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감정과 문화 관계, 근본적인 철학 본문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동안, 인간은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사랑은 행복을 선사하고, 인간은 세계가 아름답게 반짝거린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반짝반짝~☆ 행복을 선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뭔가를 좋아하지 못할 때, 인간은 인생이 너무 공허하고 쓸쓸하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인간이 뭔가를 좋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사랑이 행복이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질 때, 인생 역시 사라집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사랑이 행복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행복과 사랑은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이 깊은 관계에서 문화는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가수가 멋진 무대 공연을 자랑할 때, 관객들이 감탄하고 눈물들을 글썽거리는 것처럼,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이 행복을 전달하는 것처럼, 문화는 우리 감정을 흔듭니다. 사랑과 행복, 문화와 감정은 비슷한 관계를 맺습니다. 문화가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문화를 포기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비록 문화가 근본적이지 않다고 해도, 문화가 감동적이고, 우리 인간이 감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보다 감정에 충실하고 문화를 붙들지 모릅니다. SF/판타지 덕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모험가 일행에게 여러 물약들은 필수적입니다. 모험가 일행이 위험한 던전을 탐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치거나, 중독되거나, 저주에 걸리거나, 기력을 잃을지 모릅니다. 이 위험한 상황들에서 여러 물약들은 모험가 일행을 돕습니다. 만약 전사가 다친다면, 전사는 치유 물약을 마시고 체력을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직자가 저주에 걸린다면, 성직자는 성수를 마시고 저주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나가 떨어진다면, 마법사는 마나 물약을 마시고 마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클래스들은 물약들을 직접 조제합니다. 드루이드는 치유 물약을 조제합니다.
드루이드가 울창한 삼림에 해박하기 때문에, 드루이드는 약초들을 채집합니다. 드루이드는 약초을 달이고 치유 물약을 조제합니다. 드루이드는 물약을 유리병에 담습니다. 이 그림(링크)은 드루이드 치유 물약을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녹색 나뭇잎들이 달린 나뭇가지가 유리병을 휘감기 때문에, 이건 싱그러운 자연 분위기를 풍깁니다. 드루이드가 이 물약을 조제했기 때문에, 나뭇잎들이 달린 나뭇가지는 유리병을 휘감는지 모릅니다. 드루이드가 이것을 조제했든, 아니든, 분명히 유리병은 물약을 담습니다. 비단 이 그림만 아니라 여러 던전 탐험 게임들은 유리병이 물약을 담는다고 묘사합니다.
이 그림(링크)은 많은 물약들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유리병이 물약을 담는다고 보여줍니다. 몇몇 이외에 대부분 용기들은 유리병들입니다. 비단 이 그림만 아니라 다른 던전 탐험 게임들 역시 유리병이 물약을 담는다고 묘사합니다. 왜 유리병들이 물약들을 담나요? 시각적으로 물약을 확인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던전 탐험은 위험합니다. 흉포한 괴물들은 모험가 일행을 습격하고, 전투는 너무 급박합니다. 너무 급박한 전투 속에서 전사는 치유 물약을 마십니다. 만약 용기가 유리병이 아니라면, 전사는 물약을 빨리 구분하지 못할 테고, 전사는 무엇이 치유 물약인지 헛갈릴 겁니다.
전사가 무엇이 치유 물약인지 헛갈리기 때문에, 전사는 체력을 빨리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전사는 쓰러질지 모르고, 이른바 '몸빵'이 쓰러지기 때문에, 다른 모험가들 역시 위험에 빠질 겁니다. 만약 용기가 유리병이라면, 유리가 투명하기 때문에, 전사는 무엇이 치유 물약인지 빨리 구분할 겁니다. 전사가 치유 물약을 빨리 구분하기 때문에, 전사는 치유 물약을 빨리 마십니다. 전사는 체력을 회복하고, 든든한 방패를 들고, 괴물들을 계속 막습니다. 전사가 괴물들을 막는 동안, 마법사는 비전 화살들과 불덩어리를 퍼붓고 괴물들을 처치합니다. 전투는 끝나고, 모험가 일행은 살아남습니다.
