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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아라크니드와 야만적인 절지류 괴물들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아라크니드와 야만적인 절지류 괴물들

OneTiger 2018. 1. 13. 20:05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 등장하는 아라크니드는 여러 창작물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등장하는 외계 절지류 괴물들이 개미처럼 군집을 이룬다면, 분명히 작가가 아라크니드에게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외계 절지류 괴물로 제일 유명한 설정은 비디오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저그일 듯합니다. 뭐, <스타십 트루퍼스>에게 영향을 받은 밀리터리 SF 소설들도 많겠으나, 우리나라에 그런 소설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죠.


우리나라에서 SF 소설은 SF 영화나 SF 게임만큼 유명하지 않죠. 아니, SF 영화나 SF 게임에 비한다면, SF 소설은 거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수준입니다. 어쨌든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는 우르르 무리를 짓고 상대를 물어뜯는 괴물들로 등장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개체인 저글링은 그런 괴물이고, 최종병기 울트라리스크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작은 저글링이든 거대한 울트라리크스든, 저그 개체들은 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으로 물어뜯거나 찢어발깁니다. 몇몇 개체는 독을 쏘거나 가시를 발사하거나 균류를 감염시키나, 기본적으로 저그는 물어뜯는 괴물입니다.



사실 이렇게 상대를 물어뜯거나 찢어발기는 절지류 괴물은 비단 저그만이 아닙니다. 비슷한 사례들을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점은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 등장하는 아라크니드는 그런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라크니드는 이빨이나 발톱으로 인류 병사들을 물어뜯거나 찢어발기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군대 문화를 수시로 찬양하기 때문에 로버트 하인라인은 아라크니드를 별로 많이 묘사하지 않으나, 몇몇 장면을 살피면, 아라크니드가 기계 장비를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크니드는 우주선을 건조하고 광선총을 사용합니다.


하인라인은 아라크니드가 무슨 병기를 사용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나, 소설 주인공은 아라크니드 병정 계급이 광선총으로 강화복을 달걀처럼 썰 수 있다고 묘사합니다. 따라서 저그나 기타 절지류 괴물들과 달리 아라크니드는 이빨로 상대를 물어뜯는 괴물이 아닙니다. 강화복을 입은 기동 보병이 각종 화기들을 퍼붓는 것처럼 아라크니드 병정 계급은 기동 보병에게 위협적인 광선을 쏘겠죠. 즉, 하인라인은 상대를 무식하게 뜯어먹는 절지류 괴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라크니드는 그런 종족이 아닙니다.



(저그를 이야기한 김에) 아라크니드를 제대로 계승하는 종족을 비디오 게임에서 찾는다면,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 등장하는 클락콘이 더 나을 겁니다. 클락콘은 개미처럼 생겼고 군집을 이루나, 공학 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우주선을 건조하거나 미사일을 쏩니다. 저그와 전혀 딴판이죠. 클락콘은 거대 괴수 개체를 전장에 내보내거나 극단적인 진화를 추구하지 않아요. 하지만 클라콘과 달리 수많은 절지류 괴물들은 아라크니드가 선보이는 '기술적인 특징'을 계승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저 징그럽고 흉측한 겉모습과 철저한 계급 군집을 계승했을 뿐이죠.


심지어 폴 버호벤이 감독한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조차 무식하게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절지류 괴물을 묘사했어요. 영화 속에서 거대한 아라크니드 개체들은 (광선총이나 미사일을 쏘지 않고) 직접 몸에서 플라즈마나 인화성 물질을 뿜습니다. 하지만 원작 설정을 따른다면, 아라크니드 병정들은 직접 플라즈마를 뿜지 않고 미사일을 쐈어야 합니다. 뭐, 비단 아라크니드 광선총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강화복은 아예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죠. 하지만 강화복을 등장시키는 다른 <스타십 트루퍼스> 만화나 미니어쳐 게임, 비디오 게임조차 아라크니드를 무식한 괴물로 묘사합니다.



아라크니드 설정을 창작했을 때, 아마 로버트 하인라인은 무식하게 돌격하는 절지류 괴수를 만들 생각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인라인이 뭐라고 생각했는지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하인라인은 마구 물어뜯는 절지류 괴수와 별로 친한 인물이 아닙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탱크 벌레나 플라즈마 벌레는 하인라인의 취향에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물어뜯는 아라크니드 병정 역시 그렇고요. 하인라인은 싸구려 괴물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설사 그런 이빨 괴물들이 하인라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하인라인은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강화복을 물어뜯는 괴물들을 묘사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아라크니드를 계승하는 여러 절지류 종족들은 이빨이나 발톱을 선보일까요. 왜 실사 영화에서 아라크니드 병정들은 (광선이나 미사일을 쏘지 않고) 열심히 날카로운 발톱들을 휘둘렀을까요.


글쎄요, 저 역시 뭐라고 정확히 짐작하지 못하겠군요. 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썰을 풀어본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절지류 동물을 혐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벌레들을 혐오합니다. 그리고 아라크니드는 벌레들과 비슷하게 생겼죠. 그래서 무식하고 야만적이라는 특징을 반영하기에 좋습니다. 아라크니드를 무식하고 야만적으로 묘사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우주선이나 광선총이나 미사일 발사기를 쥐어주면 안 되겠죠. 그보다 아라크니드 병정들은 무식하게 달려들고 마구 물어뜯어야 하겠죠. 이는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나, 아마 이런 성향이 실사 영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소설 <영원한 전쟁>에서 인류 병사들은 무식하고 야만적인 외계인들의 환영을 봅니다. 그건 최면 작용이었죠. 최면 작용 덕분에 인류 병사들은 외계인들에게 맹목적인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무식하게 물어뜯는 아라크니드 병정 역시 비슷한 장치일 겁니다. 절지류 괴물은 야만적이고 징그러워야 하고, 그래서 광선총을 쏘지 말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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