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모두 똑같지 않은 국민들 본문
소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종종 냉전 시대의 산물로 불리곤 합니다. 물론 작가 잭 피니는 이런 해석을 부정했다고 합니다. 잭 피니는 그저 외계인들의 은밀한 침입을 그렸을 뿐이고, 이건 공산주의자 색출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부정했음에도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냉전 시대의 산물로 불리곤 합니다. 그 당시 시대상을 너무 잘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냉전 시대에서 자유주의 진영은 공산주의 진영의 침투를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적은 그저 외부에서만 침략하지 않습니다. 내부로 침투하고,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공산주의 진영의 진짜 무기는 그저 미사일이나 잠수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상이 무기였습니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좌파의 주요 무기입니다.) 자유주의 진영은 '불순한 사상'이 퍼지는 걸 두려워했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작품은 이런 두려움을 희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 역시 (작가가 부정했음에도) 그런 두려움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외계인들이 저 우주 밖에 침략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계인들은 최첨단 병기를 동원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우주 전쟁>의 화성인이 삼발이를 동원한 것처럼 대대적인 침략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다릅니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외계인의 침략을 이야기하지만, 외계인들은 대대적인 침략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삼발이 같은 최첨단 병기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인간처럼 변하고 인간처럼 행동합니다. 침략은 외부적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대대적인 폭력은 끔찍하고 무섭지만, 이런 내부적인 침투는 소름이 끼치고 오싹합니다. 하지만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이런 내부적인 침투를 처음 묘사한 소설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처럼 변하는 외부인'이라는 소재는 예전에도 즐겨 쓰였습니다.
심지어 신화와 전설, 민담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미 1938년에 존 캠벨 주니어가 <거기 누구요?>를 썼습니다. 이 영화는 존 카펜터의 SF 영화로 잘 알려졌죠. 더군다나 외계인 이외에 로봇이나 돌연변이 등도 인간으로 위장하곤 합니다. 아마 '인간으로 위장하는 외부 침입자'를 골라보면, 그 목록이 길게 늘어질 겁니다. 그런 걸 논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지만, 여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닙니다. 적은 외부에서만 침입하지 않습니다. 내부에도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논리와 비유를 식민지 지배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식민지는 외부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부에도 존재합니다.
식민지는 흔히 '외부에 세워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그렇죠.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갈라놨고 착취했습니다. 콩고는 대표적인 외부 식민지입니다. 이런 식민 지배의 아픔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죠.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 통치했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부단히 싸웠습니다. (물론 그렇게 싸워봤자 독립은 허망한 꿈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죠.) 로자 룩셈부르크나 블라디미르 레닌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식민지가 자본주의 체계의 확장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쟁탈이 치열해진다면 자본주의 체계가 무너질 거라고 분석했으나, 저는 그 분석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계는 식민지 쟁탈 속에서도 굳건히 위기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식민지 이론은 완전히 틀리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외부적인 식민지만 아니라 내부적인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이 외국의 노동자와 환경이 아니라 자국의 노동자와 환경을 착취한다면, 그건 내부적인 식민지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내부적인 식민지는 신자유주의 열풍으로 나타났고, 덕분에 노동 운동이나 환경 운동은 급속히 약해졌습니다.
굶주리는 밑바닥 사람들은 이런 내부적인 식민지의 상징일 겁니다. 처참하게 오염된 자연 환경 또한 내부적인 식민지를 대변합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내부적인 식민지를 부정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유가 별로 논리적이지 않다고 부정할지 모릅니다. 저는 내부적인 식민지라는 비유가 현실을 아주 제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이 비유가 틀렸다고 가정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대한 기득권이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을 착취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국민이라고 해도 그들은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강대국이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기득권은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국가와 국민을 부르짖지만, 국가와 국민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입니다. 똑같은 국민이라고 해도 대기업 회장과 중소 기업의 과장 직급과 일용직 노동자와 굶주리는 빈민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기업 회장이나 중소 기업의 과장 직급과 달리 일용직 노동자와 빈민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생명줄을 부여잡습니다. 그들의 생존은 위기에 빠졌고,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릅니다. 국민은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대선이 있었기 때문에 온갖 홍보 구호를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후보들은 국가와 국민을 부르짖었습니다.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구호와 국민을 위하겠다는 구호가 남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부적인 식민지를 말하는 구호는 거의 없었습니다. 유일무이하게 정의당 후보만 그런 구호를 외쳤더군요. 나라와 국민이 아니라 노동을 말했거든요. 내부적인 식민지가 엄청난 비극을 불렀음에도 정의당 후보를 제외한 대부분 후보들은 나라와 국민만을 말했죠. 이미 몇 번씩 말했지만, 국민은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치명적인 생존 위기에 빠지죠. 그걸 지적하는 후보는 정의당 후보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정의당 후보를 많이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희망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