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보다 오래 생존했나 본문
"마르크스주의는 1990년대에 멸망했으나, 페미니즘은 아직 살아있고 승리를 거뒀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보다 위대하다." 어떤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1990년대에 정말 멸망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착취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사회주의 철학 중에서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비판에 특화했습니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의 최고 대작은 <자본론>이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항상 어떻게 자본주의가 작동하는지 연구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좌파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 모두가 마르스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경제학적이든 철학적이든) 학문적 성과를 응용하곤 합니다.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21세기 현대 좌파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그래서 저는 마르크스의 유산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이 무너졌을 때 누군가가 역사적 종언 운운했지만, 그 직후 엄청난 세계화 반대 시위가 열렸죠. 솔직히 소련만이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이라고 말한다면, 마르크스의 그 폭넓은 연구와 가르침에서 눈을 돌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두었나요. 음, 만약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은 축하를 받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여전히 민영화나 기후 변화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민영화나 기후 변화는 수많은 빈민들을 고통에 빠뜨릴 테고, 그 중에 여자들도 많을 겁니다. 그런 가난한 여자들은 성 노예가 되거나 남자들에게 온갖 수탈을 당하겠죠. 글쎄요, 제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보다 위대하거나 잘났다고 말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똑같은 좌파입니다. 역사적으로 서로 많이 싸우고 배척하고 으르렁거렸으나, 어쨌든 지금은 둘 다 똑같은 좌파입니다. 그리고 좌파는 기후 변화 같은 전지구적이고 아주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만약 페미니즘이 정말 마르크스주의보다 잘났다면, 그냥 잘났다고 뻐길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자본주의와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기후 변화 같은 거대한 악에 맞서야 할 겁니다. 기후 변화처럼 전지구적인의 위험이 막강하다면, 좌파 중에서 누가 누구보다 잘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좌파의 대표적인 사상입니다. 좌파 사상은 다양하지만, 믾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그 중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좌파를 대변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무정부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역시 좌파 사상 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인지도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저 페미니스트가 구태여 페미니즘을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바꾸기 위해 저렇게 말했을지 모르죠.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고정 관념도 깨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페미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나 뭐가 더 잘났다고 말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과 한계를 지적할 수 있으나,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는 평가는….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고백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의 전부라는 오류에 빠진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사실 기득권들은 이런 개념을 아주 좋아하죠. 사람들이 '좌파=독재'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뜻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걸 지지함에도!)
흔히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혼동하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연히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는 사회주의자들도 많을 겁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로 이어지거나 스탈린이나 김일성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사실 사회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개념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냥 사회주의가 독재라고 생각하거나 그나마 좀 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계획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또 계획 경제는 뭘까요.
이런 사람들은 자유 시장에서 국가의 계획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대국들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약소국들의 시장을 파괴하거나 정부와 기업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노동 조합을 파괴해도 계획 경제가 사회주의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죠. 게다가 계획 경제보다 노동자 평의회 등이 사회주의의 진짜 핵심 가치임에도 오히려 계획 경제가 노동자 평의회보다 더 널리 알려진 개념 같습니다. 아마 소련이 자기네를 사회주의의 큰 형님이라고 열심히 선전했기 때문이겠죠. 그런 선전과 홍보가 무조건 옳은가요. 그렇다면 북한의 정식 명칭도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니까 민주주의도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겠군요.
사실 페미니즘이니 사회주의니 자유 시장이니, 이런 용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용어들이 어떤 정책이나 구조나 체계를 지향하는지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