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가든 파티>와 우주선 바이오 돔 호랑이 본문
[우주선과 수마트라 호랑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 결합은 환경 오염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21세기 초반 도시에서 살아있는 스피노사우루스가 돌아다닌다면, 이 장면은 너무 황당무계할 겁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거대 도시와 스피노사우루스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미 스피노사우루스는 멸종했습니다. 홀로세 인간은 살아있는 스피노사우루스를 만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직 공룡들이 멸종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떻게 15m짜리 육식 공룡이 도시에 들어올 수 있나요? 도시는 야생에 속하지 않습니다. 만약 스피노사우루스가 밀림을 누비고, 강물을 헤엄치고, 커다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면, 이건 낯설지 않을 겁니다. 이건 야생입니다. 하지만 도시는 문명에 속합니다.
자연과 문명(도시)을 단순하게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이분법은 그저 편견에 불과합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이분법이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도시는 15m짜리 야생 동물을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커다란 야생 동물들은 도시에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도시에서 살아있는 스피노사우루스는 너무 낯섭니다. 도심 속의 육식 공룡은 너무 낯섭니다. 만약 고생물학 서적이 스피노사우루스 사진을 싣는다면, 이건 자연스러울 겁니다. <공룡 대백과> 같은 고생물학 서적에서 스피노사우루스 사진은 낯설지 않습니다.
도심 속의 스피노사우루스보다 <공룡 대백과> 속의 스피노사우루스는 자연스럽습니다. <공룡 대백과> 속의 스피노사우루스보다 도심 속의 스피노사우루스는 낯섭니다. 그래서 도심 속의 육식 공룡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도시와 육식 공룡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육식 공룡은 훨씬 낯섭니다. 도시와 육식 공룡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이건 육식 공룡을 훨씬 강조하고, 도심 속의 스피노사우루스는 훨씬 인상적입니다. 대조적인 것이 어울릴 때, 이게 상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뭔가를 강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뭔가와 다른 뭔가를 대조하기를 좋아합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유명한 (일본) 속담입니다. 이 속담에서 돼지와 진주는 대조적입니다. 돼지에게 보석이 아무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돼지와 진주는 대조적이고, 이 속담은 진주를 훨씬 강조합니다. "금은방 속의 진주 목걸이"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다릅니다. 금은방은 진주 목걸이 이외에 다른 많은 보석들을 갖춥니다. 어쩌면 진주 목걸이보다 어떤 보석들은 훨씬 비쌀지 모릅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대양의 심장(블루 호프 다이아몬드)에게 진주 목걸이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금은방 속의 진주 목걸이"는 진주를 부각하지 못합니다. 반면, 돼지는 부각합니다.
도심 속의 스피노사우루스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비슷한 효과를 연출합니다. 양쪽 모두 대조적인 두 가지를 늘어놓고 상대를 강조합니다. 솔직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인간 중심주의 속담입니다. 이 속담은 돼지를 너무 비하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속담이 불쾌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부족민들에게 진주 목걸이가 그저 시시한 물품에 불과하다면, 이 부족민들이 돼지와 비슷한가요? 이른바 문명인이 이 부족민들을 돼지라고 무시할 수 있나요? 이건 차별입니다. 이게 차별인 것처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차별인지 모릅니다. 기준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속담은 강조 효과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문학들 역시 강조 효과를 좋아합니다. 인간 중심주의 속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보다 단편 소설 <가든 파티>는 훨씬 나은 사례일 겁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가든 파티>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천국과 지옥을 대조합니다. 정원은 천국입니다. 정원을 묘사하기 위해 캐서린 맨스필드는 온갖 미사여구들을 동원합니다. 완벽한 날씨, 바람과 구름 한 점이 없는 하늘, 라벤더 향기, 싱그럽고 아름다운 나무들,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소설 주인공 로라, 최고의 장미, 고른 잔디밭, 다양한 샌드위치들과 슈크림빵들, 기타 등등. 여기는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소설 주인공 로라는 행복을 만끽합니다. 가든 파티는 정말 행복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로라는 영원히 머무르지 못합니다. 여러 이야기들은 정든 고향에서 주인공을 내쫓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 모험가와 검치 호랑이 동료가 느긋한 마을 주점을 뒤로 하고 위험하고 복잡한 흡혈귀 성채로 들어가는 것처럼, 여러 이야기들은 안락한 장소에서 주인공이 떠나고 위험하고 낯선 장소에 들어간다고 보여줍니다. 위험한 흡혈귀 성채에서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는 해골 병사들과 좀비들과 유령들을 물리치고 경험치들과 보물들을 얻을 겁니다. 낯선 장소는 성장을 동반합니다.
