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미친 아담>과 브리오슈와 대체제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미친 아담>과 브리오슈와 대체제

OneTiger 2020. 5. 26. 20:00

[딸기 치즈 케이크는 제빵 범주에 속합니다. 브리오슈는 비슷한 제빵 범주에 속하고 대체제가 됩니다.]

 

 

"빵이 없나요?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세요." 많은 사람들은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가 이것을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루이 16세가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민중들은 심각한 기근에 부딪혔고,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프랑스 민중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이것을 들었고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화는 얼마나 마리 앙투와네트가 민중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리 앙투와네트가 한심하고 멍청한 여자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와네트가 이것을 정말 말했는지 의심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와네트가 '빵 대신 케이크'를 말했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역사학자들은 이게 그저 풍문이나 모함에 불과하다고 추측합니다. 프랑스 민중들이 마리 앙투와네트를 싫어했기 때문에, 마리 앙투와네트를 모함하기 위해 누군가는 헛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마리 앙투와네트가 정치적인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마리 앙투와네트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 헛소문은 퍼졌는지 모릅니다. 가부장 편견은 여자들이 멍청하고 무능하다고 간주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리 앙투와네트는 '빵 대신 케이크'를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와네트와 상관없이, '빵 대신 케이크'는 사람들이 유사성을 중시한다고 보여줍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사람들은 유사성을 찾고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빵 대신 케이크'는 빵과 케이크에게 유사성이 있고 두 가지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한다고 증명합니다. 빵에게 케이크는 대체제가 됩니다. 빵과 케이크는 먹거리이고, 특히, 양쪽은 제빵 범주에 속합니다. 제빵사는 밀가루를 이용하고 빵과 케이크를 만듭니다. 빵과 케이크에게 유사성(제빵)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는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빵 대신 책상'은 유사성을 드러내지 않고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케이크와 달리, 책상은 제빵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빵사는 책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목수는 책상을 만듭니다. 목수는 밀가루를 반죽하지 않고 효모를 첨가하지 않습니다. 목수는 밀가루를 반죽하기보다 톱으로 목재를 썹니다. 책상보다 빵이 케이크에 가까운 것처럼, 빵보다 책상은 식탁에 가깝습니다. '빵 대신 케이크'처럼, '책상 대신 식탁'은 유사성을 드러내고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목수는 책상과 식탁을 만들고, 양쪽은 가구에 속합니다. 비단 빵과 케이크만 아니라 브리오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빵 대신 케이크'는 영어 표현입니다. (“Let them eat cake.”) 프랑스어 표현은 "Qu'ils mangent de la brioche."입니다. 이 표현에서 빵의 대체제는 케이크보다 브리오슈입니다. 브리오슈는 빵과 비슷하나, 브리오슈는 달걀과 버터를 함유하고, 종종 크림 역시 브리오슈에 들어갑니다. 오직 밀가루, 소금, 물, 이스트만 빵을 구성하나, 훨씬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들은 브리오슈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빵과 케이크에게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브리오슈에게도 유사성이 있고, 그래서 빵, 케이크, 브리오슈는 비슷한 제빵 범주를 형성합니다. 이 범주에서 케이크는 브리오슈의 대체제가 될 수 있습니다.

 

"브리오슈가 없나요? 브리오슈 대신 케이크를 먹으세요." 이 문구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케이크와 브리오슈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브리오슈가 없나요? 브리오슈 대신 아펠슈트루델을 먹으세요." 이것 역시 어색하지 않습니다. 브리오슈와 아펠슈트루델은 비슷한 먹거리, 제빵 범주에 속합니다. "브리오슈가 없나요? 브리오슈 대신 수르스트뢰밍을 먹으세요." 이건 다소 어색합니다. 브리오슈와 수르스트뢰밍은 똑같은 먹거리입니다. 하지만 수르스트뢰밍은 제빵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수르스트뢰밍는 발효한 청어이고, 밀가루 (반죽) 먹거리와 발효한 청어 먹거리는 크게 다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수르스트뢰밍은 먹거리입니다. 반면, 책상은 먹거리가 아닙니다. "브리오슈가 없나요? 브리오슈 대신 책상을 먹으세요." 이 문구는 엉터리입니다. 인간은 책상을 먹지 못합니다. 조난을 당한 프랭클린 탐험대가 가죽 구두를 먹은 것처럼, 인간은 책상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책상은 일반적인 먹거리가 아닙니다. 브리오슈와 수르스트뢰밍은 범주(먹거리)를 어느 정도 형성할 수 있으나, 브리오슈와 책상은 범주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유사성을 찾고 범주를 분류합니다. 빵과 브리오슈와 케이크처럼, 다른 많은 분야들 역시 유사성과 범주를 보여줍니다.

