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 미아>, 무한한 공간 속의 작은 티끌 본문
웹툰 <우주 미아>는 2015 우주 특집 단편 만화들 중 하나입니다. 2015년에 네이버 만화가 우주 특집 만화를 주최한 것 같습니다. 네이버가 이런 행사를 주최한 이유는…. 글쎄요, 2014년에 남한에서는 아주 어마어마한 SF 영화가 흥행했죠. 영화 <인터스텔라>는 극장 좌석을 동내는 기염을 토했고, 수많은 사람들은 <인터스텔라>가 완성도 높은 하드 SF 영화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네이버 만화는 그런 열풍을 이어가고 싶었는지 모르죠. 저는 <인터스텔라> 열풍이 꽤나 거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핵심은 영화가 아니라 소설에 있을 테고, 따라서 SF 소설들이 별로 열풍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 문화는 사이언스 픽션의 핵심에 쉽게 닿지 못하겠죠. 국내 사회는 아직 그런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한 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이런 우주 특집 만화들이 나오는 행사는 꽤나 반갑죠. 재미있는 만화들이 많고, 그것들 중 개인적으로 저는 <우주 미아>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제목처럼 <우주 미아>에서 주인공 우주 비행사는 우주를 떠도는 미아가 됩니다. 문제는 우주 미아는 영원한 미아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죠. 우주가 무한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우주가 무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주 미아를 쉽게 구하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 미아는 우주 미아보다 훨씬 낫죠. 만약 누군가가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다면, 적어도 외계 행성에서 그 사람은 생존할 수 있고, 구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 행성이 어느 정도 (지구와 비슷한) 생태계를 갖췄다면, 생존 확률과 구조 확률은 훨씬 올라가겠죠. 수많은 작가들은 그런 외계 행성 미아를 그립니다. 아예 어떤 작가는 노골적으로 우주 판본 로빈슨 크루소를 쓰죠. 하지만 우주 미아는 다릅니다. 무한한 우주 속으로 우주 미아는 끝없이 밀려나갑니다. 우주 미아는 멈추거나 움직이거나 방향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주 미아는 무한한 우주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우주라는 아주 무한한 공간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유는 (극단적인 폐소 공포증과 대비되는) 방대한 개방 공포증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너무 공간이 넓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 공간을 두려워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방대한 공간이 경외적이라고 생각할 테고, 그런 사람은 아서 클라크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르죠. 하지만 인간은 지상에 두 발을 딛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2차원적이에요. 솔직히 이렇게 어마어마한 공간이 (공포 없이) 순수하게 동경이나 선망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인간이 우주를 표현할 때 거기에 공포가 깃든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가 동경하는 우주는 우주라는 공간이 아니라 우주선이라는 진보겠죠.
이런 우주 미아를 볼 때, 저는 J.R.던이 쓴 <모든 정령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이 단편 소설은 우주 미아를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우주 광부들은 일부러 우주 공간을 도약합니다. 아무 장비나 탈것 없이, 오직 우주복만 입고, 그들은 우주 공간을 누빕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스릴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이런 시도는 무모합니다. 가끔 누군가는 우주 정거장에 도착하지 못하고 무한한 우주 속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정령들의 이름>은 이런 우주 미아와 신비로운 어떤 존재들을 결합하고, 인상적인 추리 소설이 됩니다.
사실 이런 우주 미아는 신비로운 외계인과 기이한 조우를 표현하기에 좋은 소재일 겁니다. 만약 우주 비행사가 우주로 떨어졌고 분명히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누군가가 우주 비행사를 구해준다면? 우주 비행사는 이런 기적에 깜짝 놀랄 겁니다. 우주 비행사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누가 자신을 구했는지 궁금해할 테죠. 그때 외계인들이 나타난다면, 그건 꽤나 극적인 조우가 되겠죠. <모든 정령들의 이름>은 그런 내용을 다루고, 주동근 작가가 그린 웹툰 <우주 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주 미아라는 무한한 공포는 신비하고 극적인 미지와의 조우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외계인들과 조우한 이후 우주 비행사가 뭐라고 느낄까요. 우주 비행사가 외계인을, 비인간 존재를, 자신과 다른 존재를 뭐라고 느낄까요. 우주가 넓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해석들이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우주 미아>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간을 이용해 인류가 정말 우주 속의 티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군요. 공간이 무지막지하게 넓다면, 당연히 시간 역시 광범위한 역사를 자랑하겠죠. 우리는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엄청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류 역시 그저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합니다.
물론 어떤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인류가 유일무이한 지적 존재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자랑스럽다고 여길 수 있으나, 한편으로 이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가 유일한 지적 존재라면, 그건 꽤나 외롭고 서글픈 결론일 겁니다. 우리가 뭐라고 결론을 내리든, 분명히 이 우주는 방대하고, 우리는 그런 우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지적 존재이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저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그걸 지적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솔직히 사이언스 픽션은 그걸 지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티끌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저 절망하고 포기해야 할까요. <우주 미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우주가 우리를 보잘것없다고 취급한다고 해도, 우리는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어요. 물론 이 방대한 공간 속에서 개인적인 투쟁은 의미를 잃을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서로를 이해할 때, 우리는 어마어마한 우주에게 저항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해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서로 손을 잡는 것. 어쩌면 <우주 미아>는 그런 주제를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이건 꽤나 아서 클라크 같은 주제이고,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다소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우나) 나름대로 근사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