흡혈귀 성채에서 나온 이후, 드루이드는 레벨을 올리고 좋은 장비를 걸칠 수 있습니다. <가든 파티> 역시 이런 이야기 원형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천국에서 소설 주인공 로라는 떠나고 지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류층 거리는 지옥입니다. 이상한 개는 로라 곁을 지나가고, 목발을 짚은 할머니는 불길하고, 가난한 그림자들은 어둡습니다. 로라는 도망치기 원하나, 이건 불가능합니다.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가 횃불을 밝히고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로라는 불길하고 침울한 거리로 계속 들어갑니다. 심지어 로라는 오묘한 죽음과 맞닥뜨립니다. 가난한 거리에서 로라는 새로운 것, 낯선 것을 경험합니다.
가난하고 오묘한 하류층 거리에서 로라는 빠져나오고 다시 정원으로 돌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로라는 성장하고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가든 파티>가 계급 갈등을 묘사한다고 해석합니다. 정원은 지배 계급이고, 하류층 거리는 피지배 계급입니다. 피지배 계급이 침울하게 죽어가는 동안, 지배 계급은 신나는 파티를 즐깁니다. 지배 계급은 죽어가는 피지배 계급을 동정하나, 이건 그저 늦은 동정에 불과합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방문하나,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과 섞이지 못합니다. 다시 지배 계급은 안전한 정원으로 돌아옵니다. 계급 갈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갈등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정원은 부유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부유한 정원이 뚝 떨어졌나요? 부유한 자본주의가 번쩍 나타났나요? 그건 아닙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에, 정원은 천국이고, 하류층 거리는 지옥입니다. 아무리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동정한다고 해도, 만약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계급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계급 투쟁은 유효합니다. 아직 로라는 계급 투쟁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가든 파티>에서 계급 갈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든 파티>에서 계급 갈등은 전부가 아닐 겁니다. 소설 주인공 로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천국(정원)과 지옥(하류층 거리) 사이에서 로라가 왕래하기 때문입니다. 정원이 아주 행복하기 때문에, 하류층 거리는 훨씬 침울합니다. 만약 <가든 파티>가 온갖 미사여구들을 동원하지 않았고 정원을 치장하지 않았다면, 이 단편 소설은 하류층 거리를 강조하지 못했을 겁니다. 부유한 정원 없이, 문학은 침울한 하류층 거리를 묘사할 수 있으나, 부유한 정원과 침울한 하류층 거리가 대조적이기 때문에, 이건 하류층 거리를 부각합니다. 하류층 거리에서 로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천국 같은 부유한 정원에서 로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 제목은 '가든 파티'입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부유한 정원보다 하류층 거리는 핵심 장소(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한 장소)이나, 소설 제목은 가든 파티입니다. 부유한 정원이 하류층 거리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하류층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캐서린 맨스필드가 부유한 정원에 온갖 미사여구들을 붙였나요? 비록 소설 작가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히 <가든 파티>는 대조적인 두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문학에서 비단 <가든 파티>만 아니라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안젤라 카터는 <써커스의 밤>을 썼습니다. 소설 <써커스의 밤>에서 주인공 소피 페버스에게는 두 커다란 날개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소피 페버스는 환상입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 잭 월써는 '지성인의 표상'입니다. 잭 월써는 이성입니다. 환상과 이성은 대립합니다. 소피 페버스와 잭 월써는 대조적입니다. 잭 월써는 소피 페버스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잭 월써가 환상이라면, 환상은 환상을 부각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환상이 또 다른 환상을 훨씬 강렬하게 부각한다고 해도, 이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양쪽 저울 추는 균형을 이루지 못합니다.