 

리스 레싱은 <풀잎은 노래한다>를 썼습니다.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를 썼습니다. 글로리아 네일러는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을 썼습니다.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은 소설입니다. 세 가지들은 소설입니다. 이것들은 소설이라는 유사성을 드러내고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은 유일한 소설이 아닙니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입니다. <폭풍의 언덕>이 다른 세 소설들과 어울릴 수 있나요? 이건 가능합니다. 네 가지들은 범주를 형성합니다.

 

 

정경윤 작가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썼습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입니다.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이 소설인 것처럼,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나요? 이것들은 소설이라는 폭넓은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범주에서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이질적이라고 느낄 겁니다.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은 이른바 문학에 속합니다. 반면,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문학이 아닙니다.

 

어떤 소설이 인간 심리, 사회 구조, 자연 환경을 깊게 고민하고 파악할 때,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평론가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합의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은 문학에 속합니다. 반면,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와 자연 환경을 깊게 고민하기보다 가볍고 유쾌한 연애에 치중합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문학이 되기보다 로맨스 장르가 됩니다. 이 소설이 가볍고 유쾌하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은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조롱하고 무시할지 모릅니다.

 

 

[소설과 만화와 드라마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이것들은 비슷한 범주(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형성합니다.]

 

 

만약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문학이 되지 못한다면, 영화 <폭풍의 언덕>은 어떤가요? 피터 코스민스키는 영화 <폭풍의 언덕>을 감독했습니다. 줄리엣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는 캐서린 언쇼와 히스클리프를 연기했습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입니다. <폭풍의 언덕>은 영화입니다. 소설과 영화는 다릅니다. 소설과 영화가 다르기 때문에, 영화 <폭풍의 언덕>은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가까워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무엇이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가까운가요?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보다 영화 <폭풍의 언덕>이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소설과 영화는 다르나,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보다 '영화' <폭풍의 언덕>은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가깝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영화' <폭풍의 언덕>과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이 인간 심리를 깊게 고민하기 때문에, 이건 유사성이 되고, 두 가지는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아무리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이 똑같은 소설이라고 해도, 가벼운 소설과 진지한 문학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영화 <폭풍의 언덕>이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폭풍의 언덕>이 인간 심리를 깊게 고민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다른 문학들과 함께 비슷한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썼습니다. 이건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평론입니다. 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보다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훨씬 가깝습니다. 평론보다 소설은 소설에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장 폴 사르트르가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깊은 고민을 담았다고 느낍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깊은 고민을 담았기 때문에, 이 평론이 소설들을 분석하기 때문에,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보다 '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은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과 '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분류할 겁니다. 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가볍고 유쾌하다고 무시하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이런 꼰대 평론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문학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바다의 가장자리>를 썼습니다. 이게 문학이 될 수 있나요?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문학은 소설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문학 소녀는 소녀가 소설들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해양 생태학 서적입니다. 해양 생태학 서적은 문학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레이첼 카슨은 선구적인 생태학자이고, <바다의 가장자리>는 아름다운 비유들을 보여줍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기념비적인 글자 매체입니다.

 

기념비적인 글자 매체는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독자는 <바다의 가장자리>를 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보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문학에 훨씬 가깝습니다. 다른 텍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썼습니다. "만약 여자에게 단두대에 오르기 위한 권리가 있다면, 여자에게는 연단에 오르기 위한 권리도 있을 것이다." 이 문구는 기념비적이고 문학적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습니다. "그대들은 오직 쇠사슬만 잃을 것이다.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글쎄요, 더 이상 이 문구에게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하지만 어떤 평론가들은 이것들이 문학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 헛소리야! 어떻게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공산당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가 문학에 속할 수 있지? 오직 허구만 문학에 속해야 해! <풀잎은 노래한다>와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폭풍의 언덕>은 허구야. 하지만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공산당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는 허구가 아니야!" 이렇게 문학 평론가들은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허구만 문학이 되나요?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는 허구가 아닙니다. 두 가지가 문학인가요?

