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hallow Waters>와 생물 군계 우주선, 상호 텍스트성 본문
[평론가는 소설이 무인도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우주 개척 게임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물고기>를 썼어. 이건 아주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문학이야." 만약 엘리자베스 비숍이 이 호평을 듣는다면, 엘리자베스 비숍은 기분이 좋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문학 작가들은 독자들이 문학을 감동적으로 읽기 원합니다. 만약 독자들이 문학을 읽고,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한다면, 문학 작가들은 문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독자들이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문학 평론가는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평론가에게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평론가는 문학을 읽고, 희노애락을 넘어서고, 근본적인 뭔가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연관성'은 근본적인 뭔가가 될 수 있습니다. 평론가는 문학을 읽고, 희노애락을 넘어서고, '연관성'을 찾습니다. "어머, 이건 다른 뭔가와 비슷해. 양쪽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어." 이렇게 평론가는 두 문학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간주하고 양쪽을 비교하거나 대조합니다. 문학 평론가에게 이 작업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평론가는 문학이 독립적이지 않고 개별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것처럼, 문학은 무인도가 아닙니다. 복잡한 사회 관계들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것처럼, 상호 연관성 속에서 문학은 나타납니다. 문학들은 상호 작용합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썼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레오폴드 블룸이 그저 지겹고 알쏭달쏭한 등장인물이라고 느낄 겁니다. 반면, 문학 평론가는 <율리시스>가 <오디세이아>와 비슷하다고 해석합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제목 율리시스를 땄을 겁니다. <율리시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사건 구조는 유사합니다. <율리시스>에서 소설책의 편제는 <오디세이아>와 비슷합니다. 비록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괴물들과 싸우기보다 그저 이리저리 방황할 뿐이나, 사건 구조와 편제가 유사하기 때문에, 평론가는 <율리시스>와 <오디세이아>를 비교하고 대조합니다.
<율리시스>와 <오디세이아>가 비슷하고, <율리시스>가 아주 유명한 소설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독자들은 <율리시스>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오디세이아>는 <율리시스>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율리시스>는 <오디세이아>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스>에는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는 상호 연관성을 파악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게 과잉 해석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문학입니다. <율리시스>는 20세기 초반 소설입니다. 어떻게 고대 그리스 문학과 20세기 초반 소설이 비슷할 수 있나요?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쓰는 동안, 호메로스는 머나먼 미래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쓸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문학에서 작가 의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호메로스가 제임스 조이스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평론가는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스>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평론가는 호메로스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스> 사이에는 상호 연관성이 있고, 그래서 평론가는 이것을 주장합니다. 다행히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스> 관계는 아주 뚜렷하고, 많은 평론가들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오디세이아>와 <율리시스>에게 뚜렷한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피로 물든 방>과 <빨간 두건> 사이에도 뚜렷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단편 소설 <피로 물든 방>에서 안젤라 카터는 <푸른 수염>, <미녀와 야수>, <백설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빨간 두건>에 페미니즘 시각을 대입하고 고전 동화들을 전복합니다. 인류 문명은 가부장 제도이고, 가부장 문화는 동화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 구조는 문학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피로 물든 방>은 가부장 문화에 저항하고 고전 동화들을 전복합니다. 고전 동화들은 <피로 물든 방>에 영향을 미치고, <피로 물든 방>은 동화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안젤라 카터가 고전 동화들을 전복하기 때문에, 이게 파격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빨간 두건>을 읽을 때, 독자들은 <피로 물든 방>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관객들이 영화 <레드 라이딩 후드>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피로 물든 방>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심지어 시청자들이 애니메이션 <빨간 망토 차차>를 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피로 물든 방>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만약 평론가가 이 장면을 본다면, 평론가는 상호 연관성이 작동한다고 평가할 겁니다. 사실 평론가들은 이런 연관성을 아주 좋아합니다. 두 가지를 연결하고 이것저것 갖다붙이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피로 물든 방>과 <빨간 두건> 사이에서 연관성은 아주 뚜렷하고, 다행히 두 가지를 연결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율리시스>와 <오디세이아>, <피로 물든 방>과 <빨간 두건>은 쉬운 사례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례들에서 연관성을 파악하기는 어렵거나, 연관성은 엉뚱한 해석이 될지 모릅니다.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를 썼습니다. <빌러비드>는 노예와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하고, 이건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을 썼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노예와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하고, 이건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두 소설에서 핵심적이고 비극적인 장면은 아주 비슷합니다.