<가든 파티>에서 부유한 정원과 하류층 거리가 대조적인 것처럼, 부유한 정원이 하류층 거리를 부각하는 것처럼, <써커스의 밤>에서 소피 페버스와 잭 월써는 대조적이고, 잭 월써는 소피 페버스를 부각합니다. 이건 TV 드라마 <엑스 파일>에서 폭스 멀더와 데이나 스컬리와 비슷합니다. 폭스 멀더는 외계인을 믿기 원합니다. 폭스 멀더는 환상입니다. 데이나 스컬리는 외계인을 믿지 않습니다. 데이나 스컬리는 이성입니다. 폭스 멀더와 데이나 스컬리는 대조적입니다. 데이나 스컬리는 폭스 멀더를 부각합니다. 하지만 외계인은 존재하고, 환상은 진실입니다. 이성은 이성보다 회의에 가깝습니다.
회의와 진실은 대조적이고, 회의는 진실을 부각합니다. <엑스 파일>에서 폭스 멀더는 핵심 등장인물이나, 폭스 멀더는 혼자가 아닙니다. <가든 파티>에서 정원과 하류층 거리가 대조적인 것처럼, <써커스의 밤>에서 소피 페버스와 잭 월써가 대조적인 것처럼, <엑스 파일>에서 데이나 스컬리가 폭스 멀더를 부각하기 때문에, 폭스 멀더는 인상적입니다. 폭스 멀더는 인상적인 등장인물이 스스로 되지 못합니다. 데이나 스컬리 없이, 폭스 멀더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셜록 홈즈와 존 왓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론가들은 아서 코난 도일의 진짜 업적이 셜록 홈즈보다 존 왓슨이라고 해석합니다.
존 왓슨이 셜록 홈즈를 부각하기 때문에, 셜록 홈즈는 천재적인 두뇌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존 왓슨이 셜록 홈즈를 띄워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셜록 홈즈가 여러 사건들을 해결한다고 해도, 셜록 홈즈는 인상적인 등장인물이 되지 않을 겁니다. 뭔가를 강조하기 위해 문학은 대조적인 두 가지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주선에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돌아다닌다면, 이건 낯설 겁니다. 우주선과 호랑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술자, 과학자, 무인 로봇, 외계인, 외계 괴물은 우주선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이것들이 우주선과 어울린다고 증명합니다.
아무리 우주선 복도에서 기술자, 과학자, 무인 로봇, 외계인, 외계 괴물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게 낯설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외계 괴물이라는 존재 그 자체는 낯설지 모르나, 상황 그 자체는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외계 괴물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에일리언>은 대표적입니다. 아무리 우주선 복도에서 제노모프가 승무원을 물어뜯는다고 해도, 이건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주선 복도에서 기술자와 무인 로봇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건 낯설지 않습니다. 반면, 수마트라 호랑이는 낯섭니다. 왜 우주선에서 호랑이가 돌아다니나요?
도심 속의 스피노사우루스가 낯선 것처럼, 우주선 속의 수마트라 호랑이는 낯섭니다. <가든 파티>에서 부유한 정원과 하류층 거리가 대조적인 것처럼, <써커스의 밤>에서 소피 페버스와 잭 월써가 대조적인 것처럼, 21세기 초반 도시와 15m짜리 육식 공룡이 대조적인 것처럼, 우주선과 수마트라 호랑이는 대조적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는 열대 밀림과 어울립니다. 왜 열대 밀림보다 우주선 복도에서 호랑이가 돌아다니나요? 이 설정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이 설정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장착했고, 열대 밀림 바이오 돔에서 호랑이는 빠져나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하나요? 일반적으로 우주선과 생물 군계(biome)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주선은 항공 역학, 천문학, 기계 공학에 속하고, 생물 군계는 생물학, 생태학에 속합니다. 문제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만약 지구 생물권이 무너졌다면, 더 이상 지구는 생명의 요람이 아닐 테고,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지구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개척 우주선은 출발했는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개척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장착했을 겁니다. 바이오 돔은 열대 밀림을 품었습니다.