 

미국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가 파쇼주의를 방치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과 죽음에 부딪혔습니다.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는 이것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는 문학에 속합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안네의 일기>를 읽는다면, 이웃집 영희는 '문학 소녀' 타이틀을 얻을 겁니다. 이건 <안네의 일기>가 문학이라고 증명합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노예 12년>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빌러비드>와 <앵무새 죽이기>를 비교한다고 해도, 평론가들은 이것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빌러비드>는 문학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앵무새 죽이기>는 문학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빌러비드>와 <앵무새 죽이기>는 똑같이 문학입니다. 독자들은 <노예 12년>을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빌러비드>와 <앵무새 죽이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노예 12년>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빌러비드>와 <앵무새 죽이기>는 근본적인 유사성을 드러내고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네 가지들이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빌러비드>와 <앵무새 죽이기>가 문학이기 때문에, <노예 12년> 역시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는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노예 12년>은 소설이 아니나, 독자들은 <노예 12년>이 소설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비록 독자들이 <노예 12년>을 소설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감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비록 솔로몬 노섭이 실존 인물보다 허구적인 등장인물(캐릭터)이라고 해도, 독자들은 <노예 12년>이 끔찍한 착취를 고발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노예 12년>이 소설이 되는 것처럼, 거꾸로 소설은 비(非)허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독자들은 소설이 비허구, 또 다른 현실이라고 간주합니다. 독서 모임들에서 많은 독자들은 소설이 허구라고 지적하지 않고 화자 시점과 같은 문학적인 장치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도리스 레싱은 허구를 썼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허구가 아닙니다. 하지만 양쪽은 똑같은 문학입니다.]

 

 

"왜 다들 히스클리프를 싫어하지? 만약 좋은 환경에서 히스클리프가 자랐다면, 히스클리프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 메갈리아를 봐. 메갈리아는 나쁘지 않아. 가부장적인 헬조선이 좆 같기 때문에, 메갈리아는 그저 폭언들을 퍼부을 뿐이야." 이 소감은 히스클리프가 '캐릭터'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 소감은 소설 등장인물 히스클리프와 현실 속의 메갈리아 사태를 비교합니다.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장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례처럼, 허구는 비허구가 될 수 있습니다. 허구가 비허구가 되는 것처럼, 비허구는 허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독자가 <노예 12년>이 허구라고 오해한다고 해도, 만약 독자가 노예 착취에 분노한다면, 솔로몬 노섭은 만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노예 12년>은 허구가 아닙니다.

 

아무리 네오 파쇼주의자들이 <안내의 일기>가 가짜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안내의 일기>는 허구가 아닙니다.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는 허구가 아니나, 양쪽은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만약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가 문학에 속한다면, 아무리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공산당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가 허구가 아니라고 해도, 왜 세 가지들이 문학에 속하지 못하나요? <노예 12년>과 <안네의 일기>가 문학에 속하는 것처럼,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공산당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는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게 과잉 해석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만장일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겁니다. 여전히 어떤 평론가들은 세 가지들에게 반대할 겁니다.

 

 

빵과 브리오슈와 케이크는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하나,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이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종종 유사성과 분류는 반박에 부딪힙니다. 비단 이것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문학적인) 생태학 서적입니다. 1994년 비디오 게임 <울프>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는 근본적인 유사성(근대 생태학)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나요? 레이첼 카슨이 <울프>를 좋아할까요?

 

레이첼 카슨은 <바다의 가장자리>를 썼습니다. 만약 레이첼 카슨이 '비디오 게임' <울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레이첼 카슨이 <울프>를 싫어한다고 해도, 분명히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에게는 근본적인 유사성(근대 생태학)이 있고, 레이첼 카슨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근대 생태학이 분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는 비슷한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만약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이 여기에 끼어든다면, 어떻게 관계가 바뀌나요?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은 소설입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울프>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소설처럼, 게임은 허구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늑대들을 선택하고 무리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3살짜리 암컷 늑대 Rumour는 등장인물(캐릭터)입니다. 현실에서 암컷 늑대 Rumour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게임 속에서 Rumour가 다른 수컷 늑대와 짝짓기하고 새끼들을 낳는다고 해도, 현실에서 야생 늑대 숫자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메티와 에타, 코라 같은 흑인 여자들이 소설 등장인물(캐릭터)인 것처럼, 암컷 늑대 Rumour는 게임 등장인물입니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울프>가 등장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에, 양쪽은 비슷합니다.