토니 모리슨은 영어 문화 흑인 여자 작가이고, 노라 제미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빌러비드>에 친숙하다면, 독자가 <다섯 번째 계절>을 읽을 때, 독자는 <빌러비드>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독자가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이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독자가 <빌러비드>를 읽을 때, 독자는 <다섯 번째 계절>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SF 소설입니다. 동시에 이건 초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대지 초능력자 오로진들을 이야기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빌러비드>와 비슷하기보다 영화 <스타 워즈 에피소드 2: 클론의 습격>과 비슷합니다. <클론의 습격>은 SF 영화입니다. 동시에 이 영화에서 초능력자 제다이들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두 주연 등장인물 오비완 케노비와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제다이입니다. 알라배스터와 시에나이트가 노련한 열 반지와 열혈 네 반지인 것처럼, 오비완 케노비와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노련한 스승과 열혈 제자입니다. SF 팬들은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을 비교하기보다 <클론의 습격>과 <다섯 번째 계절>을 비교할 겁니다. 아니면 SF 팬들은 만화/영화 <엑스맨>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엑스맨>보다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을 연결한다면, 이게 작가 의도에 부합하나요? 노라 제미신이 토니 모리슨을 참고했나요? 노라 제미신이 핵심적이고 비극적인 장면을 구상하는 동안, 노라 제미신이 <빌러비드>를 머릿속에 떠올렸나요? "만약 내가 이 장면을 쓴다면, 많은 독자들은 <빌러비드>를 머릿속에 떠올릴 거야." 이렇게 노라 제미신이 독자 반응을 예상했나요? 만약 독자가 노라 제미신에게 묻는다면, 독자는 정답을 얻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묻지 못한다면? 독자가 스스로 해석해야 한다면? 사실 이런 상황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독자들은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피로 물든 방>과 <빨간 두건> 관계와 달리,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은 논란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만약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이 비슷하다면, <빌러비드>와 <엑스맨>은 어떤가요? <빌러비드>와 <엑스맨>이 비슷할 수 있나요? 흑인 노예 소설과 초인 영웅 만화가 비슷한가요? 다른 사례는 어떤가요? 데렉 월콧은 <오메로스>를 썼습니다. <오메로스>는 카리브 해안 사람들을 이야기하나, 문학 평론가들은 <오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문학이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메로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을 노골적으로 참고합니다. <오메로스>는 근대 사회에 위대하고 웅장한 신화를 적용합니다. 이런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러비드>와 <엑스맨>을 연결하기는 훨씬 어려울 겁니다. 아무리 오로로 먼로(스톰)가 차별과 편견을 지적한다고 해도, 오로로 먼로와 세서는 다릅니다. 만화 평론가들은 미국 초인 영웅 만화에서 오로로 먼로가 최초의 흑인 여자 초인이라고 호평하나, 그렇다고 해도 <빌러비드>와 <엑스맨>이 이어질 수 있나요? 여기에서 문제는 토니 모리슨과 호메로스의 위상입니다. 토니 모리슨과 호메로스는 다릅니다. 호메로스는 고대 서사시인이고, 토니 모리슨은 20세기 후반 소설 작가입니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 문명 사건이나, 흑인 노예 착취라는 비극은 근대 문명,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빌러비드>는 6천만을 넘어서는 흑인 노예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6천만은 아이들 소꿉 장난이 아닙니다. 도나 해러웨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끔찍한 비극은 서구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습니다. 만약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죽어나가지 않았다면, 서구 자본주의는 막대한 부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플랜테이션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끔찍한 인종 차별, 착취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비단 인종 차별과 착취 경제일 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입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열대 밀림을 파괴했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환금 작물들을 중시하고 생물 다양성을 무시합니다.
