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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해저 2만리>의 세 가지 요소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해저 2만리>의 세 가지 요소

OneTiger 2017. 8. 8. 20:00

예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해저 2만리> 각본을 집필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싱어가 영화 <해저 2만리>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요즘에 관련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계속 추진 중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작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영화화가 계속 추진 중인 것 같습니다. <해저 2만리>는 상당히 유명한 소설이고, 그래서 각색물이나 리메이크 역시 상당히 많습니다. 아마 디즈니 실사 영화가 제일 널리 알려졌겠으나, 그 외에 다른 리메이크들도 많죠.


하지만 (디즈니 실사 영화는 물론이고) 이런 리메이크들이 정말 소설의 정수를 담았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해저 2만리>의 리메이크물을 많이 보지 못했으나, 줄거리나 관련 소감을 읽어보면, 이런 리메이크들이 소설의 정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듯합니다. 저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해저 2만리>는 상상 과학과 바다 전설을 합쳤고, 바다를 미래의 터전으로 전망했고, 제국주의에 분노하는 무정부적인 인물을 그렸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나와야 소설의 정수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아마 <해저 2만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상상 과학과 바다 전설의 만남일 겁니다. 소설 제목처럼 잠수함 노틸러스는 기나긴 해저 여행을 떠납니다. 노틸러스는 그저 바다 밑바닥을 둘러보지 않고, 온갖 신비하고 기이한 바다 전설을 만납니다. 바다 모험의 로망들을 지속적으로 자극하죠. 주연 인물들이 노틸러스에 타기 전에 이미 소설은 '거대한 바다 괴수'를 화제로 등장시킵니다. 선박들이 연이어 공격을 받았으나, 각국 정부는 누가 그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별별 목격담이 꼬리를 물었고, 언론과 대중은 정체 불명의 바다 괴수가 선박을 공격했다고 가정합니다.


거대한 바다 괴수는 바다 전설의 대표 주자이고, 이 소설은 그런 전설을 한껏 활용합니다. 사실 바다 괴수만큼 흥미로운 전설이 없습니다. 요즘에도 온갖 인터넷 등지에서 온갖 바다 괴수 소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공포를 자극하고, 21세기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 괴수에 끌려요. 소설은 첫머리부터 크라켄, 시서펜트, 레비아탄 같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사람들은 어떤 괴수가 등장할지 토론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바다가 거대하고, 그래서 거대한 바다 괴수가 분명히 배를 공격했을 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바다 괴수는 크라켄도 아니고, 시서펜트도 아니고, 레비아탄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만능 잠수함이었죠. 전설적인 바다 괴수가 잠수함으로 판명이 나는 순간, 바다 전설은 상상 과학으로 넘어갑니다. 바다 전설을 강조하는 문학들은 숱하지만, 이처럼 바다 전설을 상상 과학으로 넘기는 문학은 드뭅니다. 적어도 19세기에는 그런 문학들이 드물었을 겁니다.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이제 막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해저 2만리>는 스팀펑크와 해저 모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인류는 함부로 해저를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스팀펑크 잠수함 덕분에 주연 인물들은 온갖 진귀한 풍경을 구경합니다. <해저 2만리>의 상상력은 그저 바다 괴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노틸러스는 난파선을 방문하고 엄청난 보물들을 수집합니다. 네모 선장과 일행은 사라진 아틀란티스 유적을 방문합니다. (오오, 아틀란티스.) 그들은 바다 목장으로 소풍을 나가고, 비밀스러운 바다 통로를 지나갑니다. 거대한 갑각류나 사나운 상어와 싸우고, 난폭한 고래들을 도살합니다. 이런 장면들을 제대로 살리는 영화는 드물 듯합니다.



하지만 노틸러스는 그저 바다를 도피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네모 선장은 인간이 바다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자신은 제국주의 침략을 피해 해저로 내려왔으나, 미래 인류가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네모 선장은 바다를 그저 피난처가 아니라 새로운 터전으로 여깁니다. 네모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라는 공간에 온갖 희망과 이상을 부여합니다.


아로낙스 박사가 네모 선장에게 바다를 사랑하냐고 묻자, 네모 선장은 자신이 열렬히 바다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광신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요즘 속된 말로 네모 선장은 '바다 빠돌이'입니다. 단순한 해양 전문가가 아니라 광신적(?)인 바다 매니아입니다. 셜록 홈즈가 추리에 죽고 추리에 사는 추리광이라면, 네모 선장은 바다에 살고 바다에 죽는 바다 빠돌이입니다. 해저 도시, 바다 목장, 새로운 해양 인류…. 이런 것들이 네모 선장의 포부에 담겼습니다. 독자는 이런 것들을 읽는 순간, 전복적인 SF 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해저 2만리>의 재미는 그저 해저 소풍만이 아닙니다.



