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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환경 사회학과 생태학의 시선 차이

OneTiger 2017. 5. 28. 20:12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의 한 장면. 이런 장면은 생태학이 될 수 있으나, 환경 사회학이 되지 못하겠죠.]



종종 자연 과학자들은 정치나 경제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정치 체제가 과학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후 변화는 과학자들의 소관이기도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의 정치적 화제이자 대기업들의 경제 문제도 될 수 있죠. 어느 인터뷰에서 칼 세이건은 정치인들도 인지상정 때문에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노력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 과학자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견해에 그칠 뿐이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자들이 무지하다고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칼 세이건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서 클라크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정말 무한한 깊이를 느끼곤 합니다.)


사실 정치나 경제, 철학 분야는 자연 과학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회 과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자연 과학자들도 사회 체계의 모순을 본질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으나, 자연 과학자의 업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으로 퉁치곤 합니다. 좋은 정치인을 뽑아야 한다거나, 박애 정신이나 인도주의에 희망에 걸거나, 우리 인류 모두가 겸손해져야 한다거나 등등….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진짜 기득권들은 그런 과학자들의 연설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겁니다. 기득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잇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과학자의 연설은 일반 대중들만 감동시킬 뿐입니다.



자연 과학 서적을 찾아보면, 과학자들은 인류의 오만함을 경고하거나 인류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인류는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두 맞는 이야기이고 모두 좋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떠올리곤 합니다. 우주는 정말 장대합니다. 이 지구는 그 장대한 우주 속에서 아주 작고 창백하고 푸른 점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칼 세이건은 지구를 푸르고 창백한 점이라고 불렀겠죠.


하지만 아무리 과학자들이 감동적으로 연설해도 그 연설은 그저 대중들만 감동시킬 뿐입니다. 대중들만 착하게 살자고 다짐할 뿐이죠. 물론 사회 체계가 착취적이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착취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회를 떠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사회의 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만약 사회가 개인에게 착취를 강요하거나 동참하라고 요구한다면, 개인은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게다가 사회 체계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저런 계급이나 사회 체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게 살라고 말하고 그저 겸손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런 연설은 훌륭하지만, 명백한 한계 또한 존재합니다. 표면만 훑어보고 본질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겸손해져도 기득권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득권들은 어떻게든 이윤을 축적하고 노동력이나 자연 환경을 착취할 생각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든 말든, 기득권들은 우리를 가혹한 위기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커다란 위기가 닥치면, 각 개인들은 그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착하고 겸소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말 정치와 경제를 바꾸고 싶다면, 그만큼 급진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보다 평등한 상황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급진적인 정책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 누군가는 이득을 잃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득은 부당한 이득입니다. 애초에 체계 자체가 착취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득이 생겼을 뿐입니다. 만약 4대강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토건족들은 이득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진행되었고, '부당하고 착취적인' 이득이 생겼죠.



그런 이득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 이득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치와 경제도 바뀔 겁니다. 그런 이득이 고스란히 존재한다면, 다른 것들 또한 바뀌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득을 움켜쥔 자들은 절대 자신의 몫을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혹은 아주 조금, 일정 부분만 양보하겠죠. 노동 조합이나 환경 단체는 그런 일정한 양보를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따라서 부당한 이득을 없애고 싶다면, 치열한 싸움 또한 터지기 마련입니다. 싸움은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죠. 저항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도 잘 모를 겁니다. 환경 사회학과 생태학은 모두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지만, 환경 사회학자와 달리 생태학자는 계급 투쟁이나 노동 해방을 제대로 모를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계급 투쟁이나 노동 해방이나 인종적 환경 오염은 환경 사회학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급 투쟁을 외치는 좌파적인 자연 과학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연 과학자는 그런 것들을 잘 모르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자연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자연 과학자의 감동적인 연설을 실현시키고 싶다면,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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