사실 비단 플랜테이션 농업만 아니라 자본주의 농업은 생물 다양성을 무시하고 토양을 학대합니다. 대표적인 19세기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자본주의 농업이 토양을 고갈시킨다고 우려했습니다. 자본주의는 농촌과 도시를 분리하고, 에너지 순환을 끊고, 토양을 고갈시키고, 도시를 더럽힙니다. 비단 유스투스 폰 리비히만 아니라 여러 19세기 과학자들, 환경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농업이 심각한 토양 고갈, 환경 오염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자본론>은 이것을 반영하지 않으나,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경고들에 관심을 기울였고 생태학과 공산주의를 접목시켰습니다.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구아노를 차지하기 원했고, 이건 구아노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무분별한 구아노 채취는 자연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구아노 덕분에, 페루 정부는 돈방석에 앉았으나, 구아노가 고갈된 이후, 페루 정부는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되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환경 오염, 생태계 파괴, 식민지 수탈, 인종 차별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나타났을 때부터, 자본주의는 인종 차별, 착취 경제, 환경 오염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것들을 강화하기 원했고,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는 1차 세계 대전을 저지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억압이라고 주장하나, 서구 자본주의는 '앞'이고, 소비에트 연방은 '뒤'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자본주의가 온갖 개망나니 짓거리들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개망나니 서구 자본주의는 근대 문명에 속합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근대화에 속하고, 플랜테이션 농업들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했고, <빌러비드>가 플랜테이션 흑인 노예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빌러비드>는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평론가들이 연관성을 파악할 때, 평론가들은 오래된 문학(신화, 전설, 민담)이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오래된 문학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필수적인 교양입니다. 적어도 영어 문화에서 이건 필수적인 교양입니다. 영어 문화가 화성을 Mars라고 부르는 것처럼, 고대 유럽 신화는 영어 문화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영어 문화에서 고대 유럽 신화는 필수적인 교양입니다. 고전 동화들은 필수적인 교양이 아니나, 영어 문화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고전 동화들을 압니다. 어린 시절 동안, 다들 고전 동화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빨간 망토 차차>와 <레드 라이딩 후드>처럼, 수많은 각색들은 고전 동화들에 기반합니다. 호메로스와 그림 형제는 비슷한 위상이고, <오디세이아>와 <빨간 두건>은 비슷한 위상입니다.
반면, 토니 모리슨과 <빌러비드>는 '오래된 문학'이 아닙니다. <오디세이아>는 신화에 기반하고, <빨간 두건>은 민담에 기반하나, <빌러비드>는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을 연결한다고 해도, 이 관계는 <피로 물든 방>과 <빨간 두건>과 다릅니다.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 관계는 <오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 관계와 다릅니다. 만약 문학 강의에서 학생이 두 가지를 비슷하게 평가한다면, 문학 강사는 이게 오류라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범주에서 <빌러비드>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학생은 완전히 틀리지 않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호메로스가 위대한 고전 문학 작가라고 해도, 호메로스는 플랜테이션 농장과 흑인 여자 노예와 자본주의를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아니었습니다. 사회 구조가 문학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디세이아>는 제국주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언급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오디세우스가 똑똑하다고 해도, 오디세우스는 제국주의 구아노 채취를 비판하지 못합니다. 이 범주에서 <오디세이아>보다 <빌러비드>는 훨씬 낫습니다. 이 범주에서 <빌러비드>는 원형이 될 수 있고, 적어도 문학 강의에서 학생은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에게 비슷한 생산 조건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 강사는 <빌러비드>가 오류라고 지적할지 모르고, 그래서 연관성을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문학이 원형이 된다고 해도, 이건 헛갈릴지 모릅니다.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은 엘리자베스 비숍과 <물고기>를 언급합니다. <물고기>에서 시(詩) 화자는 물고기를 낚습니다. 화자는 물고기를 아주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을 연상할 겁니다. <빌러비드>가 서구 근대화에 속하는 것처럼, <백경>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만약 상호 연관성으로서 <백경>과 <물고기>가 이어진다면, <빌러비드>와 <다섯 번째 계절> 역시 이어질 겁니다.
소설 <백경>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해양 동물을 죽이기 원합니다. 허먼 멜빌은 남자이고, 그래서 허먼 멜빌은 사냥꾼 감성을 집어넣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문학 강사는 <노인과 바다>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남자=사냥꾼'은 유명한 공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자가 공동체를 먹여살린다고 심각하게 착각합니다. 반면, 엘리자베스 비숍은 여자이고, 여자로서 엘리자베스 비숍은 사냥보다 '자연과의 교감'을 집어넣었는지 모릅니다. <물고기>에서 화자는 물고기를 낚고 세심하게 관찰하나, 결말에서 화자는 무지개를 외치고 물고기를 놔줍니다. <물고기> 결말은 <백경> 결말과 대조적입니다.
