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생체 개조 소설이 표현하는 충격들 본문
생명체를 주물럭거리는 행위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특히, 그게 동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훨씬 기분이 좋지 않겠죠. (인간을 비롯한) 동물을 수술하거나 해부하거나 자른 적이 있다면, 피나 내장이나 기생충이나 기타 다른 것들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겠으나, 일반적으로 피투성이 내장이나 기생충은 절대 긍정적인 장면이 아니죠. 하지만 바이오펑크 소설들은 그런 부분에 치중하고, 그래서 수많은 바이오펑크 소설들은 징그럽습니다.
아마 그런 징그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바이오펑크를 쓰는 작가들이 있을 겁니다. 기생충이 살을 파먹거나 인간이 절지류 괴물로 변하는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 충격을 남길 겁니다. 아무리 예쁘고 따스한 그림들을 봐도, 그런 충격을 쉽게 지우지 못하겠죠. 이미 1890년대에 허버트 웰즈는 <모로 박사의 섬>을 썼고, 무인도에서 모로 박사는 끔찍하게 동물들을 개조합니다. 현대적인 바이오펑크 소설은 깨끗한 실험실에서 전문적으로 작업하는 과학자나 컴퓨터나 첨단 장비들을 묘사할 겁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19세기 과학자로서 모로 박사는 동물을 썰고 자르고 뜯는 것 같습니다. 비명을 듣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악몽 같은 밤을 보내요.
<블러드 차일드> 같은 소설은 그 충격적인 묘사로서 유명하죠. 옥타비아 버틀러는 정말 차원이 다른 작가 같습니다. 공포와 충격을 묘사하는 그 솜씨는 정말…. 버틀러는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변하거나 생명체를 조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블러드 차일드>는 외계인이 인간의 몸에 알을 낳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이걸 진부한 내용이라고 여길지 몰라요. 하지만 아무리 소재가 진부하다고 해도, 작가의 필력에 따라 소설은 훨씬 끔찍해질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바이오펑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블러드 차일드>는 통상적인 바이오펑크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으스스한 실험실에서 미치광이 과학자가 흉악한 육식동물을 조립하는 소설이 아니죠. 하지만 <블러드 차일드>는 생명체를 조작하는 내용이고, 그래서 저는 <블러드 차일드>가 바이오펑크 같은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해요. 모로 박사가 동물을 썰고 자른 것처럼 외계인 역시 인간을 썰고 자르고 붙입니다. 하위 장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풍기는 느낌이 훨씬 중요하겠죠. <모로 박사의 섬>이 충격적인 생체 개조 소설이라면, (바이오펑크가 아니라고 해도) <블러드 차일드> 역시 그렇습니다.
정승락이 쓴 <풀잎 위의 개미>는 왜 바이오펑크 소설이 징그러울 수 있는지 증명합니다. 이 소설은…. 아, 정말 말하기가 끔찍하군요. 정승락은 무슨 생각으로 <풀잎 위의 개미>를 썼을까요. 이 소설의 주된 소재는 기생충입니다. 소설 속에서 과학자들은 기생충을 공생 생물로 개조했으나, 원래 그것들은 기생충이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이런 기생충 이야기는 그저 사이언스 픽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에는 기생충들이 많고 많습니다. 사실 기생충들은 풍성한 자연 생태계를 상징합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면, 기생충들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울창한 녹색 숲과 화려한 산호초는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사향소나 고래 상어나 세콰이어 같은 생명체들은 정말 장대하고요. 하지만 기생충들은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그것들은…. 그래서 자연 환경은 부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관념적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해요. <풀잎 위의 개미>는 자연 환경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히 자연 생태계에서 영감을 얻었고, 독자는 한 번쯤 대중적인 자연관을 떠올릴 겁니다.
소설이 끔찍하다면, 만화나 영화는 훨씬 더 끔찍하겠죠. 소설보다 만화나 영화는 훨씬 더 시각적입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고, 그래서 소설보다 만화나 애니매이션이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친숙합니다. 이런 매체들은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줍니다. 만화 독자는 구태여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 관객이나 비디오 게임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플라이>는 어느 것이나 징그럽습니다. 흑백 영화는 촌스러울 수 있으나, 나름대로 징그럽습니다. 특히, 옛날 사람들은 <플라이>에 몸서리를 쳤을 겁니다.
저는 아직 원작 소설을 읽은 적이 없으나, 솔직히 읽기가 두렵군요. 저는 카프카가 쓴 <변신>을 무섭게 읽었기 때문에…. 사실 <변신>과 <플라이>는 비슷한 공포를 공유할 겁니다. 인간은 징그러운 벌레로 변합니다. 하나는 허무주의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역겨운 영상으로 향하나, 양쪽 모두 부정적입니다. 카프카는 SF 소설을 쓸 생각이 없었고, <변신>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변신> 같은 소설이 뿜는 공포는 다른 바이오펑크 소설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장르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어떤 근원적인 공포는 비슷할 수 있어요. 인간이 벌레로 바뀌는 바이오펑크 소설은 <변신> 같은 공포를 뿜을 수 있겠죠.
저는 생체 개조를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저는 유전자 조작 작물이나 개조 탐지견이나 강화 약물이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기술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저는 그런 시대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개조 생물들을 보고 싶어요. 어쩌면 그런 기술이 정말 생체 비행선이나 생체 잠수정을 만들지 모르죠. 하지만 징그러운 생체 개조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정말 생체 개조 기술이 진보인지 의문이 듭니다.