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이 지구와 인류 문명을 떠나는 이유 본문
[네, 그렇습니다. 왜 자꾸 SF 소설이 아득한 우주 너머로 탐험하고 싶어할까요?]
고대 폴리네시아 항해사들부터 중국 정화 함대와 대항해 시대, 알렉산더 훔볼트나 알프레드 월리스 같은 과학자들, 스푸트니크 인공 위성과 트리에스테 잠수정, 보이저 무인 탐사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험 관련 서적들은 작은 돛단배부터 시작하고 장대한 우주 항해로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어떤 탐험 서적들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할 거라고 예상하고 아서 클라크 같은 작가를 언급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탐험 서적들은 SF 소설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이런 유구한 과정을 볼 때마다, 저는 SF 소설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특징들 중 하나가 공간적인 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돛단배, 범선, 증기선, 심해 잠수정, 인공 위성, 유인 우주선과 우주 정거장, 우주 무인 탐사선이 증명하는 것처럼, 기술이 발달할 때마다, 인류는 머나먼 곳을 바라봤습니다. 기술이 발달할 때마다, 인류는 새로운 대륙을 찾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왜 인류가 항상 다른 곳으로 진출할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정복, 개척, 연구, 조사, 순수한 호기심. 예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탐험을 대대적으로 다뤘을 때, 탐험 유전자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인류에게 탐험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탐험 유전자는 그저 가설일 뿐이고, 증명된 이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탐험 유전자가 존재한다면, 그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본능이 존재한다면, 인류는 계속 지구에 머무르지 않을 테고, 언젠가 생명의 요람을 벗어나고 싶어할 겁니다. 그건 절대 쉽지 않겠죠. 우주 정거장은 꽤나 벅찬 사업입니다. 외계 식민지나 다른 궤도 주거지나 머나먼 우주 항해는 그저 망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외계 식민지나 우주 항해가 훨씬 로망스러운지 모르죠. 그래서 결국 SF 소설은 우주를 이야기하는지 모르죠.
SF 울타리 안에는 여러 소재들이 존재합니다. 인공 지능, 돌연변이 괴물, 첨단 디스토피아, 인조인간, 거대한 전염병, 해일 같은 자연 재해, 새로운 진화, 기타 등등. 때때로 이런 소재들은 세상을 뒤집고 독자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거대한 전염병이 인류를 쓸어버리거나 인공 지능이 찬란하게 개화할 때, 독자는 머릿속이 거꾸로 뒤집힌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경이감 때문에 SF 소설을 읽는다고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이 문명 세계 안에서 벌어진다면, 뭔가 좀 부족할지 모릅니다.
저는 SF 소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회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공 지능이나 돌연변이 괴물, 인조인간은 인간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은 인간을 반영하고 인간을 회고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전염병이나 해일은 엄청난 비극들을 연이어 불러올 수 있습니다. 비극들이 일상을 두들길 때, 사람들은 훨씬 솔직해질 테고 허위적인 가면을 벗겠죠. 그런 장면을 볼 때, 독자는 인간이 누구인지 회고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감성들 때문에 SF 소설이 인기를 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SF 소설이 훨씬 더 멀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회고하고 싶다면, SF 소설은 문명 세계에서 안주해서는 안 될 겁니다. 거대한 전염병이 인류를 쓸어버리거나 인공 지능이 찬란하게 개화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문명 세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입니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고 연이어 죽어간다고 해도, 그건 문명 세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혼란스럽고 어지럽다고 해도, <스탠드> 같은 소설은 문명과 일상을 꾸준히 노래합니다. <뉴로맨서> 같은 소설은 정말 감동적이나, 가상 공간이나 첨단 디스토피아 역시 문명 세계에 국한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돌아보고 싶다면, 문명 세계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숲 속에서 숲 전체를 바라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숲 전체를 바라보고 싶다면, 인간은 숲을 멀리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숲을 나와야 합니다. 그때 인간은 숲이 무슨 모양인지 제대로 알 수 있겠죠.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이 정말 인간을 바라보고 회고하고 싶다면, 문명 세계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문명 세계를 이야기하는 SF 소설이 인간을 제대로 회고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명 세계 안에서 SF 소설은 충분히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문명 세계를 떠난다면, 인간을 훨씬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때때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조용한 장소를 찾습니다. 이건 그것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인간이 여행할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열대 밀림이나 깊은 동굴이나 혹독한 극지나 어두운 해저나 머나먼 우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역행하는 여름>이나 <아홉 생명>이나 <기시감>이나 <솔라리스> 같은 소설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비경 탐험이나 우주 항해는 다른 소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적막하고 광활한 비경과 우주는 인공 지능이나 개조 생명체 같은 소재를 훨씬 부각할 수 있겠죠. 적막한 우주에서 오직 우주선 인공 지능과 인간만 존재한다면, 그 SF 소설은 인공 지능과 인간을 훨씬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겠죠.
이는 다른 소재들이 비경 탐험이나 우주 탐사보다 뒤쳐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공 지능이나 개조 생명체나 첨단 디스토피아 역시 중요한 소재입니다. 무엇보다 진화하는 인류는 가장 중요한 소재겠죠. 어쩌면 미래에 인류는 다른 생명체가 될지 모릅니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인류는 인류라는 생물종에게서 벗어날지 모릅니다. 인류는 유년기를 끝내고 한층 성숙해질지 모르죠. 그건 너무 지나친 망상일지 모르나,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습니다. 그런 소재는 비경 탐험이나 우주 탐사보다 중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SF 소설이 문명 세계나 지구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가 그저 문명 세계만 이야기했다면, 규모가 좀 더 작았을지 모릅니다.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이 외계를 말하지 않았다면, 감동이 훨씬 줄어들었을지 모릅니다. <블라인드사이트>가 감탄스러운 이유는 이 소설이 거창한 외계 생명체를 보여주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기시감>이 지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로가디아가 그렇게 돋보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SF 소설이 물리적인 이동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SF 소설이 품을 수 있는 미덕일 겁니다.
※ 개인적으로 비경 타험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는 낯선 생태계라고 생각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인류 탐사대가 새로운 생태계를 발견한다면, 그들은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가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고찰할 수 있겠죠. 그런 고찰은 색다른 전망을 제시할 테고요. 아니면 우주 공간에서 인류 개척자들이 인공적인 폐쇄 생태계를 만들 수 있고요. 현실 속에서 수많은 과학자들은 야생으로 떠나고 또 다른 존재들(야생 동식물들)을 바라봅니다. 이게 SF 쪽으로 확장된다면, 이야, 그건 정말 근사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