왜 화자가 무지개를 보고 물고기를 놔주나요? 여기에서 무지개가 무엇인가요? 무지개는 찬란하고 아름답습니다. 무지개가 화려하기 때문에, 화자는 죽음, 정복, 폭력보다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물고기를 놔주는지 모릅니다. 만화 <괴도 세인트 테일>에서 무지개🌈가 아름다운 사랑❤️을 전달하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들에서 무지개는 살아있는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그래서 <물고기> 화자 역시 물고기를 놔주는지 모릅니다.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는 것처럼, 무지개가 화려하기 때문에, 화자와 물고기는 교감할 겁니다. 이건 쉬운 해석입니다. 무지개는 상당히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홍수 설화, 방주 설화는 어떤가요? 홍수 설화, 방주 설화(특히, 많은 야생 동물들이 나타나는 고대 홍수 설화)는 원형이 될 수 있습니다. <오디세이아>와 <빨간 두건>처럼, 홍수 설화는 '오래된 문학'입니다. 홍수 설화에서 세계를 쓸어버리기 위해 창조신은 홍수를 이용합니다. 홍수에서 방주가 살아남은 이후, 창조신은 약속합니다. "앞으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해 나는 홍수를 이용하지 않겠다." 창조신은 약속의 증표로서 무지개를 선사합니다. 약속의 증표로서 무지개는 물이 땅을 덮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은 땅을 덮치지 않으나, 육상 인간 화자는 수중 동물 물고기를 낚습니다. 양쪽은 대립합니다. 땅은 물을 낚습니다.
그때 화자는 무지개를 봅니다. "무지개! 무지개! 무지개!" 이건 약속의 증표입니다. 물이 땅을 덮치지 않기 때문에, 땅 역시 물을 낚아서는 안 됩니다. 화자는 약속의 증표를 상기하고 물고기를 놔줍니다. 홍수 설화가 '오래된 문학'이고, 홍수 설화에서 무지개가 약속의 증표이고, <물고기>에서 화자가 무지개를 보기 때문에, 화자는 물고기를 놔줍니다. 홍수 설화에서 방주는 수많은 동물들을 태웁니다. 홍수 설화와 동물 도살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홍수 설화는 동물들을 풀어주고, 그래서 <물고기>에서도 화자는 무지개를 보고 물고기를 풀어줍니다. 이 해석이 타당한가요? 이게 타당한 연관성인가요?
만약 이렇게 학생이 해석하고 연결한다면, 문학 강사가 이것을 호평하나요, 아니면 비판하나요? 홍수 설화, 방주 설화가 <물고기>에게 영향을 미쳤나요? 나중에 독자가 홍수 설화를 읽을 때, 독자가 <물고기>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나요? 이게 타당한 연관성인가요? 여기에서 정답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문학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고,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들보다 연관성입니다. 일반적인 독자는 엘리자베스 비숍이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시를 썼다고 호평하나, 문학 평론가는 호평을 넘고, 홍수 설화를 대입하고, 유사성, 교집합을 찾습니다. 흔히 평론가들은 이것을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부릅니다.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은 표면적이거나 심층적입니다. 표면적인 상호 텍스트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메로스>는 고대 서사시인 호메로스로 쉽게 이어집니다. 어떤 독자는 <오메로스>가 <심슨 가족>과 호머 심슨과 "D'oh!"라고 오해할지 모르나, <오메로스>와 고대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표면적인 연관성입니다. 반면, 심층적인 연관성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물고기>와 홍수 설화처럼, 심층적인 연관성은 많은 논란들을 부를지 모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에 집착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심층적인 연관성은 해석보다 집착인지 모릅니다.
홍수 설화에서 거대 방주는 수많은 동물들을 태우고, 풀어주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물고기>에서 화자는 물고기를 놔주고, 이것은 '자연과의 교감'이 됩니다. 수많은 동물들, 새로운 자연, 자연과의 교감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가 먹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고 원초적인 감성을 느낍니다. 그래서 홍수 설화는 유명할 테고, <물고기>는 홍수 설화를 참고했는지 모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상호 연관성을 제시하고 모든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바꾼다고 주장합니다. <물고기>는 홍수 설화, 방주 설화를 받아들이고 바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커다란 착각인지 모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를 지적한 것처럼, 평론가가 상호 텍스트를 파악할 때, 평론가는 착각에 빠질지 모릅니다. 토니 모리슨은 <솔로몬의 노래>를 썼습니다. <빌러비드>와 달리, <솔로몬의 노래>에서 소설 주인공은 흑인 남자입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소설 주인공은 비행(flight)을 꿈꿉니다. 소설 주인공은 비행을 계속 꿈꿉니다. 소설 주인공은 비행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영어 문화 독자는 상호 텍스트성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래된 문학' 중에서 이카루스는 가장 유명한 비행 인간일 겁니다. 독자는 이것을 적용합니다.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이카루스를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설화에는 비행 인간이 있고, 토니 모리슨은 이것을 의도했습니다. 독자들이 이카루스를 적용했을 때, 토니 모리슨은 이게 어리둥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평론가가 상호 텍스트 원형으로서 '오래된 문학'을 적용할 때, 평론가는 착각에 빠질지 모릅니다. 영어 문화 독자에게 아프리카 설화보다 유럽 설화가 친숙하기 때문에, 영어 문화 독자가 착각에 빠진 것처럼, 평론가는 유사성의 함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호 텍스트성에서 유사성의 함정은 너무 치명적입니다. 유사성의 함정은 집착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생물 군계 우주선과 생태계 시뮬레이션에게 새로운 자연 환경은 원형적인 텍스트인지 모릅니다.]
