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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의 리메이드와 개조 경비견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페르디도 기차역>의 리메이드와 개조 경비견

OneTiger 2018. 3. 4. 20:00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여러 리메이드들이 등장합니다. 리메이드는 일종의 개조 생명체입니다. 생체 개조 기술이 워낙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소설은 온갖 리메이드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요소처럼 그런 리메이들은 절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생체 개조 기술은 추악하고 비참한 결과물들을 낳았습니다. 윤락가에서 성욕을 채워주는 사람들, 귀족이나 권력자를 호위하는 경비병들, 축제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종족들.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19세기부터 SF 소설들은 생체 개조 기술을 별로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예전에 몇 번 말한 것처럼 메리 셸리, 허버트 웰즈, 로버트 스티븐슨, 오귀스트 릴라당,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조차 생체 개조 기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SF 소설은 그런 전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여전히 생체 개조에 부정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SF 소설이 생체 개조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생체 개조 기술은 긍정적인 진보가 될 수 있어요. 인류가 작물과 가축을 개량하지 않고 의술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꽤나 힘들게 살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유전자 조작 작물을 비롯한 각종 유전 공학은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죠. 특히,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유전 공학 역시 상업성에 물들 수 있고요. 여러 과학자들은 유전 공학이 안전하다고 말하나, 유전 공학이 기술적으로 안전하다고 해도, 그건 사회적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기득권은 유전 공학으로 배를 불릴 수 있고, 약자들을 착취할 수 있어요. 이미 자본주의는 숱한 부작용들을 낳았습니다. 유전 공학만 예외가 되지 못해요. 그래서 SF 작가들은 유전 공학에게 경고하고, <페르디도 기차역> 역시 그런 전통을 이었을 겁니다.


뭐, 차이나 미에빌은 역겨운 괴물을 좋아하는 작가이고, 설사 SF 소설들에게 유전 공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전통이 없다고 해도, 리메이드들을 괴상하게 묘사했을지 모르겠어요. 괴상한 리메이들은 절반쯤 작가의 취향일 겁니다. 생체 개조 기술 이외에 인공 지능 공학이나 다른 물리학이나 화학, 마법 역시 별로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아요.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 뉴크로부존은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장 같습니다. 거리와 건물과 강물은 오물들의 무덤이고, 끔찍한 리메이드들은 그런 지저분한 도시를 강조해요.



게다가 이 도시에는 그저 개조 생명체들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괴생명체들이 존재하죠. 그런 생명체들은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적입니다. 사람들이 야생에서 잡거나 길들인 생명체들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답게 <페르디도 기차역>은 다양한 괴생명체들을 선보입니다. 인류가 말이나 소나 코끼리를 탄 것처럼 괴생명체들은 탈것이 됩니다. 그것들은 마차를 끌거나 배를 끌거나 직접 사람을 태웁니다. 어느 것은 택시가 되고, 어느 것은 화물선이 되고, 어느 것은 공격 항공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좀 더 상상력을 뻗을 수 있을 겁니다. 뉴크로부존에는 개조 경비견이 존재할까요. 만약 뉴크로부존 사람들이 경비견을 이용한다면, 거기에 생체 개조 기술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겁니다. 워낙 다양한 괴생명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태여 개를 이용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뉴크로부존은 군사 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이고, 그래서 경찰 대신 군대가 치안을 유지합니다. 군대는 개가 아니라 이상한 괴물을 경비에 사용할지 모르죠. 하지만 현실처럼 인간과 개가 오랜 유대를 이어왔다면, 뉴크로부존 과학자들은 개를 훨씬 강하고 예민하게 개량했을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 그런 개가 등장하는지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여러 리메이드들을 봤으나, 그것들 중 경비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리메이드들은 개조 인간입니다. 개조 동물들은 별로 나오지 않았어요. <페르디도 기차역>은 개조 인간들을 자세히 보여주나, 개조 동물에게 인색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바이오펑크의 끔찍한 악몽을 마음껏 펼쳤으나, 그런 악몽에서 개조 동물은 희미한 편입니다. 사실 개조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걸 동물보다 인간에게 적용하고 싶어할 겁니다.


사람들은 초능력 동물보다 초능력 인간에게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초능력 동물보다 초능력 인간이 훨씬 다재다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개조 동물이 아니라 인조인간을 만들었고, <투명 인간>이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역시 인간을 실험했겠죠. <모로 박사의 섬> 역시 동물보다 인간에게 관심이 많고요. 20세기의 <스타타이드 라이징> 같은 소설 역시 인간화한 돌고래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동물 권리 같은 문제를 떠나서) 인간을 함부로 실험하기 어렵기 때문에 개조 동물이 생체 실험에서 훨씬 많은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이 개조 동물에게 인색한 상황이 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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