권리 운동에 나설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들도 '종 차별'을 당한 만큼, 일반 동물이 당하는 '차별'에 동정을 느끼거나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경비견들은 제도적으로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이들이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이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까요? 이미 자본을 거머쥔 장본인은 모두 인간입니다. <십브레이커>에는 자본을 거머쥔 개조 생명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설정상 그런 생명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비견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인간에게 고용되어야 합니다. 개조 생명체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도 거대 자본의 장벽에 부딪히겠죠.
가령, 경비견이 "개조 생명체만의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고 주장해도 예산 문제에 부딪히겠죠. 이런 개조 생명체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벗어났지만, 노동 여건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유민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 자본가에게 매달려야 할 겁니다. <십브레이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대기업들이 판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그래서 주인공 아이처럼 폐선 작업으로 먹고 사는 빈민층이 있습니다.
만약 <십브레이커>의 개조 생명체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면, 그건 결국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아마 그냥 사회주의가 아닐 겁니다.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유전자 조작 사회주의? 뭐, 그런 이름이 붙을 수 있겠죠. 물론 <십브레이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설정들, 포스트 아포칼립스, 대기업의 횡포, 빈민들의 고충, 유전자 조작 동물 등을 보면, 저런 사회주의 운동도 불가능한 설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을 쓴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와인드업 걸>의 작가입니다. <와인드업 걸>은 산업 자본주의와 대기업의 자유 시장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이고요. 따라서 저런 설정도 너무 막 나가는 상상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