 

반면, 논픽션은 등장인물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하나의 유령이 떠도는 중이다. 유령의 이름은 공산주의이다." 여기에서 유령은 등장인물(캐릭터)이 아닙니다. <공산당 선언>이 등장인물을 제시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들은 논픽션 텍스트가 등장인물을 제시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허구가 아닙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와 <공산당 선언>은 등장인물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가장자리>보다 허구(픽션)로서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울프>는 가깝습니다.

 

 

반면, <울프>는 문학이 되지 못합니다. 평론가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합의하지 못하나, 적어도 문학은 텍스트, 글자 매체입니다. <울프>는 글자 매체보다 영상 매체입니다. <울프>가 시각적인 정보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울프>에서 글자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울프> 설명서는 글자 매체이나, 비디오 게임으로서 <울프> 그 자체는 글자 매체가 아닙니다. 반면, <바다의 가장자리>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은 똑같은 글자 매체입니다. 비록 어떤 평론가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양쪽은 문학이라는 범주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울프>보다 글자 매체로서 양쪽은 가깝습니다.

 

하지만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은 흑인 페미니즘 문학입니다. 이 소설은 야생 자연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흑인 여자와 자연 환경이 똑같이 피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야생 자연 환경에 대입할지 모르나,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는 자연 환경을 직접 표현합니다. 근대 생태학이라는 기준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보다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를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소설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처럼, 게임 <울프>는 허구이고, 동시에 과학 서적 <바다의 가장자리>처럼, 시뮬레이터 <울프>는 생태학입니다. 기준이 바뀔 때, 분류 역시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류를 파악할 때,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이 유사성이 기준이 되는가? 왜 사람들이 이 기준에 가치를 부여하는가?" 북튜버는 글자 매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바다의 가장자리>를 함께 묶을 겁니다. 문화 예술 평론가는 허구(픽션)에 가치를 부여하고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울프>를 함께 묶을 겁니다. 생태학 덕후는 야생 자연 환경에 가치를 부여하고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를 함께 묶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기준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분류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맨이터>는 동물 조종 게임입니다.

 

<울프>가 동물 조종 게임인 것처럼, <맨이터>는 동물 조종 게임입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야생 동물 조종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울프>와 <맨이터>는 범주를 형성할 겁니다. 하지만 <맨이터>는 폭력과 학살을 강조합니다. <울프>와 달리, <맨이터>는 자연 환경 시뮬레이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기준에서 <울프>보다 <맨이터>는 <둠 이터널>에 훨씬 가깝습니다. <둠 이터널>은 동물 조종 게임이 아니나, <둠 이터널>이 극단적인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자랑하기 때문에, <울프>보다 <맨이터>와 <둠 이터널>은 가깝습니다. 비디오 게임 <Creatura>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Creatura>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울프>와 <Creatura>는 비슷합니다. <바다의 가장자리> 역시 <Creatura>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Creatura>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고 새로운 생명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Creatura>가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기 때문에, <Creatura>는 <울프> 및 <바다의 가장자리>와 다릅니다. 현실에서 이런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런 생태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非)현실입니다. <Creatura>가 비현실을 묘사하기 때문에, <Creatura>는 <울프> 및 <바다의 가장자리>와 다릅니다.

 

게임 <Creatura>가 유전 형질들을 조합하는 것처럼, 소설 <와인드업 걸>과 소설 <미친 아담>은 유전 형질들을 조합합니다. <Creatura>가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제시하는 것처럼,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새로운 자연 환경을 제시합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와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자연 환경을 중시합니다. 작가 마가렛 앳우드는 레이첼 카슨을 존경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가 비현실(새로운 자연 생태계)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의 가장자리>와 <울프>보다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가깝습니다.

 

 

[이 게임은 허구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보다 이 게임이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에 가깝나요?]