열대 밀림 바이오 돔에서 호랑이는 탈출했고, 그래서 우주선 복도에서 경비 대원들과 호랑이는 대치합니다. 이 장면이 낯설기 때문에, 이 장면은 수마트라 호랑이, 바이오 돔, 환경 아포칼립스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SF 작가는 개척 우주선에 바이오 돔을 덧붙이고 환경 아포칼립스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 없이, 우리는 환경 오염들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정원 없이, 문학이 하류층 거리를 묘사할 수 있는 것처럼, SF 소설 없이, 우리는 환경 오염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정원이 하류층 거리를 부각하는 것처럼, 우주선 호랑이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주 개척은 호랑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은 훨씬 인상적입니다.]
우주선 호랑이가 낯설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인식을 환기하고 환경 오염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선 호랑이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장거리 개척 우주선과 바이오 돔은 비(非)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장거리 개척 우주선을 건조하지 않고 바이오 돔을 우주선에 장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건 비현실입니다. 개척 우주선과 바이오 돔이 비현실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SF 소설이 황당무계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은 대조적입니다. <가든 파티>와 <써커스의 밤>이 하류층 거리와 환상을 부각하는 것처럼, 비현실은 현실을 부각합니다.
개척 우주선과 바이오 돔은 황당무계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킵니다. 여기에서 현실은 심각한 환경 오염들입니다. 환경 오염들은 너무, 너무 심각합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하다고 난리법석이나, 기후 참사는 훨씬 치명적일지 모릅니다. 아니, 기후 참사와 코로나 19 사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2020년은 불지옥을 향해 나가는 중인지 모릅니다. 환경 사회학 서적 <2050 거주 불능 지구>에서 데이비드 웰스는 미래 지구 불지옥을 예상합니다. 기후 변화(폭염)는 농업에 대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농업(식량 생산량)은 40~50% 줄어들지 모릅니다.
만약 식량이 절반 줄어든다면, 이건 다른 부정적인 사태들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끝이 아닙니다. 해수면 상승 때문에, 바다는 해안 지역들을 뒤덮을 테고, 상하이, 홍콩, 뭄바이, 콜카타 같은 거대 도시들은 영구적인 수몰된 도시가 될 겁니다. 수천 만의 사람들에게 <뉴욕 2140>과 <서브머지드>의 해수면 상승은 그저 사이언스 픽션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거의 영구적인 수분 부족과 가뭄은 (국내 번역 제목 '식수 전쟁'처럼) 끔찍한 식수 전쟁을 저지를 겁니다. 이상 기후, 홍수, 폭풍은 거대 도시들을 휩쓸 테고, 천문학적인 비용은 날아갈 겁니다. 산불은 몇 십 배 강력해질 테고, 전염병 역시 기승을 부릴 겁니다.
폭염 때문에, 사람들은 외출하지 못할 겁니다. 냉방 장치 없이, 외부 환경에서 사람들은 죽어갈 겁니다. 이 상황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대기 오염 속에서 야외 노동자들이 병드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 살인적인 폭염 속에서 야외 노동자들은 죽어가야 합니다. 폭염은 살인입니다. 백화 현상은 산호초들을 파괴하고, 대부분 해양 생물 다양성은 질식합니다. <뉴욕 2140>은 환경 아포칼립스 때문에 새롭고 평등한 사회 구조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나, 이건 너무 순진한 미래인지 모릅니다. 2140년이 도달하기 전에, 2050년 지구는 불지옥이 될지 모릅니다. '뉴욕 2140'보다 '2050 불지옥 지구'는 훨씬 끔찍한 악몽입니다.
