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중세 판타지와 비경 탐험 소설의 지도 본문
[자주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들은 지도들을 집어넣습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은 그렇지 않죠.]
중세 유럽 서사 판타지 소설에서 지도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수많은 중세 판타지 소설들은 첫장에 지도를 집어넣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판타지 독자들은 먼저 지도를 만납니다. 내용을 읽기 전에 판타지 독자들은 가상의 세계를 만납니다. 저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입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보여주기 전에 숱한 중세 판타지 소설들은 지도를 보여줍니다. 일부러 지도를 건너뛰지 않는다면, 내용을 머릿속에 담기 전에 독자는 지도를 머릿속에 담아야 합니다.
이런 첫째 조우는 이후 독자에게 여러 영향들을 끼칠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호빗>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언제나 지도를 염두에 뒀습니다. <호빗>은 빌보 배긴스와 회색의 간달프와 소린과 12가신들이 호비튼을 떠나고 외로운 산맥에 도달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기나긴 여정 동안 그들은 여러 장소들을 들립니다. 당연히 그런 여정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많은 판타지 독자들은 지도가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합니다. 지도는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과정을 규정할지 모릅니다.
이는 중세 판타지가 이야기하는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은 주연 등장인물들이 어딘가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호빗>에서 빌보 배긴스가 호비튼을 떠나고 임라드리스나 어둠숲이나 호수 마을에 방문하고, 외로운 산에서 황금용 스마우그를 만나고, 다시 돌아온 것처럼. 중세 판타지 소설들은 장대한 여정을 포함하고, 따라서 지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겁니다. 지도는 어떻게 그런 여정이 펼쳐지는지 알려주는 길잡이이고 안내원입니다.
누가 이런 지도를 먼저 판타지 소설을 집어넣기 시작했을까요? 누구 때문에 판타지 소설들이 지도를 집어넣기 시작했을까요? 여러 평론가들은 <호빗>이나 <반지 전쟁>이 시초라고 거론합니다. <반지 전쟁> 이전에도 장르 소설들은 지도를 집어넣었습니다. 하지만 <반지 전쟁>은 지도를 그리는 유행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이런 평가가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지 전쟁>은 정말 지도를 매력적으로 활용합니다. 뭐, 비단 지도만이 아니겠죠. 언어, 종족, 역사, 족보 등등 <반지 전쟁>은 숱한 설정들을 자세하게 꿰뚫었고 지도는 그것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은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고, 그래서 지도는 가장 중요할 겁니다. 설사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지도의 중요성은 뒤쳐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지도를 집어넣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소설을 쓰기 전에 방대한 세계를 조성하고 지리를 파악하고 가상의 지도를 만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방대하게 구상한다고 해도, 어떤 부분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는 (그 부분이 소설에 나오지 않음에도) 그 부분을 묘사한 지도를 일부러 집어넣습니다. 이는 지도가 일으키는 부작용(?)이겠죠. 이는 모든 중세 판타지 작가가 지도를 중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몇몇 판타지 작가가 이런 유행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소설에 지도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지도를 요구한다고 해도, 그들은 지도를 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작가는 독자에게 지도를 그려달라고 요구하고, 그걸 다른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지도를 그린다고 해도, 어떤 작가들은 지도를 나중으로 미룹니다. 조지 마틴은 방대한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썼으나, 처음에 지도를 구상하지 않았습니다. 지도 없이 조지 마틴은 소설을 썼고, 필요할 때 몇몇 부분을 구상했습니다. 이게 사실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건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 없는 카더라 정보일지 모르죠. 하지만 만약 조지 마틴이 먼저 소설을 쓰고 나중에 지도를 구상했다면, 이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중세 판타지 소설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왜 SF 작가들이 지도를 집어넣지 않을까? SF 울타리 안에는 비경 탐험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장르 이름처럼 비경 탐험은 탐험을 이야기합니다. 비경 탐험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초기 사이언티픽 로망스와 동행했고, 사실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이끈 주역들 중 하나입니다. <그녀(동굴의 여왕)>나 <아서 고든 핌의 모험> 같은 유사 SF 소설들이 있고, <잃어버린 세계>나 <지구 속 여행> 같은 본격적인 SF 소설들이 있죠.
하지만 비경 탐험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지도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광기의 산맥>에서 아주 거창한 지하 도시를 묘사했으나, 지도를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물론 <광기의 산맥>은 장편 소설이 아니죠. 하지만 본격적인 SF 장편 소설들이 지도를 집어넣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세 판타지 작가들은 열심히 지도를 집어넣었으나, SF 작가들에게 지도는 중요하지 않은 요소입니다. 사실 지도 그리기는 아주 재미있는 작업일 겁니다. 가상의 세계를 조형한 이후 창작가는 지도를 이용해 가상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업에 너무 빠지기 때문에 작가 지망생들은 소설보다 지도를 더 중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경력이 있는 판타지 작가들은 지도 그리기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충고하죠.
하지만 SF 작가들은 지도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SF 작가들 역시 설정 놀음에 빠질 수 있으나, 지도를 소설에 적극적으로 집어넣지 않습니다. 솔직히 지도 따위(?)가 없다고 해도, <잃어버린 세계>나 <지구 속 여행>이나 <광가의 산맥>은 재미있습니다. 비경 탐험 소설은 오픈 월드 게임이 아닙니다. <폴아웃> 같은 게임은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재미를 선사하나, 비경 탐험 소설이 선사하는 재미는 그것과 다릅니다. 비경 탐험은 새로운 생물상이나 문물을 접하기 위한 매개체일 겁니다. 작가가 장대한 탐험이나 기나긴 여정을 묘사한다고 해도, 작가에게 무조건 지도를 그릴 이유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