 

 

비현실이 근본적인 유사성이 되기 때문에,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범주는 SF, 사이언스 픽션이 됩니다.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렇게 SF 장르는 나타납니다. 물론 아직 이 분류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순수의 시대>와 <브루스터 플레이스의 여자들>과 달리,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바다의 가장자리>가 문학에 속하지 못하는 것처럼, <Creatura>는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과 다릅니다. <Creatura>는 비디오 게임, 영상 매체이고,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소설, 글자 매체입니다.

 

꼰대 문학 평론가들이 웹소설들을 무시하고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추켜세우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고급 매체와 저질 매체를 분리합니다. 독서는 고급 매체이고, 비디오 게임은 저질 매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고 게임이 불량 식품이라고 비난합니다. 이건 너무 부당합니다. <박정희가 옳았다>는 책, 서적입니다. 만약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이 '독서'가 마음의 양식인가요? "박정희를 아무리 폄하해도 박정희가 옳았다." 이 문구가 마음의 양식이 되나요? "여자에게는 연단에 오르기 위한 권리도 있을 것이다."는 마음의 양식이 되나, "박정희를 아무리 폄하해도 박정희가 옳았다."가 똑같은 마음의 양식인가요?

 

 

언제나 모든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서적이 자유 민주주의를 찬양한다면, 독자는 이 책을 읽고 자유 민주주의 좀비가 될 겁니다. 자유 민주주의 좀비로서 독자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심각한 환경 오염들을 무시할 겁니다. 자랑스러운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기후 변화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 좀비로서 독자는 환경 오염들을 외면할 겁니다. <박정희가 옳았다>와 달리, <울프>는 자유 민주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프>는 광활한 야생 환경을 감동적으로 연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자연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타령보다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은 훨씬 낫습니다. 이 사례처럼, 독서는 절대적인 마음의 양식이 아니고, 비디오 게임은 절대적인 불량 식품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울프>는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고, 서적 <박정희가 옳았다>는 불량 식품입니다. 분명히 소설과 게임은 다르고, 글자 매체와 영상 매체는 다릅니다. 하지만 매체 차이가 중요한가요? 만약 매체 차이가 중요하다면, <Creatura>보다 <와인드업 걸>과 <풀잎은 노래한다>가 가깝나요?

 

 

만약 <Creatura>보다 <와인드업 걸>과 <풀잎은 노래한다>가 가깝다면, <박정희가 옳았다> 역시 마음의 양식이 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는 비슷합니다. 양쪽에게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가 똑같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양쪽은 비슷한 범주에 속합니다. 그리고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마음의 양식입니다.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가 비슷한 범주에 속하고,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마음의 양식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옳았다>는 마음의 양식이 됩니다. 오오, 그렇습니다~!!

 

<박정희가 옳았다>는 훌륭한 마음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위대하고 위대하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떠받들어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서 박정희 각하께서는 구국의 결단을 내리셨고, 좌익 빨갱이들을 물리치셨고,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누가 박정희 각하를 감히 욕할 수 있나요? 누가 욕하나요? 박정희 각하께서는 부유하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드셨습니다. 박정희 각하 덕분에, 자랑스러운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은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인디언들을 대량 학살한 것처럼, 원주민 학살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비롯했으나, 이게 무슨 대수인가요? 야만인들이 대수인가요?

 

 

고작 야만인들 따위가 죽어나자빠진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야만인 새끼들이 뒈지든 말든, 박정희 각하께서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셨고, 우리는 뒈져버린 야만인 새끼들보다 박정희 각하와 자유 민주주의를 떠받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가 비슷할 수 있는 것처럼, <Creatura>보다 <와인드업 걸>은 <풀잎은 노래한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와인드업 걸>과 <풀잎은 노래한다>가 똑같이 소설, 글자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Creatura>와 <와인드업 걸>은 다릅니다.

