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명력 관리와 꿀벌 군집과 생체 비행선 본문
[게임 <서바이빙 마스>의 한 장면. 이런 외계 녹색 거주지는 인공 생태계가 될 수 있겠죠.]
소설 <마션>에서 인상적인 부분들 중 하나는 소설 주인공이 감자를 키우는 과정입니다. 아마 저만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앤디 위어가 왜 소설 주인공이 식물학자라고 설정했겠어요. 우주선 승무원이 화성에서 혼자 농사를 짓기 위해서겠죠. 화성은 죽은 행성이나, 소설 주인공은 감자 눈과 자신의 대변과 물을 적당히 섞고, 불모지에서 새로운 생명들을 튀웁니다. 소설 속에서 감자들은 그저 먹거리가 아닙니다. 죽은 행성에서 새로 태어나는 녹색 생명이죠.
화성에서 생존하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여러 작업들을 시도하나, 대부분 작업들은 기계 공학적입니다. 반면, 감자 농사는 생명체를 다루는 작업이고, 그래서 다른 작업들보다 특별합니다. 감자 농사가 다른 작업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작업은 생존에 필수적이죠. 저는 감자 농사가 다른 작업들과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키우는 작업은 신비로워요. <달을 향한 모험>을 읽었을 때, 저는 '녹색 손가락' 이야기가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달은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는 죽은 위성이나, 우주선 승무원은 거기에 생명들을 퍼뜨렸죠.
농사는 별로 낭만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솔직히 꽤나 힘든 작업이죠. 땡볕 아래에서 작물들을 키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농사를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겁니다. 작은 텃밭이나 도시 양봉조차 꽤나 고된 노동입니다. 대규모 농장에서 전문적인 농업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훨씬 고되겠죠. 게다가 애써 키운 작물들이나 가축들이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면, 농민들은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야 할 겁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소규모 농민을 예찬했고 그 자신 역시 농민이 되기 원했으나, 솔직히 저는 농업에서 환상적인 측면을 벗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키우는 작업은 절대 만만하지 않아요. 하지만 작물들이나 가축들이 무럭무럭 클 때마다, 어떤 농민들은 자연의 위대함이나 생명의 풍성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런 생명력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철학자들이 풍요로운 농업을 예찬하거나, 양봉 농민들이 꿀벌들을 예찬하는 글을 쓰죠. 그런 글들은 다소 낭만적인 구석을 품었으나, 작은 텃밭이나 도시 양봉 역시 생명력을 반증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생명력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분은…. 아마 그런 생명력과 함께 어울린다는 기분이겠죠.
이런 감성을 개조 생명체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령, 유전자 기술자가 생체 비행선을 만든다고 가정하죠. 공중에 뜨기 위해 생체 비행선은 살아있는 기낭이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기낭이 선체를 매단다면, 그건 생체 비행선이 될 수 있겠죠. 유전자 기술자는 살아있는 기낭을 키우고 관리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기낭은 수소를 뿜는 거대한 근육 덩어리이고,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건강하게 번성할 수 있도록 유전자 기술자는 생명체를 관리해야 합니다. 유전자 기술자는 생명체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람이죠.
따라서 본질적으로 꿀벌들을 관리하는 농민과 살아있는 기낭을 만드는 유전자 기술자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저 농민은 꿀벌 군집을 관리하고, 유전자 기술자는 살아있는 기낭을 만들 뿐입니다. 꿀벌 군집과 살아있는 기낭은 모두 생명체이고, 양봉 농민과 유전자 기술자는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을 관리하는 사람이죠. 살아있는 기낭은 가상의 생명체이고, 그래서 좀 기괴하게 보일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꿀벌 군집과 거대한 근육 덩어리는 다르지 않아요. 양봉 농민과 유전자 기술자 사이에 아주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겠으나, 저는 두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가서 개조 생명체 설정은 원대한 자연 생태계로 이어질 수 있죠. 개조 생명체 설정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런 감성 때문일 겁니다. 충만한 생명력이 둘러싸는 기쁨. 생명력을 직접 관리하고 조절하는 기쁨. 살아있는 기낭은 목가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농업과 거리가 멀어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살아있는 기낭에게서 생명력이 번성하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성은 우리가 대보초를 봤을 때 느끼는 기쁨과 이어질지 모릅니다.
왜 대보초가 웅장할까요? 그저 그게 거대하기 때문에? 아니죠. 그게 살아있는 장벽이기 때문입니다. 대보초는 살아있고, 충만한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미국 삼나무나 꿀버섯 무리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생체 비행선과 대보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생체 비행선은 대보초 같은 생명력인 동시에 인간이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생명력입니다. 작은 꿀벌 군집은 대보초에게 비교가 안 되는 생명력이나, 그 군집을 관리하는 농민은 꿀벌 군집이 대보초보다 훨씬 풍성한 생명력이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자신이 두 손으로 키웠기 때문에.
어쩌면 대보초를 관리하는 생태학자들은 정말 경이적인 기쁨을 느낄지 모르겠군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생태학자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울창한 삼림이나 동물 무리에게 감탄사를 보내곤 합니다. 광견병에 걸린 리카온 무리가 대부분 쓰러졌을 때, 생태학자는 리카온 무리를 다시 키울 수 있습니다. 리카온들이 몇 십 마리로 불어난다면, 생태학자는 정말 커다란 기쁨을 느끼겠죠. 어떤 TED 강연에서 생태학자가 불모지를 녹색 초원으로 바꿨을 때, 객석은 찬탄을 터뜨렸습니다.
SF 소설 역시 이런 찬탄을 활용할 수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생체 비행선은 일반적인 거대 괴수와 다를 겁니다. 거대 괴수는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생명력입니다. 반면, 생체 비행선은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생명력이죠. 저는 이런 감성이 로망이라고 생각하나, 개조 생명체 설정은 과학 만능주의로 쉽게 이어질 수 있죠. 메리 셸리는 일찌감치 그게 위험하다고 경고했고요. 꿀벌 군집이나 대보초와 달리 생체 비행선은 새로운 생명체입니다.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죠. 그건 자연 생태계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우리가 함부로 시도해서는 안 되는 작업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생명체를 함부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게 위험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그게 위험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게 기술적인 진보라고 말할 겁니다. 저는 그게 기술적인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체를 개조한다면, 그 전에 먼저 모두 평등하게 생명 윤리 토론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이런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건 절대 불가능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