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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계급이라는 뿌리 깊은 관념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계급이라는 뿌리 깊은 관념

OneTiger 2017. 6. 3. 20:00

소설 <붉은 별>은 화성인들의 사회를 둘러보는 지구인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이 지구인은 화성인들의 사회주의 체계에 감탄하고, 지구인들의 사회주의 혁명에 안타까움을 느끼죠. 선구적인 화성인들의 사회주의와 달리 지구인들의 사회주의는 아직 어린애처럼 어설프게 보이거든요. 그런데 지구인 주인공이 화성인들의 사회를 둘러볼 때, 사람들은 계급 문제를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구인 주인공이 지구인들의 혁명을 지켜볼 때, 계급 투쟁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부상합니다. 농민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이 좀 더 진보적으로 각성했을 때, 비로소 혁명의 불길이 번질 수 있었죠.


이와 달리 지구인 주인공과 화성인들은 사적 소유나 계획 경제, 자원 현황만 논할 뿐이고, 계급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화성인들에게서 계급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성에도 고위 직급이 있지만, 이들은 관리할 뿐이고 통치하지 않아요. 통치자가 아니라 관리자죠. 이런 계급 문제는 사회주의 SF 소설에서 아주 중요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붉은 별>에서 그런 문제는 (지구인들의 혁명 부분을 제외하면) 크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아마 이는 작가가 계급 투쟁보다 계획 경제의 장점이나 산업 발전, 생산의 한계, 자연 생태계 보존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작가는 계획 경제가 실현된다면 계급은 자연히 도퇴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구태여 계급 격차를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겠죠. 이런 모습은 <파리 코뮌>이나 <카탈로니아 찬가> 같은 창작물과 다릅니다. <파리 코뮌>이나 <카탈로니아 찬가>는 계급이 없는 조직을 강조하고, 계급을 타파하자고 외칩니다. 물론 <붉은 별>은 미래를 논하는 사이언스 픽션이고, <파리 코뮌>과 <카탈로니아 찬가>는 과거 역사를 기록한 시대극입니다.


화성의 사회주의 체계는 이미 계획 경제를 완성했기 때문에 계급 문제를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어요. 반면, <파리 코뮌>이나 <카탈로니아 찬가>의 사회주의 군대는 혁명을 진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계급을 타파하자고 외쳤겠죠. 어쨌든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붉은 별> 같은 사이언스 픽션이든 <파리 코뮌> 같은 시대극이든,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나, 모두 계급을 없애기 위해 애씁니다. 사실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아울러 생태주의도)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립니다. 계급이 없는 세상이죠. (생태주의는 인간의 계급만 아니라 생물 종의 계급까지 없애기 원하고요.)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 생태주의의 바람과 달리 이 계급이라는 관념은 상당히 뿌리가 깊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쉽게 뽑히지 않아요. 사람들은 억압이나 통제를 싫어하는 듯 보이지만, 계급 지배를 용인하거나 간과하곤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영웅 신화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이끌어주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나타나면, 그 인물에게 열광합니다. 그 인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무조건 따릅니다.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우파든 좌파든, 이런 성향은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듯합니다.


이게 심화되면 파쇼 현상이 나타나죠.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독재해도 그걸 무조건 따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뭔가를 고치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대중들이 민주적인 해결책을 원하면, 이런 사람들은 왜 감히 지도자에게 덤비느냐고 반문합니다. 노예처럼 보이지 않지만, 정신 상태는 노예나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뭔지 잘 모를 겁니다. 그냥 남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기 때문에 그냥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다닐 뿐이겠죠. 그 자신은 인민으로서 주권을 전혀 행사하지 않음에도.



이런 현상은 비단 정치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이 사라지면 당장 세상이 망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기업이 이 세상의 확고부동한 절대 진리인 것처럼 말합니다. 대기업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런 사람들은 맹목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대기업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대기업은 그저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차지한 집단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사라져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대기업이 없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생산 수단이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기업이 없어도 공동체 스스로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습니다. 뭐, 대기업이 없는 세상은 SF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과도한 상상력이라고 치죠. 하지만 저런 사람들은 대기업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듯합니다. 사실 과거의 노예들이나 하인들도 무조건 자유와 평등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굴종을 선택했죠. 나 자신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을 확립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는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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