용기가 투명한 유리병이기 때문에, 전사가 치유 물약을 쉽게 구분하고, 모험가 일행이 살아남는 것처럼, 육안으로 물약을 확인하기가 쉽기 때문에, 던전 탐험 게임들은 유리병이 물약을 담는다고 묘사합니다. 특히, 피가 빨간색이기 때문에, 치유 물약은 빨간색입니다. 치유 물약과 달리, 마나 물약은 파란색입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어떤 던전 탐험을 플레이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유리병이 물약을 담고, 치유 물약이 빨간색이고, 마나 물약이 파란색이라고 기대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이건 장르 전형입니다. 빨간 치유 물약은 중세 판타지, 던전 탐험 전형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유리병이 이상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던전 탐험이 위험하기 때문에, 모험가 일행은 급박한 상황에 빠집니다. 모험가 일행이 급박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그들은 넘어지거나, 쓰러지거나, 떨어지거나, 구르거나, 부딪힙니다. 만약 모험가가 심하게 부딪힌다면, 배낭 역시 심하게 부딪힐 테고, 이 충격은 유리병을 깨뜨릴지 모릅니다. 유리병이 깨지기 때문에, 모험가는 귀중한 물약을 낭비할 겁니다. 유명한 투리 구슬…, 아니, 투명한 유리 구슬은 그렇게 쉽게 깨지지 않는지 모르나, 어떤 노래 가사와 달리, 모험가 배낭 속의 유리병은 쉽게 깨질지 모릅니다. 이건 절대 좋지 않습니다.
던전 탐험이 위험하고, 모험가 일행이 급박한 상황에 빠지고, 유리병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던전 탐험 모험가와 유리병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유리병보다 가죽 주머니는 훨씬 나을 겁니다. 가죽 주머니 역시 쉽게 찢어질지 모르나, 적어도 가죽 주머니는 깨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장거리 행군 보병이 금속 수통을 챙기는 것처럼, 던전 탐험 모험가는 금속 수통에 물약을 담을 수 있습니다. 금속 수통은 투명하지 않으나, 만약 모험가가 수통 표면에 글씨를 쓰거나 기호를 그린다면, 모험가는 물약을 빨리 구분할 겁니다. 유리병보다 금속 수통은 훨씬 낫습니다.
여러 던전 탐험 게임들에서 유리병이 물약을 담기 때문에, 이건 던전 탐험 전형, 장르 전형입니다. 만약 어떤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유리병보다 금속 수통이 치유 물약을 담는다면, 이건 장르 전형이 아닐 겁니다. 이 소설이 장르 전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나쁜가요? 독자들이 이 소설이 장르 전형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나요? 만약 이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치유 물약이 빨간색이 아니고 마나 물약이 파란색이 아니라면, 이것 역시 장르 전형이 아닐 겁니다. 이 소설이 장르 전형을 따르기 않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소설을 비판해야 하나요? "맙소사! 왜 마나 물약이 파란색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비록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금속 수통이 치유 물약, 마나 물약을 담는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비록 치유 물약이 빨간색이 아니고 마나 물약이 파란색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나쁘지 않습니다. 장르 전형과 장르 법칙은 다릅니다. 만약 장르에서 어떤 특정한 설정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면, 이건 장르 전형일 겁니다. 하지만 전형은 장르 그 자체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비록 마나 물약이 파란색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중세 판타지(라는) 장르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전형과 달리, 법칙은 장르 그 자체를 분류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중세 (유럽) 사회를 모방합니다.
이건 장르 법칙입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2624년 우주 항해를 묘사한다면, 이 소설은 중세 판타지가 아닐 겁니다. 만약 장거리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한다면, 독자들은 이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분류할 겁니다. 2624년 우주 항해가 중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중세 판타지(라는) 장르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반면, 비록 전사가 금속 수통을 꺼내고 파란 치유 물약을 마신다고 해도, 만약 전사가 가상의 중세 세계에 속하고, 이 중세 세계가 마법 주문과 그리폰 같은 여러 (서구) 비(非)현실 설정들을 허용한다면, 이건 중세 판타지 장르에 속할 겁니다. 이렇게 전형과 법칙은 다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형과 법칙이 다르다고 해도, 만약 장르에서 어떤 특정한 설정이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면, 장르 팬들은 이게 지배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장르 팬들이 이게 지배적이라고 느낀다면, 장르 팬들은 이것을 법칙이라고 헛갈릴지 모릅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투명한 유리병이 빨간 치유 물약을 담지 않는다면, 중세 판타지에서 유리병과 빨간 치유 물약이 지배적인 설정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이것을 지적할지 모릅니다. "왜 유리병이 빨간 치유 물약을 담지 않지? 이건 오류야! 이 소설은 틀렸어! 중세 판타지는 유리병이 물약을 담는다고 묘사해야 해!"