만약 <물고기>가 홍수 설화, 방주 설화를 받아들이고 바꾼다면, 만약 이 상호 연관성 해석이 틀리지 않는다면, 우주선 바이오 돔은 어떤가요? SF 장르에서 생물 군계 우주선(biome spaceship)은 바이오 돔을 장착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생물 군계 우주선은 수많은 식물상과 동물상과 균류들을 풀어놓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합니다. 우주선 사람들은 새로운 자연과 교감합니다. 홍수 설화와 생물 군계 우주선은 비슷합니다. 양쪽에는 유사성, 교집합이 있습니다.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읽고 홍수 설화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독자는 홍수 설화를 읽고 하드 SF 소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게 타당한가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게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인정할까요? 만약 문학 강의에서 학생이 하드 SF 소설과 홍수 설화를 연결한다면, 문학 강사가 이게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인정해야 하나요? 문학 평론가가 <물고기>를 읽고 근본적인 연관성을 찾는 것처럼, SF 독자가 생물 군계 우주선을 읽고 근본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나요? 상호 텍스트성에서 텍스트는 두 가지를 넘을 수 있습니다. 텍스트들은 세 가지들, 네 가지들, 그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비단 생물 군계 우주선과 홍수 설화만 아니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역시 상호 텍스트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물 군계 우주선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비슷합니다.
생물 군계 우주선이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는 것처럼, <Among Ripples: Shallow Waters> 같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비디오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물 군계 우주선에서 생태계 조성과 새로운 자연은 가장 커다란 특징이고,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입니다. 홍수 설화, 방주 설화와 생물 군계 우주선이 비슷한 것처럼, 방주 설화와 생태계 시뮬레이션 역시 비슷합니다. 방주 설화에서 창조신은 새로운 대지를 제시하고, 새로운 대지에서 사람들은 많은 동물들을 풀어놓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에서 게임 프로그램은 새로운 대지를 제시하고, 새로운 대지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많은 식물상과 동물상과 균류들을 풀어놓습니다. 아무리 온갖 유명한 문학들이 노아 신화를 인용한다고 해도,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달리, 이런 문학들은 새로운 자연 생태계와 많은 동물들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학들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은 방주 설화에 훨씬 가깝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기 때문에, 홍수 설화는 여기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생물 군계 우주선과 <Shallow Waters>에게 홍수 설화, 새로운 자연, 자연과의 교감은 상호 텍스트 원형인지 모릅니다.
그저께 6월 16일 게시글은 헤라클레스와 네메아 사자,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서 아르고 함선과 거대 바다 거북, <퍼시픽 림>에서 유레카 스트라이커와 오타치를 비교했습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게 상호 연관성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반면, 생물 군계 우주선과 <Shallow Waters>에게 새로운 자연, 수많은 동물들,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텍스트가 원형인가요? 어쩌면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홍수 설화, 방주 설화가 21세기 초반에 걸맞게 업그레이드하기 원한다면, 생물 군계 우주선과 <Shallow Waters>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초반은 행성급 환경 오염 시대, 기후 변화 시대입니다. 여덟째 문단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나타났을 때, 이미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자였습니다. 자본주의는 개망나니 버릇을 버리지 못했고, 21세기 초반 자본주의는 행성급 오염 범죄자입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 시대에서 새로운 자연, 수많은 동물들,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원형적인 텍스트는 훨씬 소중할 겁니다.
※ 게임 <Among Ripples: Shallow Waters> 스크린샷 출처: Sampstra Ga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