 

SF 팬들은 <Creatura>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과 다르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니고, 이 분류는 타당합니다. 하지만 모든 유사성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똑같이 비현실 설정을 묘사합니다. SF 팬들이 비현실 설정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Creatura>와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무리 <와인드업 걸>과 <풀잎은 노래한다>가 똑같이 소설, 글자 매체라고 해도, 아무리 <풀잎은 노래한다>에 환상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도, 이 소설에서 비현실 설정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풀잎은 노래한다>는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 식민지, 백인 농장 주인 메리, 흑인 하인 모세는 비현실 설정이 아닙니다. 반면, 개조 코끼리 메가돈트는 비현실 설정이고, 그래서 <와인드업 걸>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그래서 <Creatura>와 <미친 아담>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박정희가 옳았다>에서 형식과 매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Creatura>와 <미친 아담>에서 형식과 매체(소설과 게임)보다 비현실 설정은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약 비현실 설정이 중요한다면, 이게 SF 장르를 분류하기 위한 결정적인 기준이라면, 소설 <에라곤>이 SF 장르에 속하나요? 소설 <에라곤>은 드워프 지하 왕국을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드워프 지하 왕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워프 지하 왕국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드워프 지하 왕국이 비현실 설정이고, <에라곤>이 비현실 설정을 묘사하기 때문에, <에라곤>이 SF 장르에 속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이언스 픽션에서 비현실 설정은 외톨이가 아닙니다. 비현실 설정에게는 짝궁이 있습니다. 암컷 늑대 Rumour가 수컷 늑대와 짝짓기하고 새끼들을 낳는 것처럼, 비현실 설정은 다른 뭔가와 만나고 사이언스 픽션을 형성합니다. 이게 무엇인가요? 비현실 설정이 무엇과 만날 때, 양쪽이 사이언스 픽션을 형성하나요? 대답은 서구 근대화입니다. 드워프 지하 왕국은 서구 근대화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북유럽 신화가 드베르그를 언급하는 것처럼, 드워프는 고대 신화, 전설, 민담에 기반합니다.

 

 

[우주 정거장과 드워프 지하 왕국은 똑같은 비현실입니다. 하지만 우주 정거장은 과학을 반영합니다.]

 

 

드워프와 달리, 유전 공학은 신화, 전설, 민담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생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비현실 설정은 생물학과 만나고 SF <와인드업 걸>을 만듭니다. <Creatura>와 <미친 아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생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비현실 설정은 생물학과 만나고 SF <Creatura>와 <미친 아담>을 만듭니다. <에라곤>과 <와인드업 걸>은 똑같이 비현실 설정을 이야기하나, 서구 근대화는 결정적인 차이가 됩니다. 그래서 <에라곤>과 <와인드업 걸>은 다르고,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비슷합니다. <에라곤>은 <와인드업 걸>의 대체제가 되지 못합니다.

 

반면, <미친 아담>은 <와인드업 걸>의 대체제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을 읽지 못하나요? <와인드업 걸> 대신 <미친 아담>을 읽으세요." 이렇게 SF 팬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빵과 브리오슈가 비슷한 범주(제빵 먹거리)를 형성하는 것처럼,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비슷한 범주(SF)를 형성합니다. <에라곤>이 서구 근대 과학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에라곤>은 이 범주(SF)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장르를 분석하기 위해 서구 근대 과학은 아주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서구 근대 과학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서구 근대 과학을 파악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고작 야만인 새끼들 따위보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박정희 각하와 자유 민주주의가 훨씬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서구 근대화를 떠받듭니다. 서구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자유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인디언 학살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비롯했으나, 야민인 새끼들이 무슨 상관인가요? 위대하고 위대하신 박정희 각하께서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야만인 새끼들이 끔찍하게 죽어나자빠졌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서구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자유 민주주의를 만들었으나, 박정희 각하께서 절대적으로 옳으신 것처럼, 서구 근대 과학은 절대적입니다.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를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두 소설은 어떻게 세계화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무참하게 파괴하는지 고발합니다. <와인드업 걸>과 <미친 아담>이 환경 아포칼립스와 판데믹 아포칼립스와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세 가지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폭주하는 자유 무역 속에서 전염병 사태는 세계화 자본주의를 따르고 세계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고, 자유 민주주의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계화 속에서 전염병이 세계화한다고 해도, 이게 무슨 상관인가요?

 

 

박정희 각하와 자유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것처럼, 서구 근대화는 절대적이고, 서구 근대 과학 역시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서구 근대 과학이 무엇인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SF 평론가 역시 서구 근대 과학이 무엇인지 절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박정희 각하와 자유 민주주의가 옳은 것처럼, 언제나 서구 근대 과학이 옳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염병이 세계화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 사진 출처: Suzy Hazelwood,

https://www.pexels.com/photo/cheese-cake-with-strawberry-fruit-109859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