저런 원대한 포부와 이상은 이 소설의 규모를 키웁니다. 해저 소풍은 분명히 신비롭고 재밌지만, 노틸러스가 해저 소풍만 떠났다면 감동이 훨씬 덜했을 겁니다. 해저 소풍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래의 바다를 전망한 덕분에 <해저 2만리>가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로낙스 박사를 만날 때마다 네모 선장은 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시로 늘어놓습니다. 어떻게 인류가 바다를 이용할 수 있고 바다에 진출할 수 있는지 계속 늘어놓습니다. 아로낙스 역시 해양학자이기 때문에 네모 선장의 포부에 점점 빠져듭니다.


네모 선장은 19세기 인물이기 때문에 21세기 인류처럼 다채로운 바다 도시나 해저 도시를 꿈꾸지 못했습니다. 사실 쥘 베른 본인이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시대적인 한계를 넘지 못하곤 하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네모 선장은 바다를 폭넓게 이용하기 원했고, 네모의 이상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비록 소설 속에 해저 도시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네모 선장의 연설 속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광대하고 신비로운 해저 도시를 볼 때 네모 선장을 떠올려도 그건 하등 이상하지 않아요.



불행히도 네모 선장은 처절한 복수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네모 선장은 바다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원래 네모가 그렇게 바다를 좋아했는지 독자는 확신하기 힘듭니다. 노틸러스는 그저 심해 탐사선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 병기입니다. 노틸러스는 강력한 충각을 달았고, 특정 국가의 배를 무자비하게 공격합니다.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산 채로 수장되어도 네모 선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복수를 행할 때, 네모 선장은 거의 광인이 됩니다. 끔찍한 저주를 아무렇지 않게 퍼붓고 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아요.


하지만 네모 선장이 미치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잔악한 세상이 네모 선장을 그 지경으로 몰아갔죠. <해저 2만리>는 왜 네모 선장이 무서운 복수를 꿈꾸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아로낙스는 네모 선장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노틸러스가 어떤 배를 침몰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 리메이크들은 네모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고, 네모가 누구에게 복수하는지 밝히지 않아요. 무엇보다 네모 선장을 비정상적으로 복수에 굶주린 사람, 현대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모 선장은 그저 바다를 좋아하는 괴짜가 아닙니다. 바다를 좋아하는 괴짜가 네모 선장의 반쪽이라면, 다른 반쪽은 현대 제국주의 문명을 사무치도록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이처럼 네모 선장은 복잡한 인물이지만, 많은 리메이크들은 네모를 좀 더 단순하게 그리는 듯합니다. 아마 영화 제작진이나 드라마 제작진은 주인공이 현대 문명을 밑바닥까지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로 등장하기 원하지 않는가 봅니다. 그들은 관객이나 시청자가 좀 더 '정상적인 인물'에 공감하기 바라나 봅니다. 게다가 <신비의 섬>에 따르면, 네모 선장은 전형적인 유럽인이 아닙니다. 사실 <해저 2만리>도 네모 선장을 전형적인 유럽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리메이크들은 네모 선장을 유럽인으로 묘사합니다. 심지어 영국 배우가 네모 선장을 연기합니다. 진짜 네모 선장이 이를 안다면, 무덤 속에서 통곡할지 모르죠…. 비록 <해저 2만리>는 네모 선장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나, 현대 리메이크 작품은 적어도 19세기의 유럽 제국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할 겁니다. <신비의 섬>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모 선장은 혁명과 전복, 새로운 인간 유형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리메이크 작품들은 이런 혁명적인 성향이 부족합니다. 아마 영화나 드라마 투자자들은 '좀 더 얌전하고 체제에 순응적인' 내용을 쓰고 싶겠죠.



네모 선장은 얌전하지 않았고 체제에 순응적이지 않았습니다. 네모 선장은 게릴라 전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바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19세기 유럽을 진보적인 문명으로 여기지만, 네모 선장은 그 19세기 유럽을 짓밟고 산산조각 내기 원했습니다. 글쎄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투여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이런 전복적이고 불순한 내용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브라이언 싱어 역시 '좀 더 얌전하고 체제에 순응적인' 영화를 만들지 모르죠.


뭐, 어쩔 수 있나요. 일제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단순한 항일 투사로 변하는 것처럼 네모 선장 역시 전복적인 무정부주의자에서 단순한 폭력의 피해자로 바뀌는 듯합니다. 앞으로 영화가 나온다면, 제발 소설의 네모 선장을 제대로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 역시 제대로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21세기의 전망을 네모 선장에게 투입할 수 있겠죠. 게다가 시각 효과가 꽤나 발전했기 때문에 각종 진귀한 바다 풍경 역시 실감나게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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