독자들이 이 소설을 지적하는 것처럼, 장르 전형은 논쟁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어떤 장르 팬들은 장르가 전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장르 팬들은 전형이 그저 선택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두 주장은 부딪히고 갈등합니다. 아무리 장르 팬들이 장르 법칙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들은 특정한 전형이 우세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비단 (유리병 물약 같은) 중세 판타지 전형만 아니라 다른 장르 전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가 신나는 모험, 화끈한 전투, 기이한 초능력, 무서운 괴물을 열심히 묘사한다면, 어떤 SF 팬들은 이게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세상에, 왜 사이언스 픽션이 고작 기이한 초능력과 무서운 우주 괴물 따위를 묘사하지? 문자 그대로 사이언스 픽션은 사이언스(과학)에게 기반해. 사이언스 픽션에게 사이언스(과학)는 기본적인 생산 조건이야. 이 장르는 진지한 과학 논의를 뒷받침해야 해!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고작 우주 괴물 따위를 묘사한다면, 이건 판타지와 다르지 않을 거야!" 이렇게 어떤 SF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난할지 모릅니다. 많은 SF 팬들은 이 장르가 과학에게 기반하고 과학이 생산 조건이라고 동의하나, 아무리 그들이 장르 법칙에 동의한다고 해도, 어떤 팬들은 진지한 과학 논의를 주장할지 모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비디오 게임 <AGOS - A Game Of Space>는 장대한 우주 항해를 묘사합니다. 이 게임이 장대한 우주 항해를 묘사하기 때문에, 많은 SF 팬들은 이 게임 설정이 미래 과학에게 기반한다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세계 설정이 미래 과학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건 중세 판타지가 아닙니다. 많은 SF 팬들은 이게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많은 SF 팬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이 상황에서 장르 법칙을 인정하는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장르 법칙은 논쟁으로 이어지나, 적어도 이 상황에서 법칙을 인정하기는 쉽습니다.
법칙과 달리, 전형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게임이 장대한 우주 항해를 묘사하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이 게임이 '올바른' 장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장대한 우주 항해가 '올바른' 장르이기 때문에, 이 게임과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진지한 과학 논의를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에, 이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중세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이 비난을 듣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 비난을 듣기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아무리 장르 팬들이 법칙에 동의할 수 있다고 해도, 장르 전형은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올바른' 장르인가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올바른 장르이고,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쁜' 장르인가요? 스페이스 오페라가 신나는 모험과 기이한 초능력과 무서운 괴물에게 치중하기 때문에, 이게 '나쁜' 장르인가요? 아니, 신나는 모험과 기이한 초능력은 장르(SF) 그 자체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 설정이 장르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설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장르는 문화,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 논문이라고 헛갈리나,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장르들)은 문화와 예술입니다. 문화, 예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나요? 만약 우리가 이것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문화 독재에 빠질 겁니다.
김치는 음식 문화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김치는 전형적인 음식 문화입니다. 김치라는 음식 문화는 남한 사회 전형입니다. 김치가 전형이기 때문에, 어떤 남한 사람들은 김치가 지배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들이 김치가 지배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김치를 강요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람들은 김치를 필연적으로 먹어야 해! 김치는 우월해! 두 유 노우 킴취~?" 김치가 우월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남한 사람들이 김치를 먹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이 '나쁜 매국노'가 되나요? 남한 사람들이 우월한 김치를 먹고 이른바 '국뽕'에 빠져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좋은 문화, 올바른 문화, 우월한 문화는 독재에 빠질지 모릅니다.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남한 사람들이 김치를 먹을 때, 남한 사람들이 김치를 맛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맛있는 음식이 행복을 주는 것처럼,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감미로운 노래를 듣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서정적인 시를 읽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문화 덕분에,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문화 덕분에,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문화가 우리 감정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문화가 옳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치가 보편적인 법칙이 아닌 것처럼, 좋은 문화, 올바른 문화, 우월한 문화는 독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장르 전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장르, 올바른 장르, 우월한 장르는 독재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진지한 과학 논의를 뒷받침해. 이건 진짜 사이언스 픽션이야. 스페이스 오페라는 그저 신나는 모험에 치중할 뿐이야. 이건 가짜 사이언스 픽션이야.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우월해. 내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고 하드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우월해! 나는 우월한 인간이야! 우하하하!" 심지어 이렇게 장르 팬은 인간과 문화가 동일하다고 간주하고 자아도취에 빠질지 모릅니다. 심지어 이건 억압적인 차별을 유발할지 모릅니다.
