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문과의 말빨과 이과의 엄중함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문과의 말빨과 이과의 엄중함

OneTiger 2017. 4. 19. 20:00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문과는 말빨이 좋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이과는 엄중한 사실만을 말하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문과는 말빨이 좋기 때문에 출세를 잘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에요. 소설 속의 어떤 이과 남학생이 문과 여학생 때문에 투덜거렸죠. 이게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냥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등장인물들이 전부 작가를 대변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 대사가 누구의 생각이든 꽤나 중대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런 오해를 몇 번 들어봤습니다. 문과는 말빨로 모든 다 해먹기 때문에 쉽고 이과는 엄중한 증명 때문에 어렵다거나 문과는 말빨로 쉽게쉽게 살아가지만 이과는 일일이 모든 걸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수난의 연속이라거나 문과는 관념적이지만 이과는 유물적이라거나. 하지만 정말 문과는 무조건 좋은 말만 떠들고, 말빨로 좋게좋게 모든 걸 해결할까요. 글쎄요, 우선 만약 말빨이 문과의 전부라거나 문과가 그렇게 부드럽다면, 철학은 아주 쉽고 인기 많은 학문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문과를 대표하는 철학의 이미지가 뭘까요. 딱딱하고 논리정연합니다. 철학을 부드럽다고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떤 철학책들은 너무 어렵기로 알려졌고,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조차 없어요. 요즘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이런 쪽으로 유명한 듯.



게다가 문과든 이과든 쉬운 건 없습니다. 결국 말빨이 좋고 아부를 잘 하면 출세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체제를 거스르는 사람은 분야에 상관없이 밀려나기 마련이죠. 바뵈프나 블랑키를 보세요.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는 저널리스트였습니다. 네, 문과생이죠. 하지만 이 사람의 최후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좌파 성향이 꽤나 강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바뵈프를 체포했고 단두대로 보냈어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어떤가요. 이 양반은 "신도 주인도 없다!"고 외쳤고, 덕분에 당대 기득권의 미움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감옥에 끌려가거나 사형 선고를 받았죠. 바뵈프와 블랑키 이외에 더 많은 사람들을 거론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문과 출신' 좌파들은 기득권에 대항했고 밑바닥 사람들을 위했기 때문에 출세나 영예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 사람들 이외에도 좌파 성향의 문과 학자들을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어요.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였으나, 우파들에게 창녀라고 모욕을 당했고 두들겨 맞아 죽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고 혁명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육사 선생을 보세요. 이육사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문과죠. 하지만 이육사는 감옥에도 들락거렸고, 오죽하면 '264'가 죄수 번호나 감옥 번호라는 말까지 떠돌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문과가 말빨로 쉽게 술렁술렁 먹고 산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문과와 이과 중 누가 더 많은 수난을 당하는지 모르겠으나, 저런 철학자나 기자나 문학가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겁니다. 차라리 물리학 연구에 치중하는 쪽이 편하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갈릴레이처럼 수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죠.



문과든 이과든 출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을 때, 서울대병원의 어떤 의사가 부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죠. 그 의사가 왜 그랬을까요. 정말 의학적 분석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정말 엄중한 과학적 검사를 위해 그랬을까요. 아니죠, 이유는 뻔합니다. 이과 출신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진리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황우석 사태나 필트다운인 사태를 보세요. 우생학이나 사회 생물학 논쟁도 그렇죠. 이과라고 해서 항상 엄중함만 유지할 수 없어요. 필요하다면, 이과도 얼마든지 간에 붙거나 쓸개에 붙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출신 분야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향과 시각입니다. 누구를 바라보는가에 따라 문과도 가혹한 수난을 당할 수 있고 이과도 아부와 말빨로 먹고 살 수 있어요.


조지 오웰은 어느 사설에서 '철학자들은 혁명을 위해 죽지만,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대충 저런 내용일 겁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자의 대표로 꼽히는 것도 그렇고, <과학...좌파>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과 출신들도 얼마든지 좌파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그런 와중에 수난을 당할 수 있어요. 흠, 무장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였죠. 문과는 말빨만 번지르르하고 이과는 엄중하다는 오해만큼 문과는 혁명적이지만 이과는 사회를 외면한다는 오해도 심각할 겁니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얼만큼 사회의 부조리와 밑바닥 사람들과 동물들을 살피는가. 이 점입니다. 문과든 이과든 무지렁이든, 그게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회를 바라보는 창문은 그렇습니다.



어차피 <제노사이드>에도 인류학자가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문과죠, 하하. 그야말로 문과 캐릭터가 목숨을 걸고 공로를 세웠습니다. 뭐, 어차피 문과냐 이과냐 이걸 구분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해리 셀던과 심리 역사학은 문과가 아니라 이과 출신 소설가의 설정이잖아요. (음, 그리고 보면, SF 소설은 정말 문과와 이과의 교집합일지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