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차이 본문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식물들이 뒤덮은 도시는 디스토피아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비슷하게 보입니다. 양쪽 모두 암울한 미래를 묘사하기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양쪽을 구분하는 기준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수학 공식처럼 답이 딱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창작물은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수 있고 동시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가령, <나는 전설이다>는 확실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습니다. 인류가 몽땅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에 인간이 단 한 명만 남았다면 확실히 그건 문명의 몰락이고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불릴 수 있겠죠. 하지만 <와인드업 걸>은 어떨까요. 엄청난 질병이 몰아쳤고 수많은 작물들과 가축들이 죽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었고 동력원이 없기 때문에 공장은 거대한 개조 코끼리를 이용해 기계를 돌립니다. 소설 속에서 경찰들은 화약 총기를 쓰지 않아요. 과연 이런 세상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일까요,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요. 혹은 양쪽 모두에 해당할까요. 아마 사이언스 픽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에 쉽게 답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양쪽 장르는 각각 자신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종말 문학이라고 불리거나 대재앙 소설이라고 불립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어떤 거대한 재앙을 묘사해야 합니다. 핵 전쟁, 치명적인 질병, 운석 낙하, 환경 오염, 지진이나 해일, 기타 여러 재앙들이 인류 문명을 덮쳐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무너져야 합니다. 문명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불리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문명이 무너져야 할까요. 만약 극소수의 생존자들만 살아남고 대부분 인류가 죽는다면, 그건 확실히 포스트 아포칼립스겠죠. <해변에서>는 분명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류의 절반 이상이 없어진다면, 그건 상당한 비극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의 나머지 절반은 남습니다. 만약 30억의 인류가 살아간다면, 70억에 비해 초라해 보이겠으나, 30억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핵 전쟁 때문에 40억 명이 죽는다고 해도 30억 명은 여전히 문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류 30억 명의 문명은 분명히 70억 명의 문명과 다를 겁니다. 따라서 (핵 전쟁이 터지고 40억 명이 사라진 이후에) 작가가 인류 30억 명의 문명을 묘사한다면, 그 작품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 이거 소설 이야기지만, 너무 끔찍하군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암울할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암울한 기운을 풍기지 않습니다. 어떤 소설들은 인류 멸망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바라봅니다. 어떤 소설들은 오히려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끝>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인류가 멸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주 경외적이고 전혀 암울하지 않습니다. 뭐, 사람들이 악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암울함이 끼어들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경외적입니다. <블러드 뮤직>도 마찬가지죠. <갈라파고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고요.
반면,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암울함을 풍기곤 합니다. 사실 디스토피아는 암울함을 풍기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암울한 미래가 아니라면, 디스토피아 소설을 쓸 이유가 없겠죠. 행복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많으나, 행복한 디스토피아 소설은 거의 없을 겁니다. 블랙 코미디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많지만, 어쨌든 결국 그것들도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디스토피아에서 대재앙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대재앙이 없어도 디스토피아는 성립합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그 문명이 인권을 억압한다면, 대재앙이 없어도 디스토피아는 탄생할 수 있습니다. 핵 전쟁이나 기후 변화, 치명적인 질병, 지진이나 해일, 운석 낙하 등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암울한 미래를 설정하기 위해 핵 전쟁이나 치명적인 질병을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게 없어도 디스토피아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대재앙이 터진다고 해도 그건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은 차지하지 못합니다. <화씨 451>에서 대재앙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에서 강철 도시는 전쟁 이후에 생겼다고 하지만, 그 전쟁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죠.
이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재앙을 묘사해야 하고, 인류 문명이 무너져야 합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암울하지만, 암울함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류가 멸종한다고 해서 반드시 암울할 이유가 없어요. 반면, 디스토피아 소설은 암울한 미래를 묘사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대재앙은 필수적이지 않아요. 이게 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커다란 차이겠죠. 물론 뚜렷한 장르적 기준은 없고, 장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저렇게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