여러 음식 문화들에게 다양한 가치들이 있는 것처럼, 문화는 주관적이나, 문화가 행복을 주기 때문에, 문화를 거부하기는 절대 쉽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문화 우월론에 빠질지 모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특히,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어려운 과학 이론들을 탐구하기 때문에, 제가 사이언스 픽션을 볼 때마다, 저는 정신이 짜릿하고 아득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저는 다른 문화들, 다른 예술들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우월하다고 느낍니다. 국뽕처럼, 인간이 뭔가에 도취할 때, 사람들은 이것을 '뽕에 취한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진보뽕'에 취합니다.
심지어 저는 이게 서글프다고 느낍니다. 저는 비단 진보뽕에 취할 뿐만 아니라 진보뽕이 너무 서글프다고 느낍니다. <판단력 비판>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취향을 확장하기 원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취향이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합니다. 제가 진보뽕에 취하기 때문에, 저는 사이언스 픽션이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합니다. 저는 SF 덕질이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SF 역사는 그저 200년을 넘어갈 뿐입니다. 아무리 제가 17세기 계몽주의 문학을 고려한다고 해도, SF 역사는 그저 400년에 달할 뿐입니다. 게다가 17세기 계몽주의 문학은 판타지 문학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이오펑크 생체 비행선이 로망이라고 느끼나, 17세기 사람들은 바이오펑크 생체 비행선을 덕질하지 못했습니다. SF 덕질은 보편적이기보다 제한적입니다. 인간은 취향을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하나, 바이오펑크 생체 비행선, SF 덕질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저는 SF 덕질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제가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이게 너무 서글프다고 느낍니다. 몇 천 년 이후, 만약 여전히 인류 문명이 번영하고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면, 미래 장르 덕후들은 SF 덕질이 유구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비록 SF 덕질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이건 유구합니다.
미래 SF 덕후들과 달리, 저는 SF 덕질이 유구하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저는 여러 로망스러운 SF 설정들을 덕질할 수 있으나, 이건 너무 제한적입니다. 지구 생태계 균형을 보호하기 위해 가이아 이론이 거대 괴수를 키우는 것처럼, 21세기 초반 SF 덕후는 가상의 생태학을 덕질할 수 있으나, 17세기 사람들은 가이아 이론과 거대 괴수를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가상의 생태학이 제한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7세기 사람들 역시 가상의 생태학, 대지 모신, 유기체로서 행성 생물권, 거대 괴수를 인식했습니다. 대지 모신 신화가 아주 유구하기 때문에, 이 사고 방식은 보편적입니다.
대지 모신 신화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저는 가상의 생태학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가이아 이론은 정교하지 않았습니다. 17세기 가이아 이론이 어설프기 때문에, SF 생태학 덕질은 제한적이고, 저는 이게 서글프다고 느낍니다. 제가 이것을 서글프다고 느끼는 것처럼, 문화는 우리 감정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비단 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문화가 행복을 선사한다고 느낄 겁니다. 문화가 행복을 선사하기 때문에, 충만한 행복 속에서 사람들은 문화를 찬양합니다. 사람들이 문화를 찬양하기 때문에, 그들은 문화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문화는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이성적으로 저는 (하드) SF 우월론을 비판하나, 종종 감정적으로 저는 이 우월론에 동의합니다. 제가 (하드) SF 우월론에 동의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우월론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문화가 행복을 주기 때문에, 문화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문화와 달리, 과학은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장수 거북은 너무 못생겼어! 장수 거북이 불어터진 솥뚜껑 같기 때문에, 내가 장수 거북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장수 거북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이건 오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수 거북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사람은 장수 거북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한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감정에 상관없이, 이 사람이 장수 거북 체온을 인정하는 것처럼, 과학은 객관적입니다. 과학이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과학이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과학보다 문화를 따를지 모릅니다. 문화 속에서 우리가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행복을 찾기 위해 그들은 과학보다 문화에 집착합니다. 일상적인 말투와 옷차림부터 세계 고전 예술까지, 많은 사람들은 과학 연구보다 문화 연구를 선호합니다. 문화가 행복을 주기 때문에, 심지어 그들은 부정적인 현상에서 문화를 구원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문화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문화는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음, 이건 다소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나…, 저는 '문화가 갖다붙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문화)보다 주체(해석)가 중요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것은 갖다붙이기 나름입니다. 아주 거대한 궤도 정거장에서 미래 사람들이 인공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처럼, SF 소설이 가상의 세계,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SF 독자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SF 독자는 벗어나고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SF 소설과 유토피아 사상은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원형적인 SF 소설은 유토피아 문학과 비슷합니다. SF 독자는 유토피아 사상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SF 소설이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한다고 해도, SF 그 자체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작가는 SF 소설을 쓰고, 독자는 SF 소설을 읽습니다. 현실 속에서 SF 소설이 나타나기 때문에, 현실은 SF 소설을 장악하고, 또 다른 세계는 현실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건 제한적인 세계입니다. SF 소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SF 독자는 유토피아 사상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은 혁명이 아닙니다. 아니면 SF 소설은 혁명의 씨앗입니다. 이 사례처럼, SF 평론(문화 연구)은 '갖다붙이기 나름'인지 모릅니다.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인류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이 사라진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서구 제국주의 편견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심각한 빈부 격차를 유발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대규모 산업 단지를 건설하고 온실 가스를 팍팍 뿜을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부유한 소수 자본가 계급이 대규모 산업 단지를 건설하고 온실 가스를 팍팍 뿜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사라집니다. 환경 오염 원인은 자본가 계급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자본가 계급이 부유해졌나요?