어쩌면 이 예측은 빗나갈지 모릅니다. <2050 거주 불능 지구>는 너무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2050 거주 불능 지구>보다 기후 변화 참사는 훨씬 경미할지 모릅니다. 환경 사회학은 예언자가 아니고 점쟁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최악의 예상이 맞는다면? 만약 <서브머지드>의 해수면 상승이 그저 사이언스 픽션에 불과하지 않다면? 만약 몇 십 년 이후, 지구 생물권이 무너지고 지구가 불지옥이 된다면? 그때 인류 문명은 개척 우주선들과 바이오 돔들을 정말 건조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지옥 상황에서 인류 문명이 개척 우주선들을 건조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무리 인류 문명이 개척 우주선들을 건조한다고 해도, 개척 우주선들이 외계 행성들을 성공적으로 테라포밍할 수 있나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명석한 미래학자들조차 장담하지 못합니다. 개척 우주선들은 불확실합니다. <2050 거주 불능 지구>는 "우리는 행성을 선택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설 <오로라>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 역시 개척 우주선과 바이오 돔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하고 "우리에게는 행성 B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개척 우주선이 실패하기 때문에, 유일한 어머니 지구는 훨씬 소중합니다. 이 관점에서 <오로라>와 <2050 거주 불능 지구>는 비슷합니다.
우주선 호랑이가 환경 아포칼립스를 강조하는 것처럼, 유일한 생명의 요람 지구를 강조하기 위해 <오로라>는 개척 우주선과 바이오 돔과 외계 행성을 이야기할 겁니다. 동시에 킴 스탠리 로빈슨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2050 거주 불능 지구> 역시 자본주의가 흔들린다고 설명합니다. 기후 변화는 환경 재난이 아닙니다. 이건 '환경 오염 범죄'입니다. 이미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지구 온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가속화했고 하키 스틱 그래프를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착각하나, 환경 오염 범죄자는 인류 전체보다 자본주의입니다.
<가든 파티>에서 피지배 계급이 죽어가는 동안, 지배 계급이 신나는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기후 참사에서 이른바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이 죽어가는 동안, 자본가 계급은 신나는 이윤을 축적합니다. 아무리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든 파티>가 계급 갈등을 묘사하는 것처럼, 기후 변화는 환경 재난보다 계급 갈등입니다. 오직 계급 투쟁만 계급 갈등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급 투쟁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2050 거주 불능 지구>는 카를 마르크스가 선형적인 진보 역사를 맹신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은 어느 정도 옳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태 사회주의>가 반박하는 것처럼, 비록 공식적인 마르크스/엥겔스 출판 서적들이 생태학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후기 카를 마르크스는 생태학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훨씬 오래 살았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생태학 서적을 출판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붕괴된 자본주의를 함부로 예측했다고 비판하나, 좌파 환경 운동에게 자본주의 과잉 생산, 확장과 정복, 비(非)시장 영역으로서 자연 환경, 원시 공산주의는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기후 참사를 직접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구자입니다.
비록 환경 오염 범죄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로자 룩셈부르크는 기후 참사가 그저 윤리적인 소비 문제에 불과하지 않다고 증명했습니다. 여전히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기후 참사에 대처하기 위한 계급 투쟁은 유효할 겁니다. 이건 좌파 환경 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지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조적인 역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환경 운동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계급 투쟁 없이,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이 행성급 기후 범죄에 대처할 수 있나요? 만약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이 행성급 기후 범죄에 대처하기 원한다면,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은 사회적인 평등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SF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SF 작가가 우주선 속의 호랑이를 써야 하나요? 아니, 우주선 호랑이 없이, 우리는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을 응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입니다. 좋든 싫든, 환경 무산자 계급으로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적인 평등을 실천해야 합니다.
SF 소설 없이, 우리는 이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현실, 기후 참사가 우리에게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SF 소설을 읽고 인식을 환기할 수 있습니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부유한 정원과 하류층 거리를 대조하는 것처럼,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선과 호랑이를 대조합니다.
※ 수마트라 호랑이 사진 출처: Auckland Zoo,
https://www.aucklandzoo.co.nz/get-involved/sumatran-tiger-conserv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