17~18세기 동안,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서구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19세기 서구는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가지는 복잡하게 얽혔고, 이건 제국주의 전쟁으로 확장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와 서구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세 가지들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다르지 않고, 제국주의 편견은 자본가 계급을 정당화합니다.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국주의 편견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환경 오염 원인이라고 함부로 비난합니다.
제국주의 편견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난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편견에 빠지고 인류가 탐욕스럽다고 묘사합니다. 제국주의가 사이언스 픽션을 지배하고, 제가 SF 생태학을 덕질하기 때문에, 제가 '진보뽕'에 취하기 때문에, 종종 저는 제국주의 편견에서 사이언스 픽션을 구원하기 원합니다. (테리 이글턴은 피에르 마슈레가 문학을 구원하기 원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르 명칭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사이언스)보다 문화입니다. 이 장르가 과학(사이언스)보다 문화이기 때문에, 이 장르는 근본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근본적이기보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평론가가 사이언스 픽션을 열심히 분류한다고 해도, 장르 평론은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장르 평론은 통찰을 제시할 수 있으나, 이 통찰은 근본적인 필연성보다 가능성과 개연성에 훨씬 가깝습니다. 장르 평론에게 가능성과 개연성은 최선입니다. 비단 장르 평론만 아니라 다른 문화 연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제가 제국주의 편견에서 사이언스 픽션을 '구원'한다고 해도, 최선은 그저 가능성과 개연성에 불과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평론(문화 연구)보다 진짜 사이언스(과학), 객관성은 중요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너무 애석한 결론입니다. 덕후가 덕질하는 동안, 덕후가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문화는 행복을 선사하나, 이건 표면적입니다. 적어도 이건 가장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덕후가 덕질이 근본적이지 않다고 부정한다면, 이건 너무 애석한 상황일 겁니다. 아무리 제가 SF 생태학을 덕질한다고 해도, 아무리 제가 이것에게 인생을 몰빵한다고 해도, 저는 'SF 생태학이 표면적'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행성 지성, 거대 괴수, 생체 비행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것들은 근본에 닿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과학보다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과학이 전부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화보다 과학은 중요하나, 과학이 객관성을 100% 보장하나요? 모든 사람이 과학에 동의할 수 있나요? 무엇이 '과학'인가요? 장수 거북은 일정한 체온을 유지합니다. 노예 주인과 노예 해방론자는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총독과 식민지 독립 운동가는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노예 주인부터 식민지 독립 운동가까지, 다들 장수 거북이 체온을 유지한다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 주인과 노예 해방론자는 흑인 착취 문제를 똑같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경제 공황을 똑같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 총독과 식민지 독립 운동가는 환금 작물 문제를 똑같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흑인 착취와 경제 공황과 환금 작물이 문제가 될 때, 노예 주인부터 식민지 독립 운동가까지, 다들 대립하는 관점들을 제시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파성이 과학에게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장수 거북 체온이 당파성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당파성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장수 거북 체온에 동의합니다. 장수 거북 체온과 달리, 흑인 착취가 당파성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예 주인과 노예 해방론자는 대립합니다.
장수 거북 체온과 달리, 경제 공황과 환금 작물이 당파성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대립하고, 제국주의 총독과 식민지 독립 운동가는 대립합니다. 비록 흑인 착취가 객관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도, 당파성은 과학에게 개입합니다. "북반구 백인들은 부유해! 남반구 흑인들은 가난해! 아무도 이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해! 흑인들보다 백인들은 우월해!" 이렇게 당파성이 객관성을 왜곡하기 때문에, 객관성은 당파성에게 저항해야 합니다. 철학(사상)이 당파성을 연구하기 때문에, 철학은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보다 철학은 근본적입니다.
※ 게임 <AGOS - A Game Of Space>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392700/AGOS__A